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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이야기

대선과 부끄러움2, 또는 위태로운 이야기

정말 흡연을 해야할지, 우왕좌왕한 와중입니다.

결과에 대한 분석들은 차고 넘칩니다. 

20-30대에게, 그리고 50대, 노빠, 민주당, 심지어는 김소연,김순자 두 후보 합쳐 0.5% 나온 좌파에게 까지..

서로 책임을 돌리기에 바쁜 것 같습니다.

저야 정치 이야기는 잘 모르기 때문에 길게 더 이상 말할 수도 없습니다.

정확한 분석이야 그 분들에게 맡겨 두고요.

그럼에도 51.6%의 선택은 바로 우리 자신의 선택이라던 누군가의 말이 떠오르네요.


이 와중에 좀 생뚱맞은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은 글도 썼었는데, 올리진 않았습니다.

조금 위태로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다비아를 RSS로 받아 보고 있는데, 대선 전 날 샘터교인 중 한 분이 올리셨다 지운 글이 그대로 있더군요. 

그 글을 읽고 좀 혼란스럽더군요. 지운 글이라는 사실 또한...

그 글을 쓴 분이 겪고 있을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샘터는 박근혜를 넘어 섰다고(?) 아주 당연히 생각했거든요.

샘터가 어떤 곳일까, 하는 데 까지 생각이 미쳤네요.

제가 알기로 샘터교회는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 출석하게 되는 곳은 아닙니다. (뭐 아이들이야..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오게 될 수도 아닐 수도 있구요.

그래서 저 자신에게 한 번 물었습니다.

저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지만, 신학적인 치열한 고민 끝에 내린 결정, 뭐 그런 것 아니었기에 묻고 또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난 왜  널리고 널린 게 교회인데, 변변찮은 교회당 하나 없이 세들어 있으며, 

요즘 교회 어디에나 있는 식당 하나 없이 교인들이 손수 밥을 짓는 귀찮은 수고를 매 주일 마다 하는,

특별기도회, 철야예배 따위 없으며, 헌금 액수에 따라 대우도 다르지 않은, 사업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교인들끼리 이름도 잘 모르는,

심지어는 어느 교단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독립교회'인 이런 교회를 다니고 있나, 하고 말입니다.

정목사님이 늘 말씀하시는 것이 있지요.

기독교 신앙은 심리적 위로의 차원이 아니라고요. 

기독교 신앙은 심리적 위로의 차원만이 아니다, 라고도 말 할 수 있겠지요.

뭐 그게 그거인지도 모르지요.

우리에게 신앙에 있어 위로의 차원을 부정할 순 없을 거 같아요.

그 위로가 없다면 살아가기가 거의 불가능하겠지요.

그 위로라는 것의 스펙트럼은 다양하겠지만.. 

그래서 이런 말이 있나봐요.

'값싼 은혜'라는 말이 있어요. 싸구려 은혜라고도 한대요.

본회퍼라는 분이 이런 말을 하셨다네요. 본회퍼의 말을 인용하면 이래요.

"값싼 은혜는 우리가 스스로 취한 은혜에 불과하다. 

싸구려 은혜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이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곧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은혜에 불과하다."

(책에서 발췌한 게 아니라 번역이 확실하지 않아요. 누가 수정을 좀)

본회퍼는 이것을 '교회의 치명적인 적'이라고 하네요.

기독교 신앙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돼요.

이것이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우리가 빠져들기 가장 쉬운 위험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구요.


저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 내가 만든 은혜 속에서 자위하는 게 아니냐고.

모양은 좀 다르더라도 아니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

(........)

그럼 이제 어떻게 하겠냐고, 뭘 할 수 있겠나를 물어야 할 차례네요.


이번 대선에 '진인사대천명'이란 말이 자주 오르내리더군요.

사람이 할 수 있는 한 노력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 좋은 말입니다.

'진인사' 없는 '대천명'. 값싼은혜 아닐까 합니다.

진인사, 그것이 십자가이고, 노력이고 애씀인 것 같습니다.

물론 이 노력이란게 누가 누구에게 강요할 수 없는 것이고, 각자 자신이 해야할 바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저는 어릴 때 밭에 가서 일 해라, 하면 죽도록 하기가 싫어서 집을 뛰쳐나가고 싶었으나(결국엔 끌려갔지요, 별 수 있나..)

고구마를 캘 때는 휘파람 불면서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고구마 먹는 게 좋아서..

그럼에도 기독교인은 '대천명'에 방점을 찍지요.

'대천명'을 우리가 과연 받아 들일 수 있느냐가 문제이긴 하겠습니다만.

아무리 노력을 다 해도 삶은 우리를 비껴갑니다.

삶은 늘 우리를 배반한다고 하지요.


아..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냐는 점점 더....... 

마치 정목사님의 설교 말미와 같은 현상입니다.ㅎㅎ

우리가 뭘 해야할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그냥 내가 뭘 해야할 지 정도 말 할 수는 있을 거 같습니다.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싸움입니다. 본회퍼의 말입니다.

제가 자꾸 잘 알지도 못하는 분의 말을 인용해서 좀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인이 박혀 달리 별 감흥이 없는 '순종의 길'과 다르지 않을 거 같구요.

거창하게 들리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정치적인(?) 싸움만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가 신학자가 될수도, 국회의원이 될수도 혹은 철탑에 올라갈 수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 싸움은 나와 적을 이쪽 저쪽으로 나누고서 하는, 

유치원생들 그림책 속에 나올 법한 싸움은 아닐 것입니다.

이 싸움의 시작은 주위를 한 번 찬찬히 살펴보는 데서 시작한다고 말 할 수 있겠네요.

가족이 있고, 이웃도 있고, 친구도 있고, 심지어는 원수도 있겠고, 그리고 자신도 있구요.

그들이 절망에 혹은 외로움에 빠졌는지, 혹은 기쁨에 겨워하는지, 그렇다면 왜 그런지,

나의 어루만짐이 필요한지를 살피는 겁니다.

비난을 무릅쓰고 하나만 더 인용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만이 그 말씀을 듣는 자이다" 라고 한 칼 바르트의 말에 저를 비춰보네요.

그렇네요. 

자신을 돌아보는 일, 나아가 주위를 살피는 일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네요.

물론 어려운 일이네요.  

하물며 오른손으로 똥을 닦던 사람이 왼손으로 똥 닦는 일도 잘 안된다고 하던데, 자신을 돌아 보는 일이야 말해 뭣 하겠어요.


저의 아부지는 "박근혜 대통령 한 번 시켜줘야 한다"고 말하는 분인데,

제가 노동자 후보도 아닌 고작 문재인 얘기 한 번 했을 뿐인데, 어디 가서 그런 말 하고 다니지 말라고 진지하게 말 하십니다.

적어도 "어디가서 그런 말 하고 다니지 말라"고 하는 세상은 아니었음 좋겠네요.

샘터에서도 좀 은혜롭지 않은 글(?)들이 많이 오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50-60대 아닌 젊은 층의 박근혜 지지와 샘터와의 관계랄까, 뭐 그런것도 이야기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아니라,

어렵겠지만, 자유롭게 말해져야 할 것들 아닌가 하고요.

샘터의 몇 안되는 청년 중 하나로서 말하자면,

뭔가를 말 할 수 없는 분위기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샘터가 신학적 혹은 정치적으로 좌인지, 우인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지도 함께 말입니다.



앞으로의 5년, 또 5년 또 5년..... 위태로울 것 같습니다.

보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전 그렇네요.

이 나라 뿐 아니라, 샘터도, 저 자신도..

위태롭게 발 딛고 서 있는 것 같구요.

그럼에도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빛, 

그게 시작이자 끝인데...

이 위태로움 가운데 "있을 때 잘해"란 말이 떠오릅니다.

진지병이 발동했네요.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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