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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이야기

미얀마 제자자랑?

웬 미얀마 제자자랑?

 

한국사회에서 자식과 아내자랑은 팔불출 운운하며 은연중에 금기시된다. 여기에 제자자랑은 포함되지는 않지만, 아마도 아래와 같은 일이 없었으면 이런 글을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추수감사절 주일아침 교회에 들어서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고성대 목사님이 반갑게 인사하며,

 

미얀마 다녀오셨다면서요? 미얀마 인사말은 어떻게 해요?” 하고 뜬금없이 여쭈어본다.

 

? 인사말? 순간 아무 대답도 못하고 무척 당혹스러워 졌다. 그 이유는 인사말을 몰라서가 아니라, 전혀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번 출장에서 우리대학과 협력관계를 맺으려는 대학을 방문하여 떠듬거리는 영어로 세미나 발표를 하였다. 이때 분위기를 친근하게 만드는 요령 중 하나가 현지말로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나름 열심히 외웠었는데 생각나지 않은 것이다. 소싯적엔 총기가 좋다는 말도 더러 들었건만, 어쩌자고 이제 와서는 잊어버려도 좋을 옛날 옛적에 들었던 섭섭했던 말들은 잘도 기억하면서, 엊그제 달달 외웠던 것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다니, 에구.

 

마침 옆에서 열심히 예배 준비하던 박학다식한 정선욱 집사님이 (아마도 우리 교회에서 원조 모르는 게 없는 자유의 꿈집사님과 쌍벽을 이룰 듯), “미얀마 인사말은 밍글라바’, 인도네시아 말은 쏼라~쏼라~’“ 마구 주워섬기면서 기를 팍팍 죽인다.

 

이때 문득 이 당혹스러움을 일거에 만회하는 길로서 미얀마 제자자랑을 하면 어떨까 라는 얄팍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때는 바야흐로 10여 년 전, 한동대에 대학원이 설립된 후 나의 제 1호 석사과정 제자로 미얀마 학생을 받게 되었다. 그 제자는 처음에 학부생들보다도 실력이 부족하였지만, 매우 성실하게 학업에 정진하여 건설분야 구조공학 전공으로 무사히 석사학위를 마쳤다. 졸업 후 이런 저런 사유로 미얀마로 돌아가지 않고 싱가포르의 한 관련회사에 취업하였으며, 몇 차례 소식을 주고 받다가 나의 게으름으로 연락이 두절된 지가 어느덧 수년이 지났다.

 

이번 미얀마 출장은 대학 축제기간을 맞아 잠깐 동안 다른 전공의 두 명의 교수들과 함께 다녀오기로 되어 있었다. 출장 전날 화요일 저녁에야 제자의 이-메일 주소를 찾아보니, 전에 컴퓨터의 모든 메일을 날린 적도 있어서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여러 자료를 뒤지다가 겨우 한 구석에서 잠자던 주소를 찾았는데, 확실치도 않아서 혹시나 하고 그냥 인사말만 적어서 메일을 보냈다.

 

미얀마 양곤에서 금요일 아침 노트북 이-메일 창을 열어보니 제자에게서 답신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당연히 아직 싱가포르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미 3년 전에 귀국하여 회사를 차렸다는 것과, 12월에 결혼한다는 등의 반가운 소식들이 메일에 담겨있었다. 그런데도 막상 전화번호를 보내지 않아서 같은 양곤에 있으면서도 이-메일 말고는 다른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화요일에 보낸 메일의 답신을 금요일에야 받았으니, 이번에 메일을 보내면 그 다음날 토요일 귀국 전에 제자가 읽을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였다. 아무튼 내가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에 읽어본다면 숙소로 전화해 줄 것을 당부하는 메일을 즉시 보냈다.

 

예상한 대로 다음날 숙소를 체크아웃 할 때까지도 제자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행여나 하여 숙소 안내원에게 만약 나를 찾는 전화가 오면 택시 렌트카 운전기사 전화번호로 연결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당일 업무를 마쳤을 때 비록 늦은 밤 항공편 출발까지 여유가 있었지만 시간당 지불하는 택시비도 절약할 겸 즉시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거의 도착할 무렵 운전기사가 정교수를 찾는 전화가 왔다면서 나에게 전화기를 넘겨주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물거품이 될뻔한 제자와의 통화가 간발의 차이로 이루어진 것이다. 수화기 너머에서 황급하게 울리는 첫마디가,

 

교수님, 지금 어디세요?”

 

? 지금 공항에 가고 있지.” 라고 대답하자,

 

그럼 공항에서 만나보겠습니다.”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양곤 국제공항은 내부에 탑승자만 들여보내고, 마중 나온 손님들은 밖에서 기다려야만 한다. 우리일행은 공항에 도착하였지만 제자를 만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머물러야 했다. 이제 택시운전기사도 돌려보냈기에 서로 전화통화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언제, 어디로 제자가 나타날 지 몰라 목을 빼고 눈을 두리번거리는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비슷한 사람이 급하게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가기에 부리나케 뒤쫓아가서 확인하니 역시 제자가 맞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하자 마자,

 

교수님들, 제가 모시겠습니다. 차를 갖고 오겠습니다.” 하고는 조금 후에 도요다 새 차를 몰고 온다. 공항을 빠져 나와 한참을 달려서 고급스런 일식 집에 도착하였을 때 제자에게 부담을 지우기 싫어서 내가 선수를 쳤다.

 

네가 좋은 곳으로 안내하였으니, 이제 알아서 주문하면, 식사비는 내가 내마

 

제가 기쁘게 대접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알아서 척척 주문하였다.

 

함께 동행한 두 교수와 풍성하고 맛있는 요리를 느긋하게 즐기는 도중에 사업은 어떤 지 넌지시 물어보았다.

 

경쟁사가 없을 정도로 사업이 잘되어 매우 바쁩니다.


이런 행복한 대답과 제자의 고급스런 도요다 승용차를 떠올리며, 식사비 정도는 제자가 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짐작하였다. 그대신 다음 달의 결혼을 미리 축하하면서 축의금 봉투를 전해주니 받지 않겠다고 거절하기에, 한국의 전통이라고 우기면서 호주머니에 찔러주었다.


사실, 과거 한동에서 그 제자를 가르쳤던 때에는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미얀마에서 다시 만날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기치 못하게 출장 길에 만나서 좋은 소식도 듣고 저녁대접도 잘 받으니 세속적으로 마냥 기분이 흐뭇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침 동행했던 신앙심이 깊은 교수 한 분은 부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거룩한 해석까지 덧붙여 주었다.


정상모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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