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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6일 - 주현절후 둘째 주일

대 구 샘 터 교 회 주 보

 

2011년 1월16일, 주현절후 둘째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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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초)

(이사야 49:1-7/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

구약의 핵심 사상은 하나님의 선택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모세를 선택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다. 선택이라는 말은 구원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뜻이다. 이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선택이 무의미한 것처럼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위 본문에서 선택을, 또는 부르심을 반복한다는 것은 선택받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 팽배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바벨론 포로이다. 이사야를 비롯해서 중요한 선지자들은 거의 이 사건을 전후해서 활동했다. 그런 맥락에서 선민사상은 더 확고해졌다.

위 본문의 표현은 적나라하다. 하나님이 태에서, 복중에서 부르셨다고 한다. 태와 복중이라는 포현은 하나님의 선택이 존재론적이라는 뜻이다. 나의 의지와도 무관하다. 설교자는 일단 이 사태를 정확하게 붙들어야 한다. 칼뱅의 이중예정도 이런 존재론적 차원을 가리킨다. 이것을 실증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이런 주장이 극단으로 나가면 모순에 빠질 수도 있다. 선택이 존재론적인 사건이라면 결국 결과에 대한 책임이 사람에게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근본적으로 우리 의지를 넘어서지만 우리의 응답을 배제하지 않는다. 태에서 부르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의 부르심에 응할 것이며, 부르심에 응하는 것이 곧 태에서 부르셨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다.

이사야는 소명에 부응했지만 책임을 다 감당하지는 못했다. 이것이 선지자의 영적 갈등이었다. 4절에 그의 생각이 담겨 있다. 헛되이 수고했고, 무익하게 힘을 썼다고 한다. 이사야의 예언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피력한 것이다. 여기서 소명은 두 차원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이사야 개인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민족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소명을 받아서 활동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생전에 성공한 선지자가 있을까? 있다고 해도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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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수성구 상동 66-7 공간울림(예배처소)

예배시간: 매주일 오전 11시/ 수요성경공부: 매수요일 오후 8시

담임목사: 정용섭 010-8577-1227/ 전도사: 전남정(019-528-8044)

 

 

주일공동예배순서

 

[개회예전]

*예배를 여는 교독

<목사>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회중>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7,28)

*오늘의 기도………………………………………………………………………다같이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

우리의 영혼을 드높여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나이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없는 곳이 없으며,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없나이다.

우리 어깨에 닿은 햇살도 하나님의 손길이며,

죽음의 두려움에 빠져 있는 순간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시간임을 믿나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세상을 완성할 분이라는 사실보다

우리 앞에 더 크고 완전한 진리는 없나이다.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야말로

마땅한 도리이며, 누려야 할 기쁨이고,

참된 안식의 유일한 길임을 믿나이다.

주현절 둘째 주일을 맞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신비를 허락하시고

그 구원의 약속을 믿게 하신 하나님께

우리가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시니 감사드리나이다.

오직 성령이 지배하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이 세상에 생명과 구원의 참된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찬송……………………………………(22장)…………………………………다같이

*사죄기도…………………………………………………………………………다같이

목사: 자비로우신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회중: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목사: 우리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릴 때가 많사오니

회중: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목사: 우리의 교만이 하늘을 찌르며, 탐욕이 영혼을 병들게 하나이다. 공연한 일로 낙심할 때가 많으며, 걱정과 근심과 분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가 많사오니

회중: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목사: 지난 한 주간에도 우리는 가족, 이웃, 동료들과의 평화를 이루지 못했나이다.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이 너무 커서 너에 대한 관심이 자리할 틈이 없었사오니

회중: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목사: 빈부의 격차가 더 심해지며 사람이 물질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세상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다같이: 아멘!

*참회의 묵상기도…………………………………………………………………다같이

*용서의 선포…………………………………………………………………………목사

<목사> 우리의 하나님은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자비와 긍휼이 크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께 아뢴 모든 죄는 온전히 용서를 받았습니다. 아무리 큰 죄라 하더라도, 아무리 파렴치한 행위라 하더라도 용서를 받았습니다. 더 이상 그것으로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이후로 똑같은 잘못을 행하지 않도록 하고, 이웃의 잘못도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십시오.

<회중> 주님의 은총에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평화의 인사…………………………………………………………………………다같이

<목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 자리에 모인

모든 형제와 자매들에게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회중> 예배를 인도하는 주의 종에게도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앉으십시오.)

찬송……………(국악찬송 37장, 하늘에 가득찬 영광의 하나님)………다같이

 

[말 씀 예 전]

설교전기도……………………………………………………………………………다같이

주님,

지금 저희가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나이다.

우리의 귀를 열어 말씀을 바로 듣게 하시고,

눈을 열어 바로 보게 하소서.

말씀을 가로막는 악한 영을 막아주시고,

진리의 영만이 우리와 함께 하기 원하나이다.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선포하는 자들이

온전히 그 말씀에 집중하게 하소서.

지금 이 순간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깊이 들어가기 원하오니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구약봉독…………………………이사야 49:1-7………………………류시경 집사

성시교독…………………………122, 주현절(2)………………………목사와 회중

서신서봉독………………………고린도전서 1:1-9…………………류시경 집사

복음서봉독………………………요한복음 1:29-34…………………류시경 집사

설교…………………………하나님의 ‘선택의 신비’……………정용섭 목사

설교후기도…………………………………………………………………정용섭 목사

찬송…………………………………(428장)………………………………다같이

 

[봉 헌 과 친 교 예 전]

신앙고백…………………………사도신경………………………………다같이

*헌금………………………………(50장 3절)……………………………다같이

중보기도……………………………………………………………………정용섭 목사

주기도…………………………………………………………………………다같이

알림……………………………………………………………………………정용섭 목사

 

[파 송 예 전]

*송영…………………………(오소서 평화의 임금)………………다같이

*위탁의 말씀………………………………………………………………정용섭 목사

주현절후 둘째 주일을 맞아

우리는 참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제 담대한 마음으로 세상에 나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힘을 내십시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생명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십니다.

*축복기도…………………………………………………………………정용섭 목사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알리는 말씀]

* 대구샘터교회에 책읽기 모임이 꾸려졌습니다. 명칭은 ‘리다수’(理茶修)라고 합니다. 리다수는 '세상의 이치에 대해 차를 마시며 논하여 마음을 닦는다'란 의미입니다. 영어로는 'REDITH'라고 하는 REading and DIscussing Theology and Human studies의 이니셜을 딴 거라고 합니다. 모임 일시: 매월 첫째와 셋째 주일 오후 1:30분/ 장소: 예배처소/ 읽을 책: 정용섭의 <세상은 마술이다>는 매월 첫째 주일, 조지형의 지식인 마을 시리즈 중 <랑케와 카>(김영사)는 셋째 주일입니다./ 모임 시작은 2월6일부터이고, 해당 도서 27쪽까지 읽으시면 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교회 카페를 참조하시고, 전남정 전도사에게 문의하십시오.

* 신광혜 집사는 한 달간 여정으로 미국 영어 연수 차 15일에 대구를 떠났습니다. 건강하게 잘 다녀오기를 바랍니다.

* 정용섭 목사의 책 <설교란 무엇인가>(홍성사)가 17일에 출간될 예정입니다. 서점에는 19일에 배본됩니다. 온라인으로 구입을 원하는 분들은 가능한 ‘예스24’를 이용하십시오.

* 2011년 1,2월 성경봉독 담당자는 아래와 같습니다.

1월- 2일 김종성, 9일 하해숙, 16일 류시경, 23일 강태주, 30일 정성훈

2월- 6일 구행자, 13일 곽영미, 20일 서병우, 27일 임부자

* 지난주일(1월9일) 헌금: 850,000원

 

 

매일묵상(‘다비아’에서)

 

하나님에 대한 질문(8)

그저께 호렙 산 전승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이야기를 했소. 시내 산 전승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오. 호렙 산과 시내 산은 이름만 다를 뿐이지 똑같은 산이오. 호렙 산 전승은 모세의 소명이 일어난 이야기이고, 시내 산 전승은 율법 수여가 일어난 이야기요. 전자는 출애굽 이전의 광야 이야기이고, 후자는 출애굽 이후의 광야 이야기요. 모세는 시내 산에서 율법을 수여받은 뒤에 여호와께 이렇게 요구하오.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이 요구는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고 싶다는 것이오. 모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염원이 담겨 있는 요구요. 이름을 알려달라는 호렙 산 전승과도 맥이 닿소.

그 뒤의 이야기 전개는 그대도 잘 알고 있을 거요. 모세는 번지수를 잘못 짚은 거요. 인간은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소.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라.”(출 33:20) 그분을 인식론적 틀에 담으려는 모든 노력은 헛수고요.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갈 때 반석 틈에 숨었소. 영광이 지난 뒤 여호와의 등만 보았소.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싶다거나 직접 경험하고 싶다는 인류의 희망은 모두 실패로 끝났소. 직접적인 경험이 불가능하다는 뜻이오. 물속의 물고기가 뭍의 세계를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것과 같소. 뭍으로 나오면 물고기는 죽소. 칼 바르트는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했소. 그 어떤 것으로 하나님과 유비될 수 있는 것이 세상에는 없다는 말이오. 외계인을 상상해보시오. 상상이 가오? 상상이야 할 수 있겠지만 그 상상이 바로 외계인의 실체라고 말할 수는 없소. 지금 그대와 내가 믿는 하나님은 누구요? (2010년 11월28일, 월)

 

하나님에 대한 질문(9)

예수님은 지금 이 세상에 없소. 지금을 성령의 시대라고 말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소. 예수님은 2천 년 전 로마의 식민지 유대라는 작은 나라의 나사렛 사람이오. 그는 당시 로마 시민권이 없는 반역자들에게만 내려지는 십자가형으로 죽었소. 그리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소. 지금 이 자리에서 부활과 승천이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고 하지는 않기를 바라오. 우리 갈 길이 바쁘니 건너 뛸 건 뛰는 게 좋겠소. 예수님과 지금 우리와는 2천년이라는 시간적 틈이 있소. 당시 로마의 아우구스티누스 황제나 빌라도 총독을 지금 우리가 만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도 만날 수 없소.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났다는 말을 쉽게 하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거요?

사람들은 주로 ‘경험’을 말하오. 한국교회 풍토에서는 경험이라는 말만 앞세우면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고 마오. 경험이 믿음과 동일시되고 있소. 툭 하면 믿음이 없어서 그래, 또는 성령 체험이 없어서라고 몰아붙이고 있소. 기독교 신앙에서 경험이 중요한 요소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왜곡의 위험성도 매우 크오. 경험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오. 사이비 이단들의 특징이 경험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이오. 통일교 문선명은 자신이 천국을 마음먹은 대로 오가면서 예수님도 만나고, 하나님도 만난다고 주장하오. 여기 짝사랑하는 남자가 있다고 생각하시오. 이 남자는 여자도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소. 여자의 말과 행동에서 그걸 경험한다는 것이오. 여자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는데도 남자의 주관적인 느낌에 따라서 그렇게 경험될 수 있다는 말이오. 그러니 예수님을 만났다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하나님 경험의 진정성을 주장하는 것은 그렇게 신뢰할만한 것이 못되오. (2010년 12월1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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