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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3일 - 주현절후 다섯째 주일

대 구 샘 터 교 회 주 보

 

2011년 2월13일, 주현절후 여섯째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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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초)

(신명기 30:15-20/ 하나님이 생명이다)

 

신 명기는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행한 설교라고 한다. 출애굽 이후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행해진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규례 모음집이라 할 수 있다. 역사 비평적 관점에서 보면 이 문서는 연대기적으로 훨씬 후에 일어났던 바벨론 포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신명기만이 아니라 구약의 거의 모든 문서는 바벨론 포로 사건과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모세오경은 물론이고, 많은 예언자들이 이 시기에 활동했으며, 성문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바벨론에 의한 이스라엘의 파멸은 성서기자들로 하여금 두 가지 질문에 직면하게 했다. 하나는 자신들이 믿고 따른 여호와 하나님이 누군가 하는 것이다. 능력이 크신 분이라면 자신들이 패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 왜 몰락했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들이 찾은 대답을 가리켜 신명기사관이라고 한다. 그것을 간단히 요약하며 다음과 같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살 것이며, 말씀을 거슬러 우상을 섬기면 죽을 것이다. 이것은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오늘 본문도 16절과 18절에서 이 사실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중략>

여 호와의 명령을 지키면 흥하고, 우상을 섬기면 망한다는 신명기의 진단은 정확한 게 아니다. 이스라엘은 흥한 적이 거의 없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도 근동의 패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늘 설교자는 역사의 객관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구약의 진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것이 설교자의 딜레마이다. 이 딜레마를 넘어서려면 성서텍스트의 은폐된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이 필요하다. 그것 없이 구약의 표면적인 진술을 그대로 전하게 되면 성서해석의 아전인수로 빠지게 된다. 어떤 이들은 미국이 잘 사는 이유를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찾고, 동남아 국가들이 못사는 이유를 우상숭배 탓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제국의 폭력이 고대 아시리아, 바벨론, 또는 로마나 오늘의 미국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축복도 이런 정치 경제적인 힘과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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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수성구 상동 66-7 공간울림(예배처소)

예배시간: 매주일 오전 11시/ 수요성경공부: 매수요일 오후 8시

담임목사: 정용섭 010-8577-1227/ 전도사: 전남정(019-528-8044)

 

 

주일공동예배순서

 

[개회예전]

예배의 부름…………………………………………………………………………… 목사

오 늘은 주현절후 여섯째 주일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운명에서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하나님께 어찌 감사와 찬송을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함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겠습니다. 일어나십시오.

*찬송: 69장1-4절……………………………………………………………………다같이

*오늘의 기도…………………………………………………………………………다같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우리의 생각과 말이 이를 다 감당할 수 없나이다.

저 멀리 우주 끝에서부터

이 가까이 우리 눈앞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나타내고 있나이다.

어제와 오늘도 우리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셨고,

생명의 숨을 쉬게 하셨으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보거나 듣고,

또는 피부로 느끼게 하셨나이다.

이 세상에 드러나 있는 생명체와 사물들이

왜 이리 다양하고 신비로운지

당신의 창조 능력을 우리가 무슨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나이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신비롭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이 행하신 구원 사건에

어찌 비길 수 있겠나이까.

우리에게 생명과 빛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신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우리가 어디서 찾을 수 있겠나이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사죄기도……………………………………………………………………………다같이

목사: 자비로우신 하나님, 저희는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믿는 시늉을 내지만 믿음의 능력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믿음의 내용과 삶의 내용이 일치하지 못했습니다.

회중: 주님, 저희를 용서해 주소서.

목사: 지난 한 주간에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살았으면서도 그 사실을 망각한 적이 많았습니다. 우리 자신의 업적을 나타내는 일에만, 자기를 향한 연민에만 몰두한 탓입니다. 우리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회중: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목 사: 주님은 우리에게 평화의 왕이십니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다는 사실도 들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화의 영에 온전히 사로잡히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살지 못한 저희를 용서해주십시오.

회중: 주님의 용서를 바라나이다.

목사: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서 시험에 들린 가족과 이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교만한지, 그리고 얼마나 나약한지 주님께서 더 잘 아십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위로를 허락해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다같이: 아멘!

*참회의 묵상기도……………………………………………………………………다같이

*용서의 선포…………………………………………………………………………목사

<목사> 우리의 하나님은 완전히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징벌까지도 선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직한 마음으로 아뢴 모든 죄의 내용은 용서받았습니다. 그것으로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웃을 용서하십시오. 우리에게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향해 영혼의 촉수를 기울이고 찬송하십시오.

<회중> 주님의 용서하심을 감사 찬송합니다.

*평화의 인사…………………………………………………………………………다같이

<목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 자리에 모인

모든 형제와 자매들에게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회중> 예배를 인도하는 주의 종에게도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앉으십시오.)

찬송: 국악찬송 41장, 내가 산을 향하여……………………………………다같이

 

[말 씀 예 전]

설교전기도……………………………………………………………………………다같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지금 믿음의 가족들이 함께 모여

당신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마쳤나이다.

우리의 육체가 아무리 배불러도

영혼이 풍요롭지 못하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이까.

우리가 세상의 요구와 유혹에 흔들리지 않도록

말씀으로 채워주소서.

세상의 온갖 풍문과 정보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허약해진 우리 영혼이

이 순간 말씀을 통해서 새 힘을 얻기를 원하나이다.

말씀을 가로막는 악한 영을 막아주시고,

진리의 영만이 우리와 함께 하게 하소서.

말씀을 읽고, 선포하고, 듣는 우리 모두

성령 안에서 하나 되기 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제1독서: 신명기 30:15-20……………………………………………임부자 집사

성시교독: 122, 주현절(2)………………………………………………목사와 회중

제2독서: 고린도전서 3:1-9……………………………………………임부자 집사

*제3독서: 마태복음 5:21-32…………………………………………임부자 집사

설교: 하나님이 생명이다………………………………………………정용섭 목사

설교후기도…………………………………………………………………정용섭 목사

찬송: 419장…………………………………………………………………다같이

 

[봉 헌 과 친 교 예 전]

신앙고백: 사도신경………………………………………………………다같이

*헌금: 633장………………………………………………………………다같이

중보기도……………………………………………………………………정용섭 목사

주기도…………………………………………………………………………다같이

알림……………………………………………………………………………정용섭 목사

 

[파 송 예 전]

*송영: 7장…………………………………………………………………다같이

*위탁의 말씀………………………………………………………………정용섭 목사

주현절후 여섯째 주일의 예배를 마쳤으니

이제 기쁨과 평화의 마음으로 돌아가십시오.

우리는 예배를 드리러 모였을 때만이 아니라

세속의 삶에서도 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종말의 생명이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으며,

그 나라가 속히 우리에게 오고 있다는 사실을

언제 어느 곳에서도 잊지 말고 살아가십시오.

생명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여러분이 생각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십니다.

*축복기도…………………………………………………………………정용섭 목사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알리는 말씀]

* 오늘 예배 때부터 성경봉독의 명칭과 순서를 약간 고칩니다. 구약은 ‘제1독서’로, 서신서는 ‘제2독서’로, 복음서는 ‘제3독서’로 합니다. 제3독서 때는 모두 일어나겠습니다.

* 심방이나 상담이 필요한 분은 전남정 전도사에게 말씀해주세요.

* 임부자(이화련) 집사 가정은 오늘 마지막 예배를 함께 드립니다. 이제 곧 광주로 이사를 갑니다.

* 곽영미 집사는 개인일로 출타 중입니다.

* 정용섭 목사는 서울샘터교회 예배를 인도하러 오늘 서울에 올라갔다가 14일(월요일) 저녁 7시에 열리는 홍성사 주관 ‘설교란 무엇인가 출간 기념 강연회’에서 강연을 하고 내려옵니다. 장소: 양화진 동아리

* 2월 성경봉독 담당자는 아래와 같습니다. 순서를 바꿔야 할 분들은 미리 말씀해주세요.

6일 곽영미, 13일 임부자, 20일 서병우, 27일 구행자

* 지난주일(2월6일) 헌금: 1,289,000원

 

매일묵상(‘다비아’에서)

 

하나님에 관한 질문(16)

어 제 성서와 교회를 하나님 경험의 중요한 요소로 말했소. 두 요소가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말했소. 성서와 교회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중요하겠소? 이 문제가개신교회와 로마가톨릭의 차이이기도 하오. 개신교회는 ‘오직 성서’를 기준으로 하고, 가톨릭교회는 성서와 ‘더불어 교회’를 기준으로 제시하오. 양쪽 모두 나름으로 근거가 있소. 이걸 여기서 다시 설명하지 않겠소. 우리가 소홀하게 생각하는 교회 문제만 간단히 설명하겠소.

교 회 공동체는 단지 기독교 제도와 조직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오. 오히려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이 중요하오. 교회를 가리키는 에클레시아가 바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라 하오. 구체적인 모임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는 교회에 속한 것이 아니오.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떨어져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오. 요즘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나는 것 같소. 마음에 들지도 않고 귀찮기도 하니까 예수를 믿지만 교회는 나가지 않는다고 말이오. 그건 말장난이오. 그런 마치 밥을 먹지 않지만 배가 부르다는 말과 같소. 오해는 마시오. 매 주일에 교회에 나가야 하고, 어떤 봉사를 감당해야만 한다는 말이 아니오. 자기 형편에 맞도록 신앙생활을 해야 하오. 분명한 것은 구체적인 모임에 직간접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오.

교 회는 예배공동체이고, 성만찬공동체요. 성서가 형성되기 전에 공동체가 먼저 있었소. 예수를 따르던 이들의 공동체 말이오. 여기에 속한 이들은 예수의 공생애를 함께 했고, 십자가 처형을 목도했고, 부활을 경험한 이들이오. 이런 삶과 경험이 성서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오. (2010년 12월9일, 목)

 

하나님에 관한 경험(17)

이 틀 전에 말한 대로 예수 경험에서 중요한 것은 성서와 교회공동체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오. 성서와 교회공동체가 바로 예수 경험의 통로이기 때문이오. 이 대목에서 ‘아는’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가 관건이오. 내가 보기에 거기에 이르는 길은 신학이요. 신학을 우습게 생각하지 마시오. 거꾸로 신학을 두려워하지도 마시오. 신학은 그리스도교 영성에 대한 논리적 해명이오.

어 떤 사람들은 신학을 신앙과 대립되는 것으로 주장하오. 이것처럼 어처구니없는 주장도 없소. 성서가 신학의 결과라는 걸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는 거요. 신학이 없었다면 성서도 출현할 수 없었소. 구약의 상당 부분은 신명기적 신학에 근거해서 나온 것이오. 신약의 복음서도 각각의 신학에 근거해 있소.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확연하게 다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소.

오 해는 마시오. 신학이 만능이라는 말이 아니오. 신학을 모르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말도 아니오. 신학보다 성령의 활동이 우선적이라는 말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요. 신학보다는 신앙 경험이 먼저 있었소. 신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주도하지는 않지만 늘 토대를 이루고 있소. 앞에서 말한 성경만이 아니라 모든 교리가 바로 신학의 산물이오. 삼위일체, 종말, 창조에 대한 깊은 신학적 이해가 없이 어떻게 성서와 교회를 이해할 수 있단 말이오? 그런 이해 없이 어떻게 예수 영접이 가능하다는 말이오?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타당성 여부를 어떻게 분간할 수 있단 말이오?

한 국교회의 가장 큰 병폐는 신학무용론이오. 이것은 내가 자주 말했으니 길게 설명하지 않겠소. 교회 현장에서는 신학적이지 않은 설교가 더 환영을 받소. 대중적인 목회자들일수록 신학을 경원하오. 신학교 채플에 강사로 온 설교자들도 노골적으로 신학 무용론을 들먹거리오. 이런 상황에서는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처럼 교회를 양적으로 크게 부흥시키는 사람만 인정받게 되오. 언젠가는 그런 부흥도 비누거품처럼 사그라질 것이오.

교 회에서 신학의 기능은 세상에서 철학의 기능과 비슷하오. 철학을 몰라도 살아가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소. 철학적인 반성을 하지 않을수록 세상에 적응을 더 잘 할 수도 있소. 그러나 철학이 없는 삶은 근본이 허약할 수밖에 없소. 요즘 노숙자들이나 감옥에 있는 사람들도 인문학 공부를 한다고 하지 않소. 삶의 근본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만 실제적인 삶도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거요. 신학도 그렇소. 신학이 없어도 신앙생활에는 아무 지장이 없소. 그러나 신학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실제적으로 건강해질 수 있소. 우리의 예수 경험이 개인의 감수성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교 전통에 굳건히 토대를 내릴 수 있소. 그대는 신학공부를 좀 하시오. (2010년 12월11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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