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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8일/ 부활절 셋째주일

 

대 구 샘 터 교 회 주 보

 

2011년 5월8일, 부활절 셋째 주일

 

오늘의 설교(초)

(누가복음 24:13-35/ 눈이 밝아진 그들)

오늘 설교의 본문인 눅 24:13-35절은 그 유명한 ‘엠마오 두 제자’ 이야기로, 누가복음의 특수 자료에 속한다. 연극으로 치면 2막으로 구성할 수 있다. 1막은 두 제자가 중간에 끼어든 한 남자와 함께 길을 가는 장면이다. 그들의 대화는 메시아적 차원에 속한다.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얼마나 될는지. 2막은 주막집에서 음식을 나누는 장면이다. 한 사람은 길을 더 가겠다고 하고 다른 두 사람은 함께 머물자고 붙든다. 아마 이 두 사람은 길을 오면서 이 한 사람에게서 어떤 강력한 느낌을 받지 않았겠는가. 영적 순간은 자칫 지나쳐버릴 수 있으니 기회가 왔을 때 붙들어야 한다. 이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는 부활의 주님이 성찬식을 거행하듯이 떡을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주는 순간에 제자들의 눈이 밝아진 장면이다.

여기서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눈으로 본다는 것이 매우 분명하고 정확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색맹은 색깔을 구별하지 못한다. 메시아 사건을, 즉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어떤 이들은 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보지 못한다. 고유한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부활의 주님이 왜 가야바나 빌라도에게 나타나지 않았는지, 또는 예루살렘 저자거리에 공개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는지, 그리고 예수님을 추종하던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나타났는지를 생각해보라. 영적 시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도 보이지 않는다.

오늘 본문에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부활은 실증적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신비로운 경험으로만 남아 있다. 마치 화가나 작곡가가 어떤 영감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주님의 부활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경험된 고유한 생명 사건이다. 우리는 그것을 전승으로 물려받았을 뿐이다. 다시 보이지 않게 된 부활의 주님을, 그 사건은 승천 전승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오늘 다시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

예배처소: 대구시 수성구 상동 66-7 공간울림

예배시간: 주일 오전 11시/ 수요성경공부시간: 수요일 오후 8시

담임목사: 정용섭 010-8577-1227/ 전도사: 전남정(019-528-8044)

 

 

주일공동예배순서

 

[개회예전]

예배의 부름…………………………………………………………………………… 목사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부활절 셋째 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와 인류와 세계 전체의 미래입니다. 거기서만 궁극적인 생명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섭리입니다.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우리 모두 기쁨과 평화의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다 일어나십시오.

*찬송 160장…………………………………………………………………………다같이

*오늘의 기도…………………………………………………………………………다같이

부활의 능력으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당신만이 홀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나이다.

이 세상에서 모두 부러워할만한 능력과 매력을 풍기고

구원을 줄 수 있을 것처럼 허세를 부린다하더라도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과 모든 사람들은

피조물의 탄식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나이다.

잠시 세상에 머물다가 사라질 뿐인 것들을 향해

우리가 어찌 영광을 돌릴 수 있겠나이까.

종말 생명의 신비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간절한 심정으로

우리 영혼은 당신을 기다리나이다.(시 133:6)

오직 당신만이 우리 영혼의 피난처이며,

세상이 제공하지 못하는 참된 기쁨의 원천이나이다.

하나님을 통해서만 영원한 안식을 경험할 수 있으니

우리가 어찌 당신께 온 영혼을 기울이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지금 모든 일상을 잠시 멈추고

당신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함께 모였나이다.

이 자리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임재하신 줄로 믿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굴복시키시고 부활의 주가 되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속히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사죄기도………………………………………………………………………………다같이

목사: 평화의 근원이신 하나님, 오늘 저희는 평화와 반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평화를 명분으로 삼지만 실제로는 경쟁과 억압과 폭력에 물들어 있습니다. 나라와 나라가, 민족과 민족이, 여러 집단과 세력들이 서로를 원수로 삼고 있나이다.

회중: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목사: 대한민국에 사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들을 생명의 풍요로움으로 키우고 가르쳐야 할 우리 기성세대가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나이다. 어른들의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나이다.

회중: 주여, 이 나라의 어린이와 청소년을 지켜주옵소서.

목사: 자비로우신 하나님, 지난 한 주간에도 우리는 무기력하게 살거나 지나친 자기열망에 사로잡혀서 살 때가 많았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주님의 말씀을 허투루 듣고 살았습니다. 그 말씀을 반복해서 들어도 영혼의 울림이 없사오니 우리가 어찌하오리이까?

회중: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목사: 주님, 우리는 말해야 할 때 말하지 못하고 말하지 말아야 할 때 많은 말을 하고, 싸워야 할 때에 싸우지 못하고 싸우지 말아야 할 때에 싸웠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외면한 결과입니다. 불순종에 길들여진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다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참회의 묵상기도……………………………………………………………………다같이

*용서의 선포…………………………………………………………………………목사

<목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고, 더 사랑하십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이 아뢴 모든 죄는 용서받았으니 기뻐하십시오. 이웃의 잘못도 용서하고 받아들이십시오.

<회중> 주님은 선하고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평화의 인사…………………………………………………………………………다같이

<목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 자리에 모인

모든 형제와 자매들에게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회중> 예배를 인도하는 주의 종에게도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앉으십시오.)

찬송 국악찬송 91장, 사랑하는 우리 예수 무덤 속에……………………다같이

 

[말 씀 예 전]

설교전기도……………………………………………………………………………다같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당신은 누구시기에

말씀과 세상을 하나가 되게 하시나이까.

당신은 얼마나 신비롭기에

말씀으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시나이까.

우리로 하여금 산소를 들이마시게 할 뿐만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숨을 쉬게 하시어

영육 간에 생명을 유지하게 하셨으니,

우리가 어찌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지금 우리 모두 당신의 신비로운 말씀에 귀를 기울이오니

우리에게 필요한 한 말씀을 주소서.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는 전체 운명으로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증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제1독서 사도행전 2:36-41……………………………………………강태주 집사

성시교독 133, 부활절(1)………………………………………………목사와 회중

제2독서 베드로전서 1:17-23…………………………………………강태주 집사

*제3독서 누가복음 24:13-35…………………………………………강태주 집사

설교 눈이 밝아진 그들………………………………………………정용섭 목사

설교후기도…………………………………………………………………정용섭 목사

찬송 172장…………………………………………………………………다같이

 

[봉 헌 과 친 교 예 전]

신앙고백 사도신경……………………………………………………다같이

*헌금 51장3절……………………………………………………………다같이

중보기도……………………………………………………………………정용섭 목사

주기도………………………………………………………………………다같이

알림…………………………………………………………………………정용섭 목사

 

[파 송 예 전]

*송영 164장 3절…………………………………………………………다같이

*위탁의 말씀………………………………………………………………정용섭 목사

이제 예배를 다 마쳤으니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로 돌아가서

예배의 기쁨과 평화를 전하며 살아가십시오.

그곳에서 여러분은 많은 일을 만나게 될 겁니다.

즐거운 일과 슬픈 일, 쉬운 일과 힘든 일, 희망과 낙심.

그러나 어떤 일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생명의 영인 성령이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십니다.

*축복기도…………………………………………………………………정용섭 목사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알리는 말씀]

* 5월 28일(토요일)은 교우 야유회 겸 가정 예배가 계획되어 있습니다. 교우들은 각자 형편에 맞도록 참가하시면 됩니다.

1) 일정: 오전 11시- 경상북도수목원(포항시 북구 죽장면 상옥리 1-1) 도착, 관람, 점심 식사/ 오후 3시- 동해안 바닷가 산책/ 오후 5시- 안경모 전은혜 집사 가정에 모임, 기도회, 저녁 식사, 친교/ 8시 해산/

2) 교통편 도움이 필요한 분은 전도사에게 말씀하세요.

3) 준비물은 따로 없습니다. 기도회에 필요한 유인물은 교회에서 준비합니다. 점심은 김밥으로 교회에서 준비합니다. 개인적으로 필요한 간식은 각자 준비하세요. 참가여부는 5월22일까지 확정해주세요.

* 교회학교(부장: 구행자 집사)에서 알립니다. 교회학교 교사 전체 모임이 아래와 같이 열립니다. 참석 여부를 미리 알려주세요.

일시: 5월14일(토) 저녁 6시

장소: 중국 식당 ‘예궁’, 수성구 황금2동 760-4

* 이일녀 집사는 가정 일로 이번 주일 서울 출타 중이고,

* 안경모 집사는 두 주간 동안 해외 학회 출장입니다.

* 5월 성경봉독 담당자는 아래와 같습니다.

1일 안경모, 8일 강태주, 15일 김태성, 22일 정지은, 29일 김종성

* 지난주일(5월1일) 헌금: 808,000원

 

 

매일묵상(‘다비아’ 마가복음 묵상에서)

 

그는 살아나셨다(4)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16:2)

이 여성 제자들은 지금 ‘무덤으로’ 가는 중입니다. 그 무덤은 예수님이 묻힌 곳입니다. 예수님은 삼일 전에 이곳에 묻혔습니다. 여성 제자들은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를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이 죽은 자를 위해서 살아있는 자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그 장면을 조금 더 심층적으로 봅시다. 세월이 흐르면 이 여성들은 모두 ‘무덤으로’ 가야 할 처지입니다. 이 여성들만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무덤으로 갑니다. 화장장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죽습니다. 시체가 되고 맙니다. 지금은 남의 장례를 위해서 무덤으로 가지만 아주 빠른 시일 안에 우리 모두는 내 장례의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결국 언젠가는 무덤 속에 홀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서 우리의 시체는 천천히 썩어갑니다. 박테리아가 우리 몸을 양식으로 삼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뼈만 남겠지요. 그 뼈도 언젠가는 먼지가 되고 맙니다. 지금 건강과 미모를 자랑하는 사람도 이런 운명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이런 사실 앞에서 전율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외면하고 살아갑니다. 너무 끔찍하기 때문에 그런 걸까요? 아니면 무덤이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착각하고 있는 탓일까요? 현재의 삶에 몰입해 있다는 게 그 대답이겠지요. 지금 당장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우리의 눈이 고정된 탓에 저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다가오는 무덤의 현실을 못 보는 거겠지요.

우리는 늙은이나 젊은이나 가릴 것 없이 모두 지금 줄을 서서 ‘무덤으로’ 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체를 무덤에 묻는 그 사람들이 곧 그 무덤에 묻혀야 됩니다. 그 무덤 앞에서 우리 모두는 평등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삶도 역시 궁극적으로는 평등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살아나셨다(5)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16:2)

솔직하게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다. 우리가 무덤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로 실감이 날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겉모습만 본다면 죽음과는 전혀 무관해보입니다.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기나 할 것처럼 삽니다. 웨만큼 사는 사람들의 집에는 필요 없는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옷, 신발, 가방, 가구, 책, 음향기기 등, 우리가 죽을 때까지 아무리 써도 다 쓰지 못할 정도로 많습니다.

우리가 일주일 뒤에 죽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최신형 디지털 티브이를 새로 장만할 사람은 없겠지요. 1백만 원짜리 메이커 가방이나 양복을 살 사람도 없겠지요. 지금 갖고 있는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보일 겁니다. 집도 필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몸뚱이에 얹혀살아야 할 우리가 모든 소유를 당장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소유욕은 생존 본능이기도 하기에 무조건 매도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소유가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말이 설교 조로 들린다면 용서하십시오. 저는 여러분에게 종교적 교훈을 드리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삶에 나타나는, 또는 숨겨진 적나라한 모습을 솔직하게 들여다보자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소유가 우리 삶을 파괴하지 않을까요? 아무도 그 기준을 말해 줄 수는 없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질문해봅시다. 우리가 몇 살 때까지만 물건을 사들이고, 그 뒤로는 먹고 숨 쉬며 생존하는 것에만 마음을 둘 수 있을까요? 그것도 제 삼자가 기준을 말해 줄 수는 없습니다.

중세기 한 시절 유럽에서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이 중요하게 회자될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인간만이 죽음을 예상하고 기억할 줄 압니다. 예수의 ‘무덤으로’ 가던 여성 제자들도 바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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