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구 샘 터 교 회 주 보
2011년 6월12일, 성령강림 주일
오늘의 설교(초)
(요한복음 20:19-23/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귀신 비슷한 존재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귀신이 들어왔다가 나갔다 하는 것처럼 성령도 그렇다는 것이다. 성령은 근본적으로 ‘생명의 영’이다. 이런 표현이 막연하게 들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확실한 어떤 현상에 집착한다. 방언이나 신유 등의 현상이 그것이다. 성령의 은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현상들은 성서에서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흔하다. 그런 이상한 현상에 매몰되면 성서가 말하는 성령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생명의 영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와 닿지 않는 이유는 생명이 무엇인지 아직 확연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죽음의 비밀도 여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궁극적인 것은 종말에 그 실체를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이라도 바르게 이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성령을 받으라.”는 말은 생명의 능력을 받으라는 말과 똑같다. 사람이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생명을 줄 수 없듯이 성령을 줄 수 없다. 성령 부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만 가능하다. 그래서 교부들은 성령이 아버지만이 아니라 아들로부터도 온 영이라고 말했다. 부활의 주님이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는 요한복음의 진술은 신학적으로 옳다. 신약성서는 부활을 참된 생명이라고 말한다. 주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생명의 영이 그에게서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이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주님을 통해서 궁극적인 생명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 능력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곧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요한복음 기자는 본문에서 성령만 언급한 것이 아니라 죄까지 언급했다.(20절) 너무 멀리 나간 발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죄는 죽음을 불러온다. 부활이 죽음의 극복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죄의 극복이기도 하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사죄의 선포는 세례와 연결된다고 한다. 예수님은 승천 순간에 세례를 베풀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세례는 하나님과의 근원적인 관계 회복을 가리키다. 사죄를 통해서만 그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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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처소: 대구시 수성구 상동 66-7 공간울림
예배시간: 주일 오전 11시/ 수요성경공부시간: 수요일 오후 8시
담임목사: 정용섭 010-8577-1227/ 전도사: 전남정(019-528-8044)
주일공동예배순서
[개회예전]
예배의 부름…………………………………………………………………………… 목사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그리스도교회는 기본적으로 성령 공동체입니다. 단순히 신자들의 모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주도권은 성령에게 있습니다. 성령이 어떻게 교회를 주도하는지를 우리는 깨어있는 영성으로 기다리고 살펴야 합니다. 우리 함께 성령이 인도하시는 예배를 드립시다. 모두 일어나십시오.
*찬송 14장……………………………………………………………………………다같이
*오늘의 기도…………………………………………………………………………다같이
생명과 진리의 영이신 하나님,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놓을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리셨으며,
창조와 종말과 진리와 생명의 영으로서
매순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심을 믿나이다.
성령은 세상이 창조되던 태초에 활동하셨으며,
세상이 완성될 마지막에도 활동하실 것이며,
오늘도 우리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하시며,
이 세상의 모든 생명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영이나이다.
개인과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면
성령께 온전히 지배당해야 하오니
지금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의 영혼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옵소서.
우리의 분별력과 판단력도 성령 안에서만
바르게 작동될 수 있사오니
성령으로 우리의 이성을 이끌어 주소서.
거짓과 파괴와 교만이 기승을 부리는 이 세상이 변하여
오직 성령께 순종하는 세상이 되기 원하나이다.
한국의 모든 그리스도교회가 성령 공동체로서,
성령의 피조물로서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인도해주소서.
“성령을 받으라.”고 명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사죄기도………………………………………………………………………………다같이
목사: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당신의 자비가 아니면 우리는 당장 죽어야 할 정도로 부패한 사람들입니다. 겉만이 아니라 속까지 부패한 사람들이었음을 고백하나이다.
회중: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목사: 지난 한 주간에도 우리는 많은 것을 듣고 많은 것을 보면서 살았습니다. 많은 것을 얻기도 하고, 많은 것을 잃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삶의 과정이 하나님의 은총인데도 우리는 우리의 짧은 생각으로만 우리와 다른 이들의 삶을 평가했습니다. 주님 앞에서 어리석었음을 고백하나이다.
회중: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목사: 우리는 영적인 분별력이 크게 떨어지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일과 악령의 일을 분별할 줄 모릅니다. 악령의 일을 오히려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성령이여, 저희를 도와주소서.
회중: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목사: 우리는 소유와 소비가 삶인 것처럼 착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성령과의 일치에서만 삶이 확보된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가 많았나이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다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참회의 묵상기도……………………………………………………………………다같이
*용서의 선포…………………………………………………………………………목사
<목사>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여러분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아뢴 모든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회중> 아멘!
*평화의 인사…………………………………………………………………………다같이
<목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 자리에 모인
모든 형제와 자매들에게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회중> 예배를 인도하는 주의 종에게도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앉으십시오.)
찬송: 국악찬송 43장,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하라…………………다같이
[말 씀 예 전]
설교전기도……………………………………………………………………………다같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지금 우리는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영혼의 귀를 열었으며,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았나이다.
헛된 소리에 익숙해진 우리의 귀를
진리의 영인 성령으로 치료하시어
바른 말씀을 분별할 수 있게 하소서.
우리를 살리는 말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하오니
지금 저희에게 필요한 당신의 말씀을 허락해주소서.
가르침과 선포와 치유와 축귀로,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는 전체 운명으로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증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제1독서 민수기 11:24-30……………………………………………하해숙 집사
성시교독 135, 성령강림(1)……………………………………………목사와 회중
제2독서 고린도전서 12:4-13…………………………………………하해숙 집사
*제3독서 요한복음 20:19-23…………………………………………하해숙 집사
설교 <성령을 받으라!>………………………………………………정용섭 목사
설교후기도…………………………………………………………………정용섭 목사
찬송 189장…………………………………………………………………다같이
[봉 헌 과 친 교 예 전]
신앙고백 사도신경……………………………………………………다같이
*헌금 51장2절……………………………………………………………다같이
중보기도……………………………………………………………………정용섭 목사
주기도………………………………………………………………………다같이
알림…………………………………………………………………………정용섭 목사
[파 송 예 전]
*송영 국악찬송 4장, 영광누리소서(1)……………………………다같이
*위탁의 말씀………………………………………………………………정용섭 목사
이제 예배를 마쳤습니다. 세상으로 돌아가십시오. 예배 공동체에 속한 사람답게 세상에서 살아가십시오. 영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십시오. 각자의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짊어지십시오. 주님께서 늘 여러분들과 함께 하십니다.
*축복기도…………………………………………………………………정용섭 목사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알리는 말씀]
* 6월 가정예배는 서구역입니다. 구역조직은 교회 홈피를 참조하세요.
일시: 6월18일(토요일) 저녁 6시
장소: 신광혜, 오임경 집사
주소: 달서구 월성동 월성푸르지오 아파트 108동 2202호
참고: 동구역에 계신 분들 중에서도 시간이 되거나 관심이 있는 분들은 참석할 수 있습니다. 반찬 한 가지씩 가져오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 6월 성경봉독 담당자는 아래와 같습니다.
5일- 김태형, 12일-하해숙, 19일-이선영, 26일-신광혜
* 지난주일(6월5일) 헌금: 699,000원
매일묵상(‘다비아’에서 인용)
바르트의 신학 이야기(45)
신학자는 하나님을 선행하는 그 어떤 선험(Apriori)도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힐라리우스(Hilarius)의 원칙에 의하면 “실체가 말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실체에 종속된다.”(Non sermoni res, sed rei sermo subjectus est.) 혹은 안셀름의 용어로 표현하면 신학적인 인식의 ratio(방법, 이성)와 necessitas(필연성, 위급)는 그의 대상의 ratio와 necessitas에 준하여 방향 잡혀야 한다. 이것의 순서가 뒤바뀔 수 없다. 물론 신학은 모든 다른 학문들처럼 하나의 인간적인 학문으로서 항상 그리고 어디서나 각 시대와 각 상황에서 전해졌고 새롭게 수용하는 통찰들, 개념들, 영상들 및 언어수단들을 사용한다. 이와 같은 것들은 고대말엽, 중세기 바로크 시대, 계몽주의 시대, 관념론 시대, 혹은 낭만주의 시대에서 각각 다르게 형성되었다. 그런데 신학은 그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서도 그 어떤 일반적인 통찰법칙, 개념법칙, 그리고 언어법칙도 신학체계의 중심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구속력 있는 법칙으로 인정할 수 없다.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든, 데카르트의 것이든, 칸트의 것이든, 헤겔의 것이든, 하이데거의 것이든 간에.(102쪽)
위에 고대 신학자들과 라틴어 개념들이 나와서 더 헷갈릴 것 같소. 의미는 간단하고 명백하오. 신학이 각 시대마다 다른 형태로 진술되긴 했지만 그 형태에 구속되지 않소. 그런 형태는 하나님에 대한 각 시대의 독특한 인식일 뿐이오. 그것보다 더 우선하는 것은, 그것들이 종속되어야 할 주체는 하나님의 계시오. 예컨대 해방신학이 있소. 그것은 라틴 아메리카의 상황에서 발생한 신학이었소. 소수의 부자들이 부를 독점하고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은 생존에 급급했던 상황에서 나온 신학이오. 그래서 정치적인 투쟁과 경제적인 해방을 말할 수밖에 없었소. 심지어는 마르크스의 계급투쟁까지 끌어들였소. 바르트에 의하면 이런 방식으로 신학을 끌어가면 곤란하오. 그것은 계시의 신학이 아니라 상황의 신학이 되오. 그것은 하나님에게 주도권이 있는 게 아니라 사회과학에 주도권이 주어지오. 이런 바르트의 입장에서는 자칫하면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가 간과될 수 있소. 신학이 너무 관념으로 흘러서 이 세상의 삶과 무관한 것처럼 보일 수 있소. 바르트는 20세기 자유주의 신학과 21세기 히틀러 시대의 독일교회에 의해서 신학의 독립성이 훼손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 관념적으로 보이는 입장을 취한 것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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