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구 샘 터 교 회 주 보
2011년 8월14일, 성령강림절후 9째 주일
오늘의 설교 (마태복음 15:21-28/ 가나안 여자에 관한 이야기)
예수님은 간혹 어떤 인물의 믿음에 대해서 코멘트 했다. 12년 간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막 5:34)고 하셨으며, 가버나움의 한 백부장에게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하면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마 8:8, 13)고 말씀하셨다. 시각장애인들을 향해서도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 9:29)고 하셨다. 오늘 설교본문에서도 그런 표현이 나온다. 예수는 가나안 여자를 향해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마 15:28)라고 말씀하셨다. 믿음도 크고 작은 것이 있나? 믿음만 있으면 모든 병이 치유되나? 그 믿음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이 오늘 ‘긍정의 힘’ 유의 심리적 자기만족과 무슨 차이가 있나?
본문의 병행구절은 막 7:24-30절이다. 마가복음에는 여자와 예수의 대화만 나오는데 반해서 마태복음에는 중간에 제자들이 끼어든다. 상황이 더 복잡하게 진행된다. 제자들은 도와 달라고 고함을 친 여자를 쫓아 보낼 것을 예수에게 요구한다. 마가복음에는 마태복음과 달리 이 여자의 믿음에 대한 예수의 코멘트가 없다. 전체적으로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의 보도를 극단화했다. 이방인 지역을 대표하는 두로와 시돈 지방의 가나안 여자를 무시하고 대신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일단 그렇게 보인다. 예컨대 마가복음은 자녀로 먼저 배부르게 할 수밖에 없다고 표현하지만 마태복음은 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언급한다.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마태공동체의 상황이 더 절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종교적인 기득권에 안주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거부하는 집단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구원 통치는 교회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교회가 그의 통치에 지배당해야지 거꾸로 가려고 하면 안 된다. 이런 말이 실감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늘 한국 교회는 예수의 복음을 거부한 이스라엘인지, 아니면 부스러기라도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외친 가나안 여자인지를 보면 실감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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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처소: 대구시 수성구 상동 66-7 공간울림
예배시간: 주일 오전 11시/ 수요성경공부시간: 수요일 오후 8시
담임목사: 정용섭 010-8577-1227/ 전도사: 전남정(019-528-8044)
주일공동예배순서
[개회예전]
예배의 부름…………………………………………………………………………… 목사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르시기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하셨고,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형편이 어려울수록 하나님과 가까워진다는 역설입니다. 이 놀라운 삶의 신비를 기억하고, 모두 함께 기쁨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겠습니다.
*찬송 35장…………………………………………………………………………… 다같이
*오늘의 기도…………………………………………………………………………다같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며, 야곱의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 아빠 아버지라 부르신 하나님,
하나님을 유일한 창조주로 믿는 우리 믿음의 식구들이
모든 일상을 멈추고 예배드리기 위해서 모였나이다.
지금 이 순간 예배의 형식에 떨어지지 않고
예배의 영성에 깊이 들어가기 원하나이다.
오늘의 이 예배는 마지못한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영혼의 해방을 경험하고 종말의 생명을 기대하는 이들이
마땅히 행복한 마음으로 참여해야 할 영적인 축제이나이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실 분이시며
만물을 완성하실 능력이시기에
당신만이 예배를 받으실만한 분이심을 믿나이다.
우리의 삶을 끊임없이 흔들고 있는
고독과 허무와 늙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이렇게 기쁨으로 찬양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우리의 영혼을 궁극적인 희망으로 가득 채우기 때문이나이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시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의 길을 내시고
생명의 심판을 위하여 다시 우리에게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사죄기도………………………………………………………………………………다같이
목사: 끝없이 용서의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또 다시 주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서 나름으로 열심히 살고 있지만 삶의 세월이 늘어날수록 용서받아야 할 일만 늘어납니다. 우리가 어찌 해야 하오리까.
회중: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목사: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섬길 때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만들어놓은 것을 절대화하는 습관에 길들여졌습니다. 하나님께만 가능한 일을 사람에게 요구하면 살아왔음을 고백하나이다.
회중: 주여, 저희의 어리석음을 용서해주소서.
목사: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돈을 하나님처럼 섬기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왜곡된 시대정신 앞에서 저희 믿는 사람들까지도 무기력했나이다.
회중: 주여, 저희에게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주소서.
목사: 지난 한 주간에도 우리는 알면서 또는 모르면서 하나님의 선물인 일상을 영적으로 풍요롭게 지켜내지 못했나이다. 너무 많은 것에 관심이 분산되어 정작 생명에 관계된 일을 외면했나이다. 불쌍히 여겨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다같이: 아멘!
*참회의 묵상기도……………………………………………………………………다같이
*용서의 선포…………………………………………………………………………목사
<목사> 우리의 하나님은 자비가 한량없으신 분이십니다. 그 자비가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 앞에 나올 수 있으며, 감히 사죄의 기도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해서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아뢴 모든 죄는 용서받았으니, 기뻐하시고 이웃의 잘못도 용서하십시오.
<회중> 아멘!
*평화의 인사…………………………………………………………………………다같이
<목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 자리에 모인
모든 형제와 자매들에게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회중> 예배를 인도하는 주의 종에게도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앉으십시오.)
찬송: 국악찬송 45장장, 주는 나의 목자시니…………………다같이
[말 씀 예 전]
설교전기도……………………………………………………………………………다같이
진리와 생명의 주님,
우리를 하나님의 세계로 끌어주기 위해서
모든 거룩한 말씀들이 기록되게 하셨으니,
오늘도 필요한 말씀을 허락해주소서.
우리의 영혼이 산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씀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할 때도 많나이다.
이 시간 말씀의 능력인 성령을 허락하시어
우리로 허탄한 것에 기울어지지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소서.
로고스로 창조 때 이미 계셨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제1독서 창세기 45:1-15………………………………………………김성곤 집사
성시교독 30, 시편 67편………………………………………………목사와 회중
제2독서 로마서 11:25-32……………………………………………김성곤 집사
*제3독서 마태복음 15:21-28…………………………………………김성곤 집사
설교 <가나안 여자에 관한 이야기>………………………………정용섭 목사
설교후기도…………………………………………………………………정용섭 목사
찬송 300장…………………………………………………………………다같이
[봉 헌 과 친 교 예 전]
신앙고백 사도신경……………………………………………………다같이
*헌금 50장2절……………………………………………………………다같이
중보기도……………………………………………………………………정용섭 목사
주기도………………………………………………………………………다같이
알림…………………………………………………………………………정용섭 목사
[파 송 예 전]
*송영 6장…………………………………………………………………다같이
*위탁의 말씀………………………………………………………………정용섭 목사
이제 예배를 마쳤으니
각자 삶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예수님도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다가
늘 사람들이 사는 동네와 시장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하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예배의 기쁨을 놓치지 마십시오.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십니다.
*축복기도…………………………………………………………………정용섭 목사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알리는 말씀]
* 여름 연합수련회는 8월26일(금)-28일(주일)에 열릴 예정입니다. 홈페이지에 확인하지 않으신 분들은 오늘까지 참가여부를 전도사에게 말씀해주세요. 수련회 관계로 8월 마지막 주일인 28일에는 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 9월 첫 주일인 4일에는 대구세계육상선수권 대회의 마라톤 시합이 있는 관계로 예배 시간을 낮 12시로 변경하겠습니다.
* 9월부터 다시 가정예배가 시작됩니다. 원하는 가정은 전도사에게 신청해주세요.
* 지난주일(8월7일) 헌금: 686,000원
매일묵상(‘다비아’에서 인용)
사람 창조(1)
창 1:26-30에는 사람 창조 이야기가 나오오. 다섯째 날까지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마지막 여섯째 날에 사람을 지으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 부분이 우리 입장에서 좀 찜찜하오. 여섯째 날에 사람만이 아니라 땅에 사는 온갖 동물을 지으셨단 말이오. 어떻소? 사람이 특별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나쁘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오. 앞선 묵상에서도 짚었지만 사람이라고 해서 땅에서 사는 동물들과 기본적으로는 다를 게 하나도 없소. 이건 생명 현상으로 볼 때 명백한 사실이오. 침팬지와 사람의 유전 인자는 98%가 똑같다고 하오. 사는 방식도 비슷하오. 뭘 먹고 배설하고 성 행위를 하고 자손을 낳고 늙어서 죽소. 가족 관계도 비슷하오. 그들의 사회생활은 내가 잘 모르니 말할 게 없소. 어떤 학자들은 그들에게도 원시적이기는 하나 종교성도 있다고 보오. 그건 믿기 좀 힘든 부분이오. 막연한 두려움이나 기대감을 종교성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소. 어쨌든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땅에 기대서 살아가는 모든 동물과 인간은 동일한 운명체요. 땅이 생존 조건을 상실하면 모두가 사라질 수밖에 없소. 그러니 그 놈들을 친구로 생각하시오. 사실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마찬가지요. 식물 없이 인간 없소.
동물들이 모두 사람의 친구라는 말을 조금 다르게 생각하시는 건 아니오? 사람을 헤치는 동물도 많다고 말이오. 포식동물들은 제쳐 놓고, 독성이 강한 곤충이나 생명을 파괴하는 바이러스 같은 것까지 친구로 생각할 수 없다고 말이오. 그게 생명 메커니즘이오. 지구는 서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원리로 생명을 이어가게 되어 있소. 그게 때로는 잔인해보이기는 하지만 그 방법 이외에는 다른 게 없소.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인간을 비롯한 포식자들이 자리하고 있고, 그 포식자들 위에 세균이 자리하고 있소. 각각의 생명체들은 거기서 쾌감을 느끼오. 만약 인간에게 식욕의 쾌감이 없다면 생명 유지는 불가능하오. 지구의 생명 형식이 깨어지는 때를 가리켜 종말이라 하오. 부활 생명이 현실로 자리하는 순간이오. 그때의 생명 현상은 도대체 어떤 것이겠소? 우리는 상상할 수 없소.
사람 창조(2)
앞의 묵상에서 사람이라고 해서 짐승들과 다를 게 없다고 말했소. 모두 땅에서 나왔으며 땅에서 나온 것을 목소 살다가 땅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그렇소. 창세기 기자도 그 사실을 놓치지 않았소. 우리는 그것을 일단 인정해야 하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이 없다는 말은 아니오. 다른 게 많소. 질적으로 다르다고 봐야 하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오. 도대체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이오? 라틴어로 하나님의 형상은 Imago Dei라 하오. Imago는 영어로 image요. 아리스토텔레스의 핵심 개념의 하나는 질료와 형상인데, 거기서 형상은 form이오. image와 form이 다른 단어지만 신학적으로는 서로 통하오. 양쪽 모두 어떤 근원적인 존재의 능력을 가리키오.
사람의 어떤 부분이 하나님이 형상이오? 겉모습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오.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는 분이시니 그 흔적이 사람의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소. 사랑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생명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소. 우리는 사람의 영이 무엇인지, 영적 작용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알고 있을 뿐이오. 예컨대 시간을 입체적으로 인식한다든지, 죽음과 영생을 인식하는 것이 그것이오. 동물은 아무리 육체적인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시간 개념이 없소. 그래서 그들에게는 역사도 없소. 그들은 오직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오. 사람은 오히려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소. 그 소외가 바로 영적인 능력에 의한 결과라 할 수 있소.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고 생각하시오? 이건 신학의 오래된 질문 중의 하나이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모두 인정하지만 타락 이후로도 계속하는지의 여부는 서로 입장에 따라서 크게 갈리오. 가장 전통적인 입장은 전적인 타락이오. 하나님의 형상까지도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뜻이오. 이와 대립하는 입장은 타락 이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은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고 주장하오. 아마 앞으로도 이 두 입장은 계속해서 논쟁을 벌이게 될 거오. 각각 설득력이 있소. 왜 그런지는 오늘 설명하지 않겠소. 그대가 스스로 생각해보시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창세기의 진술을 기억하시오. 그것이 얼마나 역동적인 진술인지를 그대가 알았으면 좋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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