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구 샘 터 교 회 주 보
2011년 9월25일, 창조절 넷째 주일
오늘의 설교 (출애굽기 20:1-11/ 명령하시는 하나님)
십계명(Dekalog)은 정언명령(定言命令)으로 제시된다. 정언명령은 칸트의 윤리학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목적론적으로’ 행동하는 게 아니라 ‘당위’로서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정언명령은 하나님의 권위가 배타적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유는 그분만이 생명을 선물로 주는 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존재이기에 명령을 내릴 수 없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제자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생명 사건이며, 거꾸로 생명 사건만이 하나님이 명령이다.
오늘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의 요구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인다. 예컨대 제주도와 경제자유구역에 영리병원을 세우기 위해서 준비 중에 있다고 한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영리와 병원이 결합되었다. 인간애의 발로인 의료행위를 영리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아무리 신자유주의 시대라 하지만 후안무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영리교회라는 명칭이 나올 날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이 시대가 이렇게 막장에 이를 정도로 경제적인 영리만을 추구하는 이유는 그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인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십계명의 부정이다.
정언명령은 ‘예’만 요구한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사람은 토를 달 수 없다. 태중의 아이가 세상으로 무조건 나와야 하는 것처럼 무조건적인 순종만 있을 뿐이다. 기도 마지막에 회중 모두가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도 그 기도에 ‘예’ 하겠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교는 기본적으로 ‘예’ 공동체다. 하나님의 통치에 무조건 예로 대답한다. 이것을 공자 왈(曰)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영혼의 순종이다. 오늘 이 시대는 예를 망각했다. 하나님 경험이 없다는 뜻이다. 교회 안이나 밖에나 모두가 눈치를 보고, 머리를 굴리고, 개인적인 이익만 도모할 뿐이지 영혼을 던질 수 있는 ‘예’가 없다. 그 결과는 생명 상실이요, 생명 훼손이다. 그런 삶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불행하다. 설교자는 그 내막을 정확하게 뚫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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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처소: 대구시 수성구 상동 66-7 공간울림
예배시간: 주일 오전 11시/ 수요성경공부: 수요일 오후 8시
담임목사: 정용섭 010-8577-1227/ 전도사: 전남정(019-528-8044)
주일공동예배순서
[개회예전]
예배의 부름…………………………………………………………………………… 목사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 이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모든 일상을 멈추고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만 생각하며 예배드리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모두 일어나십시오. 찬송가 20장을 부르겠습니다.
*찬송 20장…………………………………………………………………………… 다같이
*오늘의 기도………………………………………………………………………… 다같이
독생자를 보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 사랑을 넘치도록 받은 우리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이
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예배를 드리나이다.
우리의 목소리와 눈빛과 호흡을 통해서,
우리의 생각과 판단과 결단과 의지를 포함하여,
더 나가서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모든 운명을 담보한 채
오직 하나님께만 연결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예배를 드리나이다.
순전하게 드리는 기도와 찬송을 받아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생명의 영으로 공명시켜주소서.
그것만이 지금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나이다.
지금만이 아니라 평생 동안 바라는 모든 것이나이다.
그것 이외의 것은 다 지나가고 만다는 엄중한 사실을
다행스럽게도 주님의 은총 안에서 깨달았나이다.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예배의 기쁨과 신비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소서.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 사건 앞에서 깨어 있는 사람이 되며,
염려와 자기만족에 대한 세상의 유혹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신(요 4:2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사죄기도………………………………………………………………………………다같이
목사: 자비로우신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체, 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다는 자기 확신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적이 많았나이다.
회중: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목사: 우리는 남을 향한 비판에는 엄격하고 자신을 향한 반성에는 너그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의 업적에 환호하고 자기의 의(義)에 우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왜 불신앙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나이다.
회중: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목사: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소비할 뿐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놀랍고 새로운 생명 통치를 외면하거나 무시할 때가 많았나이다.
회중: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목사: 세상 곳곳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평화가 파괴되고 있습니다. 무절제한 인간의 욕망으로 사람과 자연이 상품으로 전락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방관하거나 이런 일에 부화뇌동하는 우리를 용서해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다같이: 아멘!
*참회의 묵상기도……………………………………………………………………다같이
*용서의 선포…………………………………………………………………………목사
<목사> 우리 주님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권위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사죄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지해서, 그리고 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선포합니다. 여러분이 아뢴 모든 죄는 용서받았으니,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고 이웃의 잘못도 용서하십시오.
<회중> 아멘!
*평화의 인사…………………………………………………………………………다같이
<목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 자리에 모인
모든 형제와 자매들에게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회중> 예배를 인도하는 주의 종에게도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앉으십시오.)
찬송: 국악찬송 41장, 내가 산을 향하여…………………………………다같이
임성숙 시, 정미 곡
[말 씀 예 전]
설교전기도……………………………………………………………………………다같이
참되고 복되신 주님,
우리를 생명의 세계로 끌어주기 위해서
모든 거룩한 말씀들이 기록되게 하셨으니
이 시간 우리로 일체 다른 것에 대한 관심을 접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소서.
함께 말씀을 읽고 배우며,
심령에서 충분히 소화하게 하시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이 허락하신 영생의 복된 희망을 붙들게 하소서.
세상에 계실 동안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부활 생명으로 죄와 죽음을 극복하신,
마지막 때 생명을 완성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제1독서 출애굽기 20:1-11……………………………………………김정은 집사
성시교독 14, 시편 24편………………………………………………목사와 회중
제2독서 빌립보서 2:1-11……………………………………………김정은 집사
*제3독서 마태복음 21:23-32…………………………………………김정은 집사
설교 <명령하시는 하나님>…………………………………………정용섭 목사
설교후기도…………………………………………………………………정용섭 목사
찬송 545장…………………………………………………………………다같이
[봉 헌 과 친 교 예 전]
신앙고백 사도신경……………………………………………………다같이
*헌금 50장1절……………………………………………………………다같이
중보기도……………………………………………………………………정용섭 목사
주기도………………………………………………………………………다같이
알림…………………………………………………………………………정용섭 목사
[파 송 예 전]
*송영 1장…………………………………………………………………다같이
*위탁의 말씀………………………………………………………………정용섭 목사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예배를 마쳤으니
기쁨과 평화의 마음으로 돌아가십시오.
세상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노력하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축복기도…………………………………………………………………정용섭 목사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알리는 말씀]
* 수요일 성경공부 모임이 매 수요일 저녁 8시에 있습니다. 돌아오는 수요일에는 시편 141편을 공부할 차례입니다.
* 예배 후에 교회운영위원회가 모입니다.
* 9월26일(월요일) 저녁 8:00-10:00시에 설교공부 모임이 본교회에서 열립니다.
* 대구샘터교회에 출석하면서 문화공동체우리 대표로 있는 이진익 목사가 주관하는 음악회 ‘장애인과 함께 하는 콘서트 Perhaps Love 세 번째 이야기’가 아래와 같이 열립니다.
일시: 9월27일(화요일) 저녁 7:30
장소: 수성아트피아 용지홀
기타: 자세한 내용은 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세요.
* 지난주일(9월18일) 헌금: ,000원
매일묵상(‘다비아’에서 인용)
예배(7)-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 무슨 뜻이라 생각하오? 우리는 그런 표현을 흔하게 쓰오. 열린 예배, 또는 경배와 찬양 유의 모임에서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멘트를 자주 날리오.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오? 어떻게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오? 이런 문제는 하나님 표상과 연결되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이 말이 달라진다는 뜻이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만 놓고는 그게 영광을 돌리는 건지, 아니면 영광을 가리는 건지 알 수 없소. 겉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영광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소. 기껏해야 단기 선교를 다녀온다거나 교회 일을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에 머물 때도 많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게 무슨 뜻인지 깊이 생각해보시오. 모르면 그런 말을 쓰지 않는 게 좋소.
예배(8)- 영광은 히브리어로 ‘카봇’이고 헬라어로 ‘독사’라 하오. 이 단어를 일일이 따져들며 조사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오. 성서 시대의 사람들이 왜 영광이라는 개념을 생각했는지 여러 관점으로 조사해야 하오. 예컨대 모세는 시내 산에서 율법 문제가 정리된 후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다 했소. 하나님을 보고 싶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다고 했소. 그 말이 그 말이긴 하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소. 너무나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름을 붙일 수가 없었소. 그래서 영광이라는 단어를 생각한 것이오. 영광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라 할 수 있소. 영광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소. 하나님을 우리가 아직 다 아는 게 아닌 것처럼 영광을 모르는 것도 마찬가지요. 영광이라는 말을 더 깊이 생각해보시오.
예배(9)-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오. 이사야의 성전, 모세의 시내 산을 생각해보시오. 하나님의 영광은 스랍들의 찬양이고, 불붙은 가시떨기이고, 빽빽한 구름이오. 구약의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소. 메타포로만 말할 수 있을 뿐이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오. 이 문제는 내일 말하겠소.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고, 메타포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해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오. 부정을 통한 긍정의 방식으로 말할 수 있소. 예를 들면 이렇소. 하나님의 영광은 유한한 세상의 생명이 아니오. 시간과 공간 안에서, 또는 인식론적인 범주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오. 따라서 영광은 아직 인간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영원한 생명이라 할 수 있소.
예배(10)- 예수 그리스도가 왜 하나님의 영광인지 설명해야겠소.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바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했소.(요 1:14)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말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과 같소. 예수의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궁극적인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주어졌다는 뜻이오. 이것이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오. 이런 말이 자칫하면 뜬구름 잡은 것이 되오. 예수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죽소. 그를 통해서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소. 예수보다는 과학자들과 혁명가들이 인류 역사에 더 많은 도움을 준 것 같소. 만약 그런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다면 그대는 아직 그리스도교 영성의 세계 안으로 들어온 게 아니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을 잘 모르는 것이오. 지금 우리는 예배에 대해서 말하는 중이니 이 문제를 더 말하지 않겠소. 예수와 궁극적인 생명의 관계를 더 생각하시오.
예배(11)- 다시 예배 문제로 돌아가겠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지루하게 생각하오. 예배 시간에 다른 생각을 할 때도 많소.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소. 그럴 만하오. 찬송, 기도, 설교 등등, 모든 게 고리타분하오. 기도가 얼마나 진부한지 모르겠소. 종교적인 언어가 사용되기는 하되 모두 죽어 있소. 복을 달라는 이야기만 반복하오. 때로는 계몽 투의 기도도 있소. 찬송가도 틀에 박혔소. 특히 우리나라 찬송가는 예배 찬송이 별로 없고 대개 부흥찬송이오. 설교는 종교적인 잔소리나 선동에 불과하오. 이런 예배를 지루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오. 이런 것들은 앞으로 바꿔나가면 되오. 예배가 지루한 다른 이유가 있소. 이 다른 이유가 사실은 더 중요하오. 예배를 드릴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오. 세상의 어려운 일에 너무 시달렸든지, 거꾸로 세상의 좋은 일에 마음을 너무 빼앗겨 버렸소. 그러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멀게 느껴지오. 복권 발표를 기다리는 사람이 시를 읽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오.
예배(12)- 예배를 인도하는 나 자신도 예배의 집중력이 흐트러질 때가 간혹 있소. 성시교독을 하다가도 순간적으로 다른 생각이 들어서 단어를 틀릴 때가 있소. 찬송을 부르다가도 가사를 틀리기도 하오. 집중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이처럼 어렵소. 하나님은 보이지 않소. 신자들은 눈에 보이오. 하나님의 생명 약속은 멀리 있지만, 지금 돈벌이는 바로 눈앞에 있소. 예배의 집중력을 순간적으로 놓치는 것은 어쩔 수 없소. 그럴 때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예배의 중심으로 들어가도록 하시오. 기도와 찬송과 설교의 중심으로 들어가도록 하시오. 기도와 찬송의 내용이 헛돌지 말고 우리 영혼을 울려야 하오. 이를 위해서 예배 인도자들은 많은 준비를 해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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