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5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F9LmW_KVECs?si=ZbmyMqvRusVqmRHl
▣ 들어가는 말
- 명절, 기쁨과 불안의 경계
추석은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처럼, 풍요와 감사의 절기입니다. 귀향길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들녘은 황금빛으로 물듭니다. 그러나 그 빛의 이면에는 그림자도 있습니다. 정치적 성향의 차이로 벌어지는 말다툼, 고부간의 오래된 앙금, 명절 음식 준비의 과중한 부담, 세대 간의 생각과 문화의 차이, 제사 문제 등으로 인한 신앙적 긴장…. 가족은 가장 따뜻해야 할 이름이지만, 동시에 가장 깊은 상처의 이름이 되기도 하지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테어도어 아도르노는 철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데,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쓴 『계몽의 변증법』(1947)에서, 계몽이 본래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미신을 몰아내려 했지만, 오히려 새로운 지배와 억압의 도구가 되었다고 탁월하게 분석합니다. 과학과 기술이 인간 해방 대신 도구적 이성으로 변질되어, 인간을 지배하고 자연을 억압하는 수단이 되었다고 비판하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흔히 가족은 그 무엇보다 친밀하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관계라고 가정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관계이기 때문에 뼈아픈 폭력과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발생하기도 하기도 하지요.
- 가족, 모든 것의 시작
문학과 철학은 오래전부터 가족을 인간의 근원적 비극이 드러나는 무대로 묘사해 왔습니다. 가족은 가장 따뜻한 울타리이면서 동시에 가장 치열한 전쟁터이기도 합니다. 한편에서는 돌봄과 사랑이 흘러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소유하려는 마음, 독점하려는 욕망, 그리고 억압과 갈등이 고개를 듭니다. 고대의 오이디푸스 비극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가족은 욕망과 금기의 얽힘 속에서 인간이 처음으로 자신을 마주하는 자리입니다.
프로이트는 가족을 “리비도(libido, 성적 에너지)”가 가장 처음 얽히는 장으로 보았습니다. 아들은 무의식 속에서 어머니를 욕망하고, 아버지를 경쟁자로 느끼며 갈등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 욕망을 억압하고 아버지와 동일시하면서 사회적 규범과 초자아(Superego)를 형성하게 되지요. 이런 과정에서 인간은 도덕, 사회 규범, 금기를 배우고 내면화합니다. 가족은 겉으로는 애정과 돌봄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지만, 깊은 차원에서는 금지와 욕망, 사랑과 증오가 얽히는 갈등의 무대이지요. 가족은 인간이 타인과의 관계 방식을 학습하는 최초의 장이자, 평생 반복되는 심리적 패턴의 원형이 됩니다. 즉, 단순히 따뜻한 울타리가 아니라, 사랑과 증오, 갈망과 좌절이 교차하는 인간 실존의 축소판이지요.
어쩌면 인간의 성격, 삶의 태도, 관계 방식, 자아 정체성 등 모든 것이, 바로 이 가족에서 시작되고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인류사에 있어 교육, 종교, 철학, 인문학 등 인간의 진보와 발전, 성숙과 변화를 위한 치열한 고민과 노력, 분투가 있어 왔지요.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인간의 근원적 토대를 형성하는 가족이 훨씬 더 중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가족’ ‘일상의 삶’ ‘개인이 자기의 삶을 가꾸어 가는 노력’ 등 소소한 일상처럼 보이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것이 실상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전부일지도 모릅니다.
▣ 요셉 이야기
- 편애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유난히 사랑하여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요셉을 편애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양한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야곱은 자신의 아버지 이삭에게 편애의 상처를 경험합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창25:28) 자신이 경험한 깊은 상처가 스며들어 자신도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요. 둘째,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창37:3) 늦둥이가 그렇게 예쁘다고 하는데, 성경은 야곱에게 요셉은 그런 아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벤 제쿠님(‘노년에 얻은 아들’)”은 일반적으로 ‘늙어서 낳은’ 뜻이지만, 고대 역본/주석에서는 “지혜를 배우는(가르친) 아들”의 뉘앙스로도 읽힙니다. 다시 말해서, 야곱이 요셉을 후계 수업 대상으로 삼았다는 해석도 가능하지요(창 37:11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와도 맞닿음). 셋째,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창29:18)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라헬이 죽으매…”(창35:16~20) 요셉은 야곱에게 사랑의 기억과 슬픔이 겹친 ‘라헬의 장자’였고, 이는 편애의 강력한 정서적 배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것이라”(창48:5) 야곱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자기 아들로 입양해 요셉에게 실질적으로 ‘두 몫’의 분깃을 부여합니다(창 48:22). 장자권을 상실한 르우벤을 대신해 사실상 요셉을 장자로 삼은 것으로 보입니다. 요셉에 대한 편애는 감정만이 아니라 실제로 상속권과 장자의 권위를 부여한 것입니다.
- 형제들의 역학
그러나 야곱은 그러한 편애와 차별은 형제들 사이의 불안과 긴장을 증폭시킵니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형제들은 모두 아버지의 사랑을 독점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지요. 사랑의 결핍을 느낄 때, 서로를 형제가 아니라 경쟁자로 여기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형제들의 질투와 암투는 요셉을 구덩이에 빠뜨리고 노예로 팔아넘기는 배신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그리스 비극의 관점에서 보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오이디푸스는 알지 못한 채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함으로써, 가족 질서의 가장 근원적인 파괴를 보여줍니다. 아버지를 넘어서려는 아들의 욕망, 어머니를 독점하려는 충동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늘 내재한 원초적 긴장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남편 이아손의 배신에 분노한 메데이아는 복수심에 결국 자녀들마저 죽이고 말지요. 어머니의 사랑마저 파괴해 버리는 이 극단의 복수는, 가족이야말로 사랑과 증오, 보호와 파괴가 가장 치열하게 교차하는 공간임을 보여줍니다. 성경 속 요셉의 형제들도, 결국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갈망이 만든 희생자와 가해자의 드라마를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일까요?
- 비극의 끝
이런 상황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과 고통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렵게 얽혀 있는지 알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사랑하지만, 마치 자로 재듯 똑같이 사랑할 수는 없지요. 하물며 똑같이 사랑한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녀들의 입장은 또 다를 수 있고요. 혹은 편애나 차별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을 하는 당사자 역시 또 다른 피해자일지도 모르지요. 내 안에 남아 있는 부모나 다른 가족이 준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물려주게 되는 것이지요. 서로 격렬하게 다투고 갈등하는 형제, 자매도 단지 그들의 인성의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와 상처가 얽히고설켜 갈등과 고통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해결이 가능하기는 할까요? 이러한 비극을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요?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전혀 다른 눈으로 형제들을 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놀라운 통찰입니다. 가족 간 고통과 갈등은 시간과 상황이 흘러가며 켜켜이 쌓이게 되고,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갈등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알 수 없고, 깊은 골과 앙금만 남아 있게 되지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불행이 되고 말지요.
요셉의 이야기는 이런 비극과 닮아있습니다. 부모의 편애, 형제의 질투, 가족의 배신…. 그러나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된 뒤, 전혀 다른 눈으로 형제들을 바라봅니다. 경쟁과 질투의 자리에서 벗어나,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시선으로 변화한 것이지요. 자기 삶의 의미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바라보게 될 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될 때, 형제 관계도 새로운 의미로 회복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45:8) 그는 복수의 칼자루를 쥘 수 있지만, 용서를 선택합니다. 자기 삶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받아들일 때, 형제와 가족의 관계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 잃은 아들
- 아버지를 떠나다!
누가복음의 탕자 비유도 우리를 가족의 드라마로 초대합니다. 작은아들은 자유를 갈망하며 집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방탕과 파멸로 끝나지요. 아버지 생전에 상속을 요구하는 행위는 고대 팔레스타인에서 사실상 아버지에 대한 모욕이자 관계 단절을 의미합니다.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허랑방탕하여” “낭비하더니”… 등은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정서적인 관계의 단절, 정체성의 붕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가족 관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가족의 갈등과 불화 등으로 부모, 가족과의 관계를 끊고 자신만의 삶을 추구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단절이 바람직한 대안이 될 수는 없지요.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단절되고 고립된 자율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지요. 건강한 관계를 끊고 성공과 성취를 추구하는 것이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것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삶의 성공은 부나 성취가 아니라 진정한 관계의 회복이라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짜 행복, 자유는 온전한 관계성에서 오는 것이지요. 성취지향에서 관계지향으로 돌이키라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모든 걸 잃은 아들은 아버지께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달려와 그를 끌어안습니다. 조건도, 심판도 없습니다. 오직 기쁨과 환영뿐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으로 포용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4) 관계가 회복됩니다.
- 나의 몫
그러나 큰아들은 분노합니다. 그는 늘 아버지의 곁을 지켰지만,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충분치 않다고 여깁니다.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지 않으셨습니다.”(눅 15:29) 누구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고, 누구는 “닭 한 마리” 잡아 주지 않는 차별과 불공평에 분노합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형제들 간의 비교와 부모의 공평성에 대한 갈망입니다. 큰아들의 눈에는 불공정이 보이지만, 아버지의 눈에는 잃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는 기쁨만 있습니다. 부모의 눈과 자식의 눈은 달랐습니다. 큰아들은 ‘몫’을 따지지만, 아버지는 ‘생명’을 기뻐합니다. 누구의 잘못일까요? 어찌해야 할까요?
그리스 비극 메데이아가 보여준 부모-자식 관계의 파괴는, 부모의 사랑이 왜곡될 때 어떤 파국이 오는지를 극적으로 드러냅니다. 반면 탕자의 비유는, 부모의 사랑이 조건 없이 열릴 때 어떻게 관계가 새롭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눅15:28) 둘째 아들에게 보여주었던 사랑,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15:20), 그것과 같은 사랑을 맏아들에게 보여줍니다. 큰아들을 위로하고 다독입니다. 그리고 아들이 보지 못하는 아버지의 시선을 알려 줍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15:31)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15:32) 동생처럼 관계를 단절하지는 않았지만, 의무와 책임 의식에 사로잡혀 기쁨을 상실한 자기의 의에 사로잡힌 그의 눈을 엽니다. ‘이 모든 게 다 너의 것이다.’ ‘삶은 고통이 아니라 누림이다.’ ‘너는 노예, 종이 아니라 자유로운 아들이다.’ ‘삶을 누려라’ ‘삶을 즐거워하라’
기독교적 성숙은 ‘관계 속 자유’입니다. 둘째 아들의 떠남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해방’이 아니라 고립되고 단절된 자율이고, 큰아들의 삶의 방식, 태도는 ‘순종’이 아니라 자기 몫, 공로 계산이지요. 그 둘을 향해 아버지는 “달려가” “나와서” 기꺼이 내려가고 낮아지고 먼저 다가오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은혜, 사랑이야말로 단절을 넘어 관계를 다시 열고 회복하는 힘인 것입니다.
▣ 나가는 말
- 가족 속 인간의 욕망과 은혜의 가능성
가족은 인류 역사 속에서 가장 오래된 드라마의 무대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넘어서고 싶어 하고, 딸은 아버지를 떠나 남편을 선택하면서 배신과 분리를 경험하며, 형제들은 부모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며, 부모는 자식을 소유물처럼 지배하려 합니다. 이것이 가족의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그러나 심리학자 보웬의 말과 같이, 가족 안의 갈등은 “세대를 이어 전달되는 정서적 긴장”입니다. 우리는 이 긴장 속에서 끊임없이 상처받고, 또 상처를 줍니다. 오이디푸스와 메데이아는 그 욕망의 극단을 보여줍니다. 요셉과 탕자의 이야기는 그 속에서 회복의 길, 화해와 은혜의 길이 열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경, 문학과 심리학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것은, 자기 삶을 온전히 살아낼 때 관계도 새로워진다는 사실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자기 욕망의 연장선이 아니라, 독립된 인격으로 존중할 때, 부모-자식 관계는 건강해집니다. 형제가 서로를 경쟁자가 아닌 동행자로 볼 때, 비교와 질투는 사라집니다. 부부가 서로를 소유가 아닌 동반자로 인정할 때, 사랑은 자유롭게 흐릅니다.
요셉이 형제들의 배신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였듯,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품에서 새로운 존재로 받아들여졌듯, 큰아들이 세계가, 삶이 책무와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며 누림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진정한 화해와 치유가 일어납니다. 가족 관계의 치유는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각자가 자기 삶을 온전히 살아낼 때, 관계는 건강하게 변화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하나님의 선물로 바라볼 때, 형제가 비교가 아닌 자기 삶에 충실할 때, 부부가 서로를 지배가 아닌 동행으로 바라볼 때, 가족은 비극의 무대가 아니라, 은혜의 학교가 될 수 있습니다. 가족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인간 욕망과 갈등의 집약지였습니다. 오이디푸스와 메데이아는 가족이 어떻게 비극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요셉과 탕자는 가족이 어떻게 은혜의 자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정적 결론이 아니라, 열린 질문입니다. “가족은 무엇인가?” “나는 가족 안에서 어떤 욕망과 상처를 살아내고 있는가?”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어떤 새로운 길을 여시는가?” 릴케는 말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하나님이 보는 눈으로 보는 것이다.” 가족이란 바로 그 눈을 배우는 자리일지 모릅니다. 톨스토이의 『부활』은, 죄와 배신으로 얼룩진 인간의 이야기를 결국 회개와 화해로 마무리합니다. “용서는 완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 새로운 삶의 문이 열렸다.” 가족도 그렇습니다. 완전한 결론이나 완전한 화해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우리 안에도, 하나님은 새로운 길을 열어주십니다. 추석이라는 시간, 이 질문과 이 희망을 붙잡는 것 자체가 은혜의 시작일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우리를 가족으로 부르시고 서로 기대어 살게 하셨으나,
집착과 욕망, 다툼과 갈등으로 상처 입은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아버지를 거부하고, 형제와 다투고, 자식을 소유하려 했던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게 하소서.
요셉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하시고, 탕자의 아버지처럼 용서하게 하소서.
각자가 온전한 자기 삶을 살아내게 하시고,
가정이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이번 추석, 가족이 무엇인지 다시 묻고 다시 배우며,
하나님의 새로운 길을 경험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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