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IB3rZs14Bhc?si=Gu49FNIrCsEuQxr9
▣ 들어가는 말
- 기도란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비유,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 ‘바리새인과 세리’는 사실 하나의 질문을 두 방향에서 던지고 있습니다. “기도란 무엇인가?” 더 정확히 말하면, “누가 하나님 앞에, 어떤 근거로 서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기도한다는 건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일 테지요. 인간이 기도한다는 것,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 말을 건네는 행위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 관한 문제일 것입니다. 결국 기도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가를 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누가는 의도적으로 이 두 비유를 나란히 배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첫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18:1) 두 번째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18:9) 누가는 굉장히 노골적으로 비유의 목적을 드러내 보입니다. 기도하는 자의 태도와 정체성을 보여 주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시인이자 사제였던 R. S. 토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신 앞에 남아 있는 일이다.” 오늘 본문의 비유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말 같습니다. 본문의 비유에는 설득의 언어도, 확신의 근거도, 성공의 보장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을 떠나지 않는 사람과 그 태도가 있을 뿐입니다.
- 적과 흑
19세기 사실주의의 선구자로 불리는 스탕달은 “소설이란, 큰길을 따라 들고 가는 거울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소설은 현실을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반사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의 대표작 『적과 흑』(1830)은 프랑스 혁명(1789) 이후 나폴레옹 제국이 몰락(1815)하고 부르몽 왕정복고의 대혼란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목의 ‘적’은 나폴레옹 군대의 붉은 군복의 색인데, 영웅적인 출세, 세속적 야망을 상징하고, ‘흑’은 성직자의 검은 옷으로 교회의 권력과 위선적 경건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주인공 쥘리앵 소렐은 뛰어난 지적 능력과 감수성을 갖춘 하층계급 출신입니다. 그래서 쥘리앵은 신분 상승을 위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믿지 않으면서도 성직자가 되기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사랑조차도 사다리를 오르기 위한 철저한 전략으로 이용합니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기 행동의 정당화를 멈추지 않습니다.
스탈당이 그리고 있는 신학교의 모습은 경건의 장소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순종과 정치적 감각을 훈련하는 곳입니다. 신학생들은 신앙을 도구로 종교권력자에게 순종하며 잘먹고 잘사는 출세의 날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기도는 신을 향한 언어가 아니라 상급자를 향한 언어로 변질해 있습니다. 신앙이 구원의 언어가 아니라 자기 증명의 언어가 될 때, 그곳은 성전이 아니라 꾸미고 가장하는 극의 무대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지요. 이 작품은 묻습니다. “우리는 정말 신을 믿는가?” “삶의 도구로 믿는 척하는가?” “신 앞에 서 있는가?” “그저 사람들 앞에서 신의 언어를 사용할 뿐인가?”
▣ 과부의 기도
- 기도는 약자의 존재 방식이다!
예수는 왜 기도에 대한 비유에서 ‘과부’를 등장시키셨을까요? 고대 유대 사회에서 과부는 법정에서 직접 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대신 말해 줄 ‘고엘’, 즉 되찾고 책임져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 속 과부에게는 고엘이 없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외롭다는 뜻이 아닙니다. 억울함을 풀어 줄 통로가 없고, 삶을 지켜 줄 구조가 없다는 뜻입니다. 사회적으로는 이미 죽음과 다르지 않은 상태인 거지요. 그래서 과부는 직접 재판관을 찾아갑니다. 이 장면은 용기 있는 여성에 대한 미담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회 질서가 무너져 있음을 고발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약자를 보호할 장치는 사라진 지 오래고 과부는 언제든지 압제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예수는 바로 이런 모든 권리를 잃어버린 과부를 ‘기도하는 자’의 전형으로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기도하면 떠올릴법한 경건한 종교인이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의 관념에 기도와 가장 동떨어진 모습이지요. 자신을 보호해 줄 장치는 사라졌고, 스스로 권리를 증명할 수도, 재판관을 설득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과부는 논증하지 않고 설득하지 않습니다. 그저 호소할 뿐입니다. “내 원한을 풀어 주소서…” 호소의 결과와 처분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주장할 권리도 힘도 없습니다. 그저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요. 재판장의 호의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지요. 여기서 기도의 놀라운 의미가 밝혀집니다. 기도는 말의 유창함이 아니라 의존 고백입니다. 과부의 기도는 응답을 얻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 외에는 길이 없다는 삶의 태도입니다. 기도하는 인간의 권리나 능력이 아니라 기도의 대상자에게 모든 것이 전적으로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기도는 힘 있는 자의 거룩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힘없는 자의 생존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설 수 없는 존재의 삶의 방식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 불의한 재판관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18:4–5) 재판관은 원래 ‘하나님의 대리자’여야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전통에서 재판관은 단순한 공무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집행하는 자리이며, 가난한 자의 억울함을 풀어야 할 존재이지요. 그러나 비유 속 재판관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18:2) 이는 단순한 성격 묘사가 아니라 권력의 타락에 대한 선언입니다.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도 존중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타락한 권력의 초상입니다. 정의, 사랑이 작동하지 않는 불합리한 세계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18:7) 예수는 ‘하물며’라는 대조를 사용합니다. 이토록 타락한 권력자조차 귀찮아서라도 반응하는데, 하나님은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기도는 세상이 정의롭다고 믿는 행위가 아니라, 이 불의한 세계 속에서도 하나님이 정의롭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마지막에 이렇게 묻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18:8) 믿음이란 현실이 바뀌지 않아도 끝까지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태도입니다. 불의한 세계 속에서 과부와 같이 절대 의존의 태도, 삶의 방식을 지킬 수 있을까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끝까지 하나님께 매달리는 존재 방식입니다.
▣ 바리새인과 세리
- 나는 다르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례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8:11-12) 바리새인의 기도는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토색”의 원어적 의미는 ‘강탈’ ‘착취’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단순한 도둑이 아니라 권력, 지위, 제도를 이용해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를 말합니다. 주로 세리나 관리, 지주, 권력자와 연관된 죄목이지요. 사회적 약자를 착취하는 구조적 죄를 뜻합니다. “불의”는 ‘의롭지 않은’ ‘정의의 질서를 깨뜨리는’ 의미입니다. 개인적 윤리보다 공동체 질서의 붕괴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즉, 재판에서의 불공정하거나, 계약과 약속을 파기하거나, 약자를 보호하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간음”은 결혼 언약을 깨뜨리는 행위로서 성적 윤리이면서 동시에 언약 파괴를 상징합니다. 성경에서 특히 구약에서 간음은 단지 성적 문제를 넘어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는 은유로 자주 사용되지요.
다시 말해서, 이 바리새인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상당한 재산과 권력을 가진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큰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약자들을 괴롭히지 않았고, 나만의 이익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으며, 쉽게 유혹에 빠질 수 있는 성적인 죄나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적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는 의도적으로 당시 사람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고 있는 기도자의 모습을 보여 준 것이지요. 청중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 사람처럼만 살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지 않을까?” 예수는 이 통념을 알고 계셨고, 그래서 의도적으로 가장 흠잡을 데 없는 기도자를 등장시킨 것이지요.
- 나는 죄인입니다
세리는 바리새인의 정반대입니다.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18:13) 세리는 공적 정의를 훼손했고, 자기 이익을 위해 구조적 악에 가담했으며, 종교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림을 보시면 그 모습을 너무 잘 묘사하고 있지요. 청중의 도덕 상식에 따르면, 세리 같은 놈은 성전에 들어오지도 말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더러운 놈입니다. 성전마저 더럽히는 놈이지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원어의 의미를 그대로 직역하면, “하나님이여, 이 죄인에게 속죄가 되어 주십시오.” 즉, 이 기도는 감정적 호소가 아닙니다. 관계를 회복해 달라는 간청입니다. 나의 그 어떤 모습도 당신께 가까이 갈 수 없음을 압니다. 내가 당신을 향해 손을 내밀 수 없으니, 당신께서 손을 내밀어 주십시오. 이런 의미이지요. “나는 죄인입니다.”“나는 죄를 지었습니다”가 아니라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합니다. 행동이 아니라 존재의 고백입니다.
- 도덕이 아니라 근거다
놀랍게도 예수는 세리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로 부릅니다. 이것은 도덕적 상대주의가 아닙니다. 예수는 “죄를 지어도 괜찮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 의가 아니라, 자기 포기라고 말입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최종 근거로 세우고 있습니다. 세리는 설 자격이 없기에, 하나님만을 근거로 섭니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의 기도는 간구가 아니라 자기 정당화의 진술입니다. 반면 세리는 설 자격이 없습니다. 그는 눈을 들지도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의로움은 성취의 결과가 아니라 관계의 선물입니다. 의로움은 완전해진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는 설 수 없음을 아는 상태입니다.
▣ 나가는 말
- 붙잡지 않음으로, 붙잡히는 기도
기도는 말이 아니라 신 앞에 선 인간의 존재 방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꼭 입을 벌려 그분께 말을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란,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붙잡지 않고 하나님만을 붙드는 존재의 태도입니다. 프랑스 사상가 시몬 베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은총은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는 자에게 주어진다.” 누가복음 18장의 기도는 바로 이 ‘떨어짐’을 견디는 기도입니다. 자기 의에서 떨어지고, 자기 증명에서 떨어지고, 자기 확신에서 떨어진 이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능력의 언어가 아니라 무력함의 언어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는 방식입니다.
- 자유 의지
그렇다면, 인간은 수동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는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가. 성경이 말하는 자유 의지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지 않습니다. ‘누구를 의지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성서는 인간이 선악을 분별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선택할 수 없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선택할 자유는 없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을 빌리면, 자유 의지는 “자기를 하나님께 향하게 할 자유”이지 “자기를 하나님으로 삼을 자유”가 아닙니다. 과부와 세리는 자기 자신의 근거를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께 근거를 둔 것이지요. 변명하지 않을 자유, 자신을 맡길 자유, 하나님께 판단을 넘길 자유를 선택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자유입니다.
- 나는 죄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인이라는 선언은 우리가 매일매일 마주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법적인 잘못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진정한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인간의 고백입니다. 그 어떤 것에도 나의 존재, 구원의 근거를 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인이라는 말은 부끄러운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언어이지요. 그래서 언제나 우리는 그분 앞에서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언어로, 삶으로, 전존재를 다해 드릴 우리의 기도입니다.
존재의 근거이신 주님,
우리가 주 앞에 설 수 있는 이유가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말과 행위, 성취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총으로만 살아가는 존재임을 압니다.
자기 의를 내려놓고, 변명하지 않으며, 오직 주님께 자신을 맡기게 하소서.
오늘도 주 앞에서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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