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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사 62:1~5)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62:1~5, 주현 후 둘째 주일, 2022116

 

 

선지자 이사야

오늘 우리가 선택한 설교 성경 본문인 사 62:1~5절은 기원전 6세기 때 벌어졌던 고대 이스라엘의 특별한 역사를 배경으로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와 너무 멀리 떨어져서 이 이야기가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그 이야기를 선포한 이사야 선지자의 심정을 조금만이라도 엿볼 수 있다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 울림을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우선 사 62:1절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이사야는 잠잠하지 않겠다고, 선포하는 걸 쉬지 않겠다고 외칩니다. 그의 열정이 느껴집니다. 아무나 이런 경험을 하는 게 아닙니다. 대개는 밋밋하게 잠잠한 채로 인생을 삽니다. 자기에게 직접 이익이 되는 일이 아니면 굳이 나서지 않고 말하지도 않고 지나갑니다. 잠잠할 수 없다고 토로하는 심정은 어떤 특별한 경험이 주어졌을 때만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천문과학자가 지구를 향해서 날아오는 혜성을 발견했다고 합시다. 침묵할 수 없습니다. 어떤 대형 건설공사장 책임자가 설계도면대로 시공되지 않은 현장을 발견했다고 합시다. 입을 다물 수 없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경험했다고 합시다.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허공을 향해서라도 나는 살아있다.”라고 외칠 겁니다. 19:28절 이하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자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예수님을 환호하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제자들을 조용히 시키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오늘 이사야의 심정이 바로 이와 같았을 겁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절박한 심정에 공감하려면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가 실제로 어땠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당시는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대격변기였습니다. 기원전 720년경에 북()이스라엘은 이미 앗시리아에 멸망했고, 기원전 587년에는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이어오던 남()유대마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의해서 무너진 뒤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주민들이 50년 만에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오매불망 꿈에 그리던 귀환이니 얼마나 기뻤을지 상상이 갑니다. 이제 예루살렘을 복구해야 합니다. 성전도 다시 짓고 땅도 개간해야 합니다. 사람이 모여서 먹고살 만한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앞으로는 바벨론 포로와 같은 일을 당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몇몇 개혁과 민족 재건의 시도가 있었고, 부분적이나마 성과도 있었으나 생각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패배의식에 떨어졌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반짝 희망의 불꽃이 일다가 사그라드는 시기에 제3 이사야는 피를 통하는 심정으로 예루살렘 주민들을 향해서 자신은 잠잠할 수 없다고, 이런 패배주의에 떨어지면 안 된다고, 그러니 제발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기쁨

그가 외친 내용은 무엇일까요? 1절에서 시온의 의와 예루살렘의 구원을 말했습니다. 2절에 따르면 이방 나라가 예루살렘의 공의를 볼 것이고, 여러 왕이 예루살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새 이름을 얻게 될 것입니다. 3절에 따르면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왕관이 될 것입니다. 4절에 이어집니다. 예루살렘은 버림받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라는 뜻의 헵시바’, 또는 결혼한 여자라는 뜻의 쁄라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5절이 그 모든 내용을 이렇게 압축해서 전합니다.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표현은 어딘가 관념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만약 애국 애족 정신이 투철한 정치인이었다면 다른 방식으로 외쳤을 겁니다. ‘우리나라가 주변 강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서로 힘을 모읍시다. 경제 대국이 되고, 군사 대국이 되어야 합니다. 공장을 많이 세우고, 수출도 늘리며, 무기 수입과 무기 수출에도 박차를 가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연봉도 많이 늘어날 것입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우리는 곧 주변 모든 나라를 압도할 수 있는 강대국이 될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해야만 예루살렘 주민의 귀를 솔깃하게 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라는 말씀을 지금 여러분에게 주는 말씀으로 바꿔서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자녀가 앞으로 출세하여 존경받고 잘살게 될 것이라는 말이 잘 들립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이 잘 들립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어요? 대답하기가 곤란하실 겁니다.

이사야가 정치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라고 하더라도 예루살렘 주민이 구질구질하게 사는 걸 좋다고 생각한 건 물론 아닙니다. 먹을거리도 늘 부족하고 나라를 지킬 힘이 없어도 하나님만 잘 믿으면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우리 교우들의 인생이 잘 풀리지 않아도 교회만 열심히 나오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품위를 지키면서 사는 데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지금 먹고사는 문제가 대수롭지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더 근본적인 삶의 방향을 말하는 겁니다. 그 삶의 방향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 방향이 분명할 때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이 당신들을 기뻐하실 것이라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자고 호소하는 겁니다. 그의 호소는 옳을까요? 공허할까요? 너무 뻔한 주장인가요?

 

제국 바벨론 경험

이사야를 비롯한 예루살렘 주민들이 얼마 전까지 바벨론 포로였다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포로라고 해서 포로수용소에 갇힌 건 아닙니다. 바벨론에 끌려와서 소수 민족으로 살았습니다. 그보다 1천 년 전에 이집트에서 소수 민족으로 살던 야곱 후손들과 같은 신세였습니다. 그중에 똑똑한 사람들은 바벨론에서도 나름으로 일가를 이루고 살았습니다. 다니엘처럼 왕궁에서 대접받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대 최고 문명과 문화를 자랑하던 바벨론 제국을 50년 동안 충분히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의해서 함락당하는 장면도 직접 봤습니다. 미국에서 50년간 재미 교포로 살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의 처지와 비슷합니다.

이사야는 제국과 제국이 부딪치는 국제 질서 가운데서 예루살렘이 힘으로 그들과 경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설령 제국과 경쟁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방식으로는 궁극적인 평화를, 즉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사야는 분명히 보았을 겁니다. 그것을 못 보았다면 선지자도 아닙니다. 평화를 얻지 못한다면 제국의 그 모든 힘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바벨론의 힘은 정의롭지 못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힘으로 다른 나라를 지배했을 뿐입니다. 그런 국제 질서 가운데서 예루살렘도 힘을 키워서 국제 경쟁에 뛰어들자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안 되는 일입니다. 이사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을 기뻐하실 것이라고, 그러니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되자고 외친 겁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똑같은 방식으로 누군가를 지배하려고 덤벼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으로 방향을 바꿀 뿐입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가리킬까요?

비유적으로,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 자식이 부모의 기대대로 사는 걸 부모가 기뻐합니다. 스승과 제자가 있다고 합시다. 스승이 기뻐하는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에 순종합니다. 순종이라는 말이 현대인에게 거슬리기는 하겠으나 비유로 말씀드린 겁니다. 이런 비유가 말하려는 핵심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즉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오해하지 말아야겠지요. 오해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기는 합니다. 그 문제는 피조물인 인간의 한계라서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한 사람도 사실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시행착오가 일어납니다. 그런 시행착오가 일어난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사람은 결국 길을 찾습니다. 크게 잘못한 사람은 오히려 크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삶의 태도와 그 열정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민족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바로 그런 길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출한 위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정의가 빛처럼

우리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오늘 본문은 여러 가지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이미 앞에서 우리가 짚은 내용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절에 따르면 시온의 의예루살렘의 구원입니다. 2절에서 다시 그 사실이 언급되었습니다.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영광은 구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진정한 정의가 실현되고, 이를 통해서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구원을 맛보기 원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우리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루살렘의 정의는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구원이나 영광이라고 바꿔서 불러야 할 정도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정의로운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손에 있는 왕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정의로운 예루살렘이 되어야만 생존이 보장된다고도 말했습니다.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4b). 이사야가 볼 때 정의로운 예루살렘이 되는 것이야말로 예루살렘이 세상에 빛나는 도시가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실 겁니다.

이사야 시대로부터 25백 년 떨어진 오늘의 21세기가 바벨론 시대보다 더 정의롭다고 자신 있게 말할 분들은 별로 없을 겁니다. 현재 대한민국 정권이 남북 종전선언을 끌어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으나 임기 마지막을 향해 가는데도 아직 뚜렷한 성과가 없습니다. 이런 데에는 북한의 핵무기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거칠게 말해서 핵무기를 불가역적으로 폐기해야만 종전선언도 가능하고, 대북 제재를 풀어줄 수 있다는 게 미국의 입장입니다. 이게 정의일까요? 북한의 핵무기를 폐기하라고 주장하는 나라에는 더 많은 핵무기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는지요. 저는 핵무기만이 아니라 핵발전소도 반대합니다. 핵폐기물에 얽힌 여러 가지 문제는 접어두고, 핵발전소를 운영한다는 것은 핵무기를 머리에 이고 사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중국이나 프랑스는 몰라도 우리나라처럼 좁은 국토에다가 지정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전쟁의 위험에 노출된 나라에서는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유사시에 미사일이 핵발전소에 떨어지면 핵무기가 폭발하는 거와 다를 게 없습니다. 핵발전소가 없으면 당장 굶어 죽는다면 아무리 위험해도 끌어안고 살아야겠지요. 그게 아니라면 시간을 벌어가면서 대체 에너지 쪽으로 가는 게 더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너무 순진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북한의 핵무기 폐기를 주장하는 나라가 정의로우려면 자신들의 핵무기도 폐기하든지 아니면 조금씩이라도 줄여나가야 합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옳다는 뜻도 아니고, 그냥 버려둬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씀드리려고 예를 든 것뿐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에 가깝기에 이사야는 예루살렘이 정의로워지는 순간이 바로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는 순간이라고 말한 게 아니겠습니까.

 

바벨론을 넘어서서

이사야는 바벨론 제국이 얼마나 불의하며 일방적이었는지를 알았고, 그래서 그들의 힘이 얼마나 파멸적인지를 보았습니다. 당시 상황을 노래하는 시편 137편에서 이사야의 경험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137:1) 예루살렘이 정의로워지는 세상을 희망한다면 당연히 바벨론과는 다른 길을 가야 합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의 길을 상징합니다. 이방인은 자기에 관한 걱정과 욕망에 묶여서 삽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하는 염려로 가득한 삶입니다. 오늘 대한민국이 가는 길입니다. 모든 사람이 먹고사는 문제를 최고의 가치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절절한 사연이 언론을 매일 도배하다시피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공정도 참된 정의라기보다는 자기에 대한 염려에서 나온 주장에 가깝습니다. 이사야가 경험한 바벨론에서의 삶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바벨론이 상징하는 자기에 대한 염려와 욕망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지키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사회 문제를 거론하면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만이 그들을 보호하신다고 외쳤습니다. 하나님만이 구원자이시니 세속 권력 집단인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바벨론과 로마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기다리는 가정을 마음 깊은 곳에 두는 청년이라면 세상살이가 아무리 고달파도 걱정하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얄팍하게 잔재주 부리지 않고, 불의에 휩쓸리지 않고 정의롭고 당당하게 세상 문제에 대처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담아서 이사야는 예루살렘 주민을 향해서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신다.”라고, 그러니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로 살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외침에 여러분은 공감하십니까?

우리는 그의 외침에 공감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가 되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이런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정말 위로되는 사건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설교는 다 잊고 다음의 말씀만 기억해도 됩니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받는 장면에서 하늘로부터 이런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3:17, 1:11, 3:22)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명의 유일한 주관자로 믿고 절대 순종한 분이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예수님을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그런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실 겁니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는 곧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힘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62:1~5
https://youtu.be/HAaJR3n_8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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