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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베데스다 못 가”가 오늘에 주는 교훈(요 5:6~9)

2024년 10월 13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pV18X-fLXWE?si=cmXeQiZM3X4bJ4Xc

제가 사는 동네에 길이가 4km나 되는 사일 못이라는 큰 못이 하나 있습니다. 요즘은 수질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낚시를 못하게 금지하였기에 낚시하러 오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졌습니다만 15년쯤 전에는 해마다 4월이 되면 낚시하기 위해서 이곳에 와서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모습을 봅니다. 어떨 땐 어림잡아 50여 명도 훨씬 넘는 사람들이 도로 주변에 차를 세워나 교통마저 지장을 줄 때가 많았습니다.

고기가 잘 잡히는 4월 중순쯤 되면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이른 새벽부터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좋은 자리에 텐트를 치고 잠을 자면서 좋은 자리를 잡아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자다가도 “잡았다”라고 잠꼬대를 하면서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나는 사람도 있다고 합디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낚시하는데 있어서도 좋은 자리가 꼭 필요하다고 합니다.

I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요한복음 5장의 말씀을 보면서 머리에 그림을 그려보면 우리들과는 상황은 전혀 다르지만, 당시 병든 사람들이 병이 낫기 위해 베테스다는 연못 가에서 연못에 빨리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를 택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이 전개되고 있는 본문의 현장은 갖가지의 병약한 환자들이 모여 신음하며 우글거리고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이며 마침 그때는 히브리 사람들의 해방의 절기를 기념하는 유월절이라는 명절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모두의 관심이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전을 둘러싼 축제에 쏠려 있던 차에, 예수께서는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사람들의 자리로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바로 그곳에는 눈먼 사람, 다리 저는 사람, 중풍병 환자 등을 비롯하여 온갖 고통에 짓눌려 있는 사람들이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38년간 앓고 있던 반신불수의 환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머무신 곳은 유월절 해방을 기념하며 예배드리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축제의 기쁨으로 먹고 마시고 웃고 즐기는 축제의 장소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머무신 곳은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시각장애자, 다리가 불편하여 잘 못 걷든 사람, 중풍병 환자 등을 비롯하여 온갖 질병에 짓눌려 있는 사람들이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만 겨우 살아갈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이 있는 저 낮은 곳을 향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내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빠트린 사건을 찾아내어 바로 그곳이 베데스다란 연못이었다고 강조합니다.

 

오늘은 우리의 시선을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양의 문” 가까이에 있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에 집중해보려고 합니다. “베데스다”란 말은 집이라고 히브리어“뱉”란 말과 자비 또는 은혜란 뜻을 지닌“짜다”란 말의 합성어“뱉짜다”로써“은혜의 집” 또는 “자비의 집”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데 성경에는 베데스다라고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그리고“양의 문”(sheep gate)이라고 부르는 출입구는 성전에서 희생제물로 바쳐질 양들이 이 문을 통해 지나가야 하기에 “양의 문”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양의 문” 둘레에는 다섯 개의 행각이 서 있었다고 하는데 “행각”(porticoes)이란 사람들이나 각종 환자들이 뜨거운 태양 빛이나 변덕스러운 날씨를 피하기 위하여 만든, 벽이 없는 지붕을 일컫습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이 그 다섯 행각에서 율법을 가르치고 있었음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다섯 행각의 의미는 모세오경 곧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상징하는 것이었는데 그 다섯 행각 안에서는 지금 율법을 배우려고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 아니라 온갖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득실거리고 있었고 그 중에는 혈기 마른자 곧 중풍병으로 누워있는 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 안에는 38년 동안 병으로 신음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베테스다 연못 가로 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율법이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인도한다는 상징적이면서도 강력한 메시지를 당시의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레 위인 둘에게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선포하고 있음을 오늘 우리들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II

그런데 베데스다라는 연못 둘레의 행각에 이들 병자들이 여기에 몰려 있는 까닭은 바로 이 연못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의 민간신앙이나 소문과 전설에 따르면 천사가 이따금씩 이 연못에 내려와 그 못의 물결을 휘저어 놓아 물이 움직일 때, 맨 처음 그 물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병이 낫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이 “은혜의 집”이란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병을 낫게 하는 신비의 약효가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디에서도 고칠 수 없는 병이지만, 물이 움직거릴 때를 잘 맞추어 남들보다 앞서 제일 먼저 물속에 들어가게 되면 병이 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랜 병고에 시달려 있는 절박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이곳에 있는 병든 사람들의 제일 관심은 “언제”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젓는가 하는 그때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며, 그때 가장 먼저 물속에 들어가는 일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베데스다 못 가”에 둘러앉아 있는 환자들은 그들의 병이 무엇이든 그리고 그들의 병이 중하건 가벼운 것이든, 그들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그들의 생각만큼은 모두 일치하고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못 가”의 사람들은 서로의 처지를 아파해 주고, 서로의 삶의 아픈 이야기들을 경청하여 들어준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데스다 못 가”의 사람들은 자신의 깊은 속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서 남의 잘못할 기막힌 사정을 귀담아들어 주며 위로해 주는 사람들이 함께 머문 사랑과 관심 기울여줌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더라도 병에서부터 나음을 받아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을 꼭 같이 가지고 있었던 희망의 공동체였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일 것입니다. 같은 정신, 같은 꿈과 이상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만나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은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할 것입니다. 같은 생각 같은 삶의 방향 그리고 같은 목적과 비슷한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 만나 믿음의 꿈을 함께 꾸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면서 교회를 통해 이웃과 사회 나아가서 신음하는 세상을 조금이나마 아름답게 만들어간다면 이는 그 어떤 그것보다도 더욱 가치가 있고 행복한 삶이 될 것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본다면 꼭 같은 생각, 꼭 같은 마음이란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위해주고 감싸주며 서로 양보하면서 마음을 같이 하고 뜻을 같이하는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공동체에 소속한 모든 사람은 한 사람을 위해서, 한 사람은 모든 사람을 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공동체를 통해 보이는 첫 번째의 모습입니다.

III

그런데 “베데스다 못 가”의 공동체를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엄청난 문제를 안고 있는 베데스다 연못의 공동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이 움직이지 않는 평상시의“베데스다 못 가”의 공동체는 서로의 아픈 사정을 들어주고 서로의 가정사도 이야기 나누면서 서로를 위해주고 서로를 격려해 주며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하다가도 일단 물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어 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베데스다 못 가”는 사실상 남들보다 먼저 연못으로 뛰어 들어가야만 병이 낫는 치유의 기적을 맛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돕고 위로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상생의 장소이어야 할 “베데스다 못 가”를 따져보면 실은 남들보다 한 개 발자국 먼저 앞서서 달려가려고 마음먹고 있는 곳이요 동시에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고 매니아”(ego-mania)의 장소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 시작하면“베데스다 못 가”의 모습은 서로 등을 돌리고서 서로 대치하는 장소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서로들 어렵고 힘든 처지이기에 서로 돌봐주고 감싸주면서 살아야만 하는 “베데스다 못 가”이지만 그러나 재빨리 모든 사람들을 밀쳐내면서라도 자신이 제일 먼저 연못 속으로 뛰어 들어가려고 하는 무시무시한 살벌한 장소였습니다. 바로 그곳이 양면성을 지닌“베데스다 연못”의 모습이었습니다.

말로만 “베데스다”, “은혜의 집”이라고 했지 실은 나밖에 모르며 자기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이기적인 장소였습니다. 또한 베데스다란 연못 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보다 먼저 물 속으로 뛰어들고자 한 장소가 되고 말았으며, 베데스다 못 가는 다른 사람들을 밀쳐내고라도 다른 사람들을 짓밟고서라도 쟁취해야 하는 경쟁의 장소였습니다.

이렇듯 경쟁의 현실은 언제나 낙오하는 자를 낳게 마련입니다. 낙오하는 자는 자신의 처지가 불우한 것을 괴로워하게 마련이고, 자신을 밀쳐내고 앞으로 가는 타자에 대한 적대감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법이기에 “베데스다 못 가”는 나보다 남이 못하기를 바라며 미워하는 상극의 장소요 서로 물고 뜯고 하는 상쟁의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서로 으르렁거리며 물고 뜯으려고 하는 남북의 대치 상태와 비슷합니다.

 

IV

예수께서는 바로 그러한 처지에 있는 사람 하나를 유심히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38년의 병고에 시달리고 시달려왔던 중풍병으로 앓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는 연못가의 행각 안에서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것 같으며 그곳에 누워서 물이 움직이는 시기를 막연히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설령 물이 움직인다고 해도 온몸이 마비된 자신의 힘으로는 수많은 환자를 물리치고 제일 먼저 물속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말이 38년이지, 병이 오랜 세월 동안 진행되고 싶어지면 사실 마지못해 억지로 사는 것이며 누구도 그를 간병해 줄 엄두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런 사람의 재력이 있을 턱이 없기에 2중 3중의 불가능 속에 누워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행각에 있는 수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 38년 동안 중풍병으로 반신불수가 된 그를 뚫어지게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낫고 싶은가?”라고 묻는 예수님 질문의 핵심은 “정말로 낫고 싶은가?”,“왜 낫고 싶은가? 나으면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라고 생각을 일깨우기 위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38년 된 환자, 그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관심을 두었다는 것 자체가 기뻤던지, 아니면 이 사람이야말로 내가 물 속으로 제일 먼저 뛰어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 줄 조력자요 사람으로 보았던지, 기쁜 마음으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나한테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천사가 못의 물을 휘저어 놓는 순간, 나를 남보다 먼저 물속에 들어가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만 있으면 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데스다 못 가”에 누워있던 38년 된 그 병자는 베데스다 곧 은혜와 자비의 근본이요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고 생명을 온전하게 해주시는 예수님을“베데스다”의 세계로, 상극과 경쟁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베데스다 못 가”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예수를 자신의 보조원으로 조력자로 삼고자 합니다.

예수가 할 일은 여기서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38년 동안 앓고 있는 자신을 사람에게 밀려나지 않도록, 제일 먼저 베데스다 자신을 안고 연못 속으로 들어가 주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은 “베데스다 못 가”의 논리요 삶이었습니다. “베데스다 못 가”의 삶이란 나 자신에게 건강과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이라면 남에게 불행이 되던 동료에게 피해가 가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베데스다 못 가의 질서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 한국교회도 “베데스다 못 가”의 논리와 “베데스다 못 가”의 신앙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그를 향해 전혀 예기치도 못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청천벽력 같은 말씀 하고 있습니다. 그가 안식일 날 만인이 보는 앞에서 거적때기를 들고 가는 일이란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기에 그는 물론 그를 낫게 한 예수님도 안식일을 범한 것이기에 큰 문제가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들이 온전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 하반 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풍성하게 하려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해두고 있습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38년 된 병자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단 세 마디로 압축되며 이 말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첫째, “일어나라”라는 말씀은“베데스다 못 가”에 대한 믿음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일어나라”라는 것은 그러한 겉과 속이 다른 믿음의 자리에서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이중적인 모습을 떨쳐버리라는 것입니다. 누워서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 확실합니다.

새로운 세계는 낡은 세계와의 결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누워있는 낡은 세계의 방식으로는 그 어떤 새로운 세계가 세워질 수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살아 숨을 쉬며 살아 움직이는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누워 그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기 위해 예수님의 일어나라는 말씀에 따라 믿음과 꿈과 용기를 가지고 오늘도 내일도 힘차게 일어서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두 번째로 일어나서 “네 자리 자리를 들어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우리의 낡은 자리를 걷어치우라”란 말입니다. 헬라어 성경은 낡은 자리를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거적때기”를 뜻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세월 동안 풍기고 쌓아온 모든 인생의 악취와 오물과 잘못을 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신학자 크리멘스톤이란 사람은 우리 인간들이 무엇이 바뀌어야 삶이 바뀔 것인지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삶이 바뀐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음 곧 생각이 바뀌어야 삶이 바뀌는 법이요 믿음의 생각이 바뀌어야 믿음의 삶이 바뀌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중풍병자를 통해 우리가 앉아있는 자리가 무언가 낡았으며 무언가 과거의 자리에만 의존하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의 관점과 마음을 돌이키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새사람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선 우리가 지니고 있는 그 거적때기의 자리를 당장에 치워버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명감이 넘치는 자로 우뚝 서라는 것입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예수님의 세 번째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 모두 행각에 누워 아무런 일을 하지 않던 “베데스다의 연못가”의 신앙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거적때기를 들고 앞을 향해 힘차게 걸어가는 신앙의 유형으로 변형되어야 한다는 명령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38년 된 중풍병자의 옛 모습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우리 모두 새로운 방향과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서 온 마음 다하고 온몸 다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기 위하여 힘차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 함께“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납시다”“우리가 누워있던 옛 모습의 자리를 던져버립시다” 그리하여 “앞을 향해 힘차게 걸어갑시다.” 아무런 일을 하지 않으면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기억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갑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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