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여자에 관한 이야기
마태복음 15:21-28, 성령강림절후 9째 주일, 2011년 8월14일
예수님은 3년 가까운 공생애 동안 한 곳에 정착해 계시지 않고 여러 곳을 유랑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온갖 종류의 치유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오늘의 제3독서인 마태복음 15:21-28절에 나오는 이야기는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북쪽 지역인 두로와 시돈 지역에 가셨을 때 일어난 것입니다. 그 지역은 이방인들이 살던 곳입니다. 어떤 여자가 예수님께 왔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그 여자가 가나안 사람이라고 밝힙니다. 이방인이라는 뜻입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방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이 여자가 유대인인 예수님께 왔다는 것은 뭔가 다급하고 절실한 용무가 있었다는 뜻이겠지요. 그녀의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습니다.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겠지요. 이런 딸을 키우는 어머니의 심정이 어떨지 상상이 갑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겠지요. 이방인 여자였지만 욕먹을 각오로 예수님에게 와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의 호소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의외입니다. 평소의 예수님이라면 그 여자의 형편을 더 알아보든지 그 여자의 집을 찾아가든지, 그게 아니라면 딸의 병이 나았으니 안심하고 돌아가라고 말씀하셨겠지요. 제자들이 나서서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23절) 이 여자의 소원을 풀어주라는 말인지, 아니면 이방인 여자가 귀찮게 구니 쫓아버리라는 말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지 모양이 좋지 않으니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예수님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절) 너무 심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을 거라고 믿기 힘들 정도입니다. 곧 이어서 더 심한 말씀이 나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26절) 이 가나안 여자를 개 취급을 한 것입니다. 이런 표현은 당시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관용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쌍한 여자에게 악담을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을 무시하는 표현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당신은 외국인 노동자니까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없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이런 말을 듣고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습니다. 저 같은 너만 잘났냐 하고 한바탕 시비를 붙든지 아니면 그래 너 잘났다 하고 그냥 돌아갔을 겁니다. 이 여자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절) 대단한 사람입니다. 딸의 치유가 절박했다면 무조건 “도와주십시오.” 하고 매달리기만 했을 텐데, 이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만들 만한 말을 한 겁니다. 더 이상의 논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졌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28절)고 말씀하십니다. 성서기자는 그 순간 그 딸이 나았다고 전합니다.
마태공동체가 처한 자리
오늘 이 이야기를 읽은 여러분은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예수님이 인정한 가나안 여자의 믿음이 부럽다고 느끼실 겁니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이 여자는 처음부터 뭔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향해서 외친 말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다윗의 자손이여”는 그가 예수님의 메시야적 정체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도 똑같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찬송인 ‘키리에 엘레이송’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 뒤로 이어진 대화에서도 바로 위에서 짚었듯이 아무도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영성이 깊은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정확하게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열정도 대단했습니다. 그의 신앙은 모두의 부러움을 살만합니다. 본문은 바로 그것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여자처럼 ‘부스러기의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걸까요?
이 이야기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병행구인 마가복음도 7:24-30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내용은 마태복음과 비교해보면 큰 틀에서는 비슷하지만 부분적으로 약간 다릅니다.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여자의 대답은 같습니다. 다른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에 대한 호칭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이 여자는 마태복음과 달리 다윗의 후손이라는 호칭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것도 간접화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느슨한 문장입니다. 마태복음의 문장은 직접화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긴장감이 넘칩니다. 또 다른 하나는 마가복음에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아예 등장하지 않고 예수님과 이 여자만 등장합니다. 아주 간단한 내용의 사건에서 이런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은 마가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마가복음을 기초로 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사실은 마가복음보다 먼저 기록된 문서도 있습니다. 학자들은 그것을 어록집, 또는 Q자료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런 문서들을 기초로 해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다시 기록했습니다. 이 집필 과정에서 마태복음 공동체가 처한 삶의 자리가 중요합니다. 복음서는 모두 특정한 독자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마가복음에 없는 두 가지 사실이 마태복음에 나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이렇게 편집하고 보완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사정이 바로 마태복음 기자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기자는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을 변호합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 15:24) 여기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라는 개념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려고 메시야가 오신다고 생각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믿는다면 초기 그리스도교는 당연히 이스라엘 사람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상황은 정반대로 흘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중심 무게가 점점 이방인 쪽으로 옮겨갔습니다. 이런 현상을 마태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크게 불안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불만스럽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마태공동체는 원래 유대적 배경이 강한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런 독자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마태복음 기자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에게 이르는 족보 이야기로 복음서를 시작했습니다. 이런 바탕에서 마태복음 기자는 오늘 가나안 여자에 관한 이야기에서 마가복음 기자와 달리 예수님이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을 구원하러 왔다는 사실을 보충한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마음대로 가감할 수 있느냐, 그러면 권위가 떨어지는 거 아니냐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걱정은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성서가 살아있는 말씀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성서는 자동차나 컴퓨터 매뉴얼처럼 그냥 죽어있는 문자가 아니라 믿는 이들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관계된 많은 전승들이 신약성서 기자들의 영성에 의해서 약간 씩 편집되는 방식으로 그들이 처한 공동체를 위해서 새롭게 기록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만 해도 그렇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잃은 양을 위해서 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마가로부터 이방인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두 이야기를 필요에 따라서 하나로 묶어낸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만 정확하게 유지된다면 그 해석과 적용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전개되어도 좋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주체이신 성령이 이런 방식으로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하신다고 믿습니다.
종교적 고정관념
마태복음이 마가복음과 약간 다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하더라도 근본 메시지는 놀랍도록 동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에게 더 잘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이건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구성원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 교회는 죽어가고 안디옥과 로마를 비롯해서 이방인 교회는 점점 힘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목은 앞에서 잠간 짚은 건데, 조금 더 설명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고, 더 나가서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반적인 상황과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파의 중심 이동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만 벌어진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초기부터 유대인들 안에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제사장들과 같은 유대교 전문가들이 예수님을 더 잘 이해하는 게 당연한 논리입니다. 복음서기자들의 관점에 따르면 실제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과 계속해서 대립했습니다. 복음서는 대부분 이런 대립을 보도합니다. 예수님은 공생동안 계속해서 그들로부터 비난을 받다가 결국 그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당시 종교적으로 세련되지 못한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을 더 잘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현상이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그대로 재현된 것입니다. 복음의 무게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개라고 취급한 이방인들에게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예수님과 초기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처하던 유대인들에게 있었습니다. 이런 이상한 일이 왜 벌어지는 걸까요?
제가 보기에 이스라엘의 종교적 고정관념이 핵심 문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들이 지키는 기준에 의해서만 평가했습니다. 안식일 논쟁이 대표적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머리가 나빠서 그런 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정하면 자신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가치들이 허물어질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아예 부정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포함된 개신교 신자들에게도 종교적인 고정관념, 세계관적인 고정관념이 많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이 불편합니다. 언짢아하는 것도 많고, 불만도 많습니다. 자기와 다른 것을 추호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일수록 세상에 적대적입니다. 무의식적으로 마녀재판을 하고 싶어 합니다. 불교도, 가톨릭교도, 개신교도 중에서 관용성이 가장 떨어지는 이들이 당연히 개신교도들입니다. 모든 전통은 무의미하니까 전통을 무시하고 무조건 이 세태를 따라가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귀한 전통은 지켜야 합니다. 본질의 훼손은 막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개의 고정관념은 비본질적인 것들입니다. 이 자리에서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것들이 종교적인 고집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 결국 하나님 나라의 빛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사이비 이단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그 안에 들어간 이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건강상태가 어떤지도 모릅니다. 이런 일들이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일어났습니다. 복음이 이스라엘을 떠나 이방인에게로 갔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제2의 이스라엘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이것이 가나안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경고이자 충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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