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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레 19:9,10)


지난 1월20일(화) 새벽에 서울 용산 재개발지역에서 세입자 철거민들과 경찰특공대가 충돌해서 경찰 한 분을 포함해서 여섯 분의 사망자가 나오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이번에 사고를 당한 경찰은 삼십대 초반으로 일곱 살짜리 어린 딸이 있다고 합니다. 민간인 사망자 중에는 칠십 세의 노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번의 참사만 없었다면 이들은 모두 좋으나 나쁘나 설 명절을 즐기고 있었겠지요.

이번 용산 참사는 너무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허무할 정도입니다. 용산 재개발지구에 살고 있던 세입자들이 19일 새벽에 그 지역의 빈 건물 옥상에 망루를 설치하고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 지역의 세입자들과 전국철거민연합에 속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신나, 화염병 등을 비롯해서 위험한 시위용품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용산경찰서는 그 다음날 새벽, 그러니까 시위가 시작되고 25시간 만에 경찰특공대를 투입해서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와중에 망루에 불이 나서 끔찍한 참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이번 과격 시위를 주동한 분들은 세입 철거민들입니다. 세입 철거민들의 시위는 이번만이 아닙니다. 재개발이 이뤄지는 곳에서는 늘 반복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보상비만으로는 그 어디에 가서도 살아가기 힘들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컨대 달동네에서 보증금 5백에 월세 10만원으로 살던 사람이 그것보다 많은 1천만 원 정도의 보상비를 받았다고 해서 다른 데서 방 한 칸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이번 용산지역은 좀더 복잡한 사정이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나름으로 상권을 확보하고 살던 사람들이 쫓겨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보통 권리금이라고 하는 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배수진을 치고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번 참사를 두고 여러 가지 말들이 많습니다. 서로의 입장에 따라서 경찰의 과격진압에 책임이 크다고 하는 이들도 있고, 또는 세입 철거민들의 불법 시위에 더 큰 책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회과학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는 제가 말씀드릴 처지가 못 됩니다. 중요한 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잃었다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사람이 죽는 거야 교통사고나 불치병이다 해서 너무나 흔한 일이니 그것 자체만으로 본다면 무슨 대수겠습니까?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과 대한민국 공권력이 충돌해서 사람이 죽었으니 생명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를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고도의 문명과 풍요의 시대에 이렇게 야만스럽고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가난의 문제

여기에는 ‘가난’이라는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세입자 철거민들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이런 일에 연루될 일이 없었을 겁니다. 재개발지역이라는 곳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원래 오갈 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다면 아무도 그런 곳에 가서 세입자로 살지 않습니다. 이들은 죽을 수는 없으니 그런 곳에 가서라도 매달려 삽니다. 이런 문제는 대한민국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동남아와 아프리카는 물론이고, 미국에도 슬럼가가 있습니다. 슬럼가에는 주로 흑인들이 산다고 하는데요. 주거환경이 말이 아닙니다. 범죄도 흔합니다. 미국을 여행하는 경우에 낮에도 슬럼가로 들어가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거는 모두 자기책임이라고 말입니다. 평소에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고, 편한 일자리만 찾느라 밥벌이도 하지 않으니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거 아니냐, 가난은 나라님도 해결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자기책임 문제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게 늘 그런 거는 아닙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도 어쩔 수 없이 달동네로 들어가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선천적으로 장애로 태어나거나 갑자기 불치병에 걸리듯이 달동네의 세입자로 떨어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비록 자기책임이 큰 경우라 하더라도 그것을 그들에게만 모든 책임을 미루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바른 태도가 아닐 뿐만 아니라 상식적으로도 정당하지 않습니다. 선진문명 사회는 이런 문제들을 사회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면서 해결해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 명의 자녀를 둔 부모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많으니 그 중에는 말썽을 피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경쟁력이 떨어진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월세나 겨우 내면서 가난에 찌들려 삽니다.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요? 네가 그렇게 가난하게 사는 것은 네 책임이니 나 몰라라 할까요? 성실한 자녀들을 설득해서 가난한 형제를 돕게 할 겁니다. 이런 가정의 살림살이가 확대되는 게 바로 사회이고 국가입니다. 이런 점에서 가난과 가난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비극과 참상은 우리 모두가 더불어 풀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이런 설명이 별로 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을 겁니다. 가난을 함께 풀어가야 한다는 게 고생고생해서 뭔가를 이룬 사람들에게는 뭔가 좀 억울한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사회가 해결해주면 그들의 버릇만 나빠진다는 주장도 가능합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게 거추장스러울 겁니다. 샘터교회의 예배에 노숙자가 계속해서 나온다고 합시다. 가까이 가면 냄새도 나고, 늘 술에 찌들려 있고,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마 한 두 번은 몰라도 그런 일이 반복되면 우리가 그에게 눈치를 줄 겁니다. 눈치를 줘도 못 알아들으면 복장을 좀 깨끗하게 하고 예배에 참석하라고 점잖게 타이르겠지요. 타일러도 안 되면 강제로 어떤 조치를 취하려고 하겠지요. 우리가 비인간적이서 그런 게 아니라 인간 자체가 그렇습니다. 뭔가 불편한 거를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가난과 장애도 불편한 거거든요. 

소위 ‘뉴타운’이라고 불리는 재개발도 역시 이와 비슷한 현상입니다. 서울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 지역이 너무 오래되고 보기 싫으니 싹 밀어버리고 멋진 도시를 만들어보겠다는 겁니다. 이런 재개발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서울은 곳곳이 빈민촌으로 남아 있었을 겁니다. 수년 만에 한 번씩 한국을 찾은 외국 교포들이나 외국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공통으로 느끼는 게 정말 많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뉴타운을 만드는 것 자체를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재개발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 특히 세입자들의 생존을 어떻게 보장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세입자들의 문제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뉴타운에만 마음을 두면 결국 밀어붙이기 식으로 일을 추진하게 됩니다. 이번 용산 참사도 그런 와중에 일어난 게 아닐는지요.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

오늘 우리가 읽은 레위기 19:9.10절은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칩니다. 추수할 때 곡식을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라고 했습니다. 포도원 추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유는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이 그 남은 것을 가져가게 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거류민은 떠돌이들, 오늘의 노숙자들, 외국인 노동자들입니다. 그 고대 유대사회에 이런 복지제도가 율법으로 전승되었다니, 놀라운 따름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구약성서는 과부와 나그네와 종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장치를 여러 개 갖고 있습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안식일 제도만 해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사회적 약자를 위한 안전장치입니다. 안식일에는 그 어떤 노동도 금지되었습니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안식일의 기본 개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 당시에 노동으로부터 해방이 필요한 계층이 누구였을까요? 생활이 넉넉한 사람보다는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안식일 제도가 없었다면 그런 이들은 일 년 열두 달, 삼백육십오일 동안 하루도 쉬지 못했겠지요.

유대인들이 그렇게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들을 배려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바로 그런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 때부터 그들은 늘 나그네였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이웃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집트에서 그들은 소수민족으로 서러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다는 말처럼 유대인들은 떠돌이 가난뱅이로 살았기 때문에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도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들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모습을 찾기가 힘들지만 고대에는, 최소한 성서적 전통으로 그랬습니다.

곡식과 열매를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들을 위해서 모조리 거둬들이지 말라는 이 가르침은 곧 교회에도 그래도 적용됩니다. 지금 큰 도시의 대형교회는 계속해서 몸짓불리기에 안간힘을 쓴다고 합니다. 주일예배는 물론이고 새벽기도회 때도 역시 대형버스를 돌리면서 마치 저인망그물로 물고기를 잡듯이 곳곳의 신자들을 끌어 모으고 있습니다. 이건 시골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읍내의 큰 교회가 외떨어진 독립 부락까지 대형버스를 돌립니다. 신자들의 입장에서도 집 앞으로 데리러 오는 큰 교회 버스를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들을 위해서 곡식과 열매를 남겨 두라는 가르침은 교회에서부터 무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곡식과 열매를 남겨두라는 이 가르침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까요? 구체적인 실천 프로그램을 제가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건 훨씬 전문적인 문제입니다. 저는 다만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하나의 방향만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들의 생존을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사회가 돌봐주지 않아도 스스로 잘 알아서 살아가지만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들은 반드시 도움을 필요합니다.

결국 이 문제는 세금을 어떻게 운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넉넉한 사람들이 세금을 많이 내고, 없는 사람이 적게 내서 복지의 사회를 꾸려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명박 대통령께서 이런 방향과는 반대 되는 정책을 펼치시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듭니다. 종합부동산세만 해도 그렇습니다. 비교적 생활이 넉넉한 분들이 지난 몇 년 간 종합부동산세를 냈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입장이 억울한 분들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이제 그들에게서 받은 세금 수천억 원을 돌려주겠다고 합니다. 그 세금은 주로 지방정부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지비용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지금 저는 정치문제를 거론하려는 게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들을 돌봐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그 말씀과 충돌한다면 그것이 경제문제거나 정치문제거나 짚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법과 인간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의 생존을 책임져야 한다는 이 주장도 간단하게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지, 그 선을 결정하기가 어렵습니다. 한 사회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똑같은 수준으로 올릴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 일은 공산주의에서도 불가능합니다. 아마 하나님 나라가 완전하게 임해야만 가능하겠지요.

더구나 이번 용산 참사와 같이 재개발 문제와 연관해서는 더 복잡합니다. 세입 철거민들이 먼저 법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과격시위를 벌이고 있는데 어떻게 도와주느냐고 말입니다. 불법시위는 다른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도 엄단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소위 말하는 법치가 작동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은 원칙적으로 틀린 게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불법을 행해도 좋은 건 아닙니다. 레 19:15절은 그 법치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재판할 때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고, 세력 있는 자를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법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사람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법을 위해서 사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법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친 일로 인해서 바리새인들과 안식일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안식일 법에 따르면 예수님은 분명히 법을 어긴 분입니다. 제자들도 안식일에 밀 이삭을 손으로 털어서 먹었는데, 그것도 안식일 법의 위반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법 실증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법을 위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착각하는 게 있습니다. 안식일은 기본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에 근본의미가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친 사건은 바로 안식일의 근본정신에 부합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왜 이런 잘못을 행했을까요? 신앙과 지식과 인격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종교적이고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당대의 주류였습니다. 모든 이들의 존경을 한 몸으로 받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자신들의 종교적 업적과 전통이 그들로 하여금 진리를 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게 인간의 실체입니다. 자신이 만든 것을 절대화하는 순간에 진리를 외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종교지도자들이나 사회지도자들이나 예외가 없습니다. 목사가 교회의 목회를 절대화하면 그때부터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재판관과 검사가 자신들의 법전을 절대화하면 그때부터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선생들이 자기의 전문지식을 절대화하면 그때부터 학생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늘 이 사회는 어떻습니까? 사람이 눈에 보이나요, 아니면 법이 지배하나요? 오해는 마십시오. 무법천지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법이 공의롭게, 즉 사람을 위해서 작동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뉴타운이 무언가요? 가난한 사람들을 몰아내는 방식으로 뉴타운을 세운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레위기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곡식과 열매를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남은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남은 것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자 나라가 떨어뜨려놓지 않으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가난한 나라도 많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번영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 비장애인과 장애인,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얼굴 색깔에 상관없이 모두 더불어 사는 세상 말입니다.(2009.1.25.)

레위기 19: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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