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의 피난처
시 14:1~7, 성령강림 후 아홉째 주일, 2021년 7월25일
“가난한 자의 피난처”라는 오늘 설교 제목을 보았을 때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피난처’라는 말은 긍정적이지만 ‘가난한 자’라는 말은 부정적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가난’이 우리 인생을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가난에 대한 염려가 우리의 무의식까지 지배합니다. 부동산, 페미니즘, 최저임금, 초중고대학 교육, 결혼, 심지어 남북통일 문제도 가난이라는 주제와 연결됩니다. 북한이 우리보다 더 부자로 산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통일을 이루고 싶어 할 겁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자의 피난처”라는 시편 기자의 진술 앞에서 우리 기독교인의 처지는 곤혹스럽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대놓고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뭔가 찜찜합니다. 자녀들에게 가난한 사람이 되라고 말할 기독교인 부모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은 가능한 한 옆으로 미뤄두고 싶어 합니다. 설교자도 비슷합니다. 가난을 주제로 설교하기 힘듭니다. 가난한 교회가 되자고 말할 목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일단 “가난한 자의 피난처”에 대한 시편 14편 말씀을 여러분에게 아는 한도 안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쉽지는 않겠으나 설교하는 저를 포함해서 어떤 교인들에게 영혼의 해방이 경험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어리석은 자
시편 14편에는 다른 데서 흔하게 볼 수 없는 특징적인 표현이 반복됩니다. ‘어떤 어떤 자’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1절에는 ‘어리석은 자’와 ‘선을 행하는 자’라는 표현이, 2절에는 ‘하나님을 찾는 자’가, 3절에는 ‘더러운 자’와 ‘선을 행하는 자’가, 4절에는 ‘죄악을 행하는 자’가, 6절에는 ‘가난한 자’가 나옵니다. 전체적으로 말하려는 핵심은 ‘어리석은 자’의 행태에 대한 비판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합니다. 안하무인으로 삽니다. 이런 내용이 1절부터 5절까지 이어집니다. 6절에는 아주 특이한 내용이 나옵니다. 어리석은 자는 가난한 자를 무시한다는 겁니다. 6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여기서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는 ‘너희’는 죄악을 행하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입니다. 그런 이를 가리켜서 4절이 더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공동번역으로 이 문장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언제나 깨달으랴. 저 악한들, 떡 먹듯 나의 백성 집어삼키고 야훼는 부르지도 않는구나.” 악한 이들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난한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평소 빵을 먹듯이 하나님 백성을 집어삼킵니다. 옛날 탐관오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를 방어할 힘이 없어서 저항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여호와를 부르지도 않고 찾지도 않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산다면 가난한 자들을 집어삼킬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여호와를 부르지 않는다는 말이 하나님을 아예 믿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도 모두 유대인들이기에 명시적으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들은 안식일도 지키고 성지 순례도 했을 겁니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의 일에 개입하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일은 자기들이 얼마든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세상을 나름으로 살기 좋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오늘의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세상에 알리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을 시편 기자는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을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현대인들도 하나님이 개입할 여지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개입하기에는 인간의 힘이 너무 막강해졌습니다. 아는 것도 많습니다. 사람의 운명을 사람 자신이 쥐락펴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쌓은 부는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처럼 막강합니다. 더는 홍수로 멸망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듯이 보입니다.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 되었으니 어떤 이들에게는 돈 버는 일도 쉽습니다. 자신감이 넘칩니다. 돈만 있으면 인생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고 여깁니다. 돈만 많으면 실제로 우주여행까지 가능해졌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개입하신다고 믿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없는 겁니다. 1절에 따르면 이런 사람들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들의 본성이 부패했고, 행실이 가증합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시편의 이런 표현은 좀 지나친 거 아닐까요?
저는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는 당시의 시대정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도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고 선을 행하고 정의롭게 살려는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소수의 의로운 사람을 남겨두시는데, 전체적으로는 그 시대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선을 행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현실로 느끼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방식이 바로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가난한 자를 무시하고 혐오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정신도 시편 기자가 살던 고대 유대의 시대정신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게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제가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피난처
시편 기자는 당시 시대정신과 완전히 반대되는 말씀을 선포합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이를 교회에 대비하면 이렇습니다. “여호와는 가난한 교회의 피난처이시다.” 더 노골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가난한 교회만이 여호와 하나님을 피난처로 경험할 수 있다.” 충격적인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유일한 인생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일치입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만 세상이 제공하지 못하는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부러움을 살만한 위치에 올랐는데도 하나님을 피난처로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그야말로 모레 위에 세운 집이 되고 말 겁니다. 시험점수는 높게 받았으나 앎의 기쁨을 모르는 수험생과 비슷합니다.
시편 기자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창조 신앙이 자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와 우주를 창조하셨고, 하나님 당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존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너나 할 거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존귀한 피조물들입니다. 이걸 전제하면 하나님이 가난한 자의 피난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될 겁니다.
한 가정을 비유로 들겠습니다. 자녀들이 모두 열 명입니다. 경제 능력이 뛰어난 자녀도 있고, 크게 떨어지는 자녀도 있습니다. 건강한 자녀도 있고, 그렇지 못한 자녀도 있습니다. 장애아도 있다고 합시다. 부모에게는 모두 똑같은 자녀들입니다. 자녀들에게 똑같은 사랑을 베풉니다. 돈벌이가 좋고 건강한 자녀들은 부모에게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됩니다. 가난하고 건강이 나쁜 자녀는 부모에게 신세를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부모가 피난처입니다.
이 비유가 충분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비유에서는 부모가 가난한 자녀에게 실제로 경제적으로 도와줄 수 있지만, 우리 인생살이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경제 문제를 직접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기도를 통해서 시급한 경제 문제가 해결된 경험을 한 분들도 있긴 할 겁니다. 하나님에게는 무슨 일이나 가능하니까 실제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기도로 해결한 경험을 우리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게 아닙니다. 이 현실 세상에서는 아무리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고 찾아도 가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거꾸로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부자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이 가난한 자의 피난처라는 말은 가난했던 사람이 부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품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게 핵심입니다. 하나님에게 자신의 미래를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새롭게 재창조하실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재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런 세상 질서가 지배하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세상입니다. 그 세상에서는 돈이 없어도 불편한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주눅들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이 꾼 꿈 세상입니다.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노는 세상입니다. 그런 꿈을 꾸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궁극적인 피난처이십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어떤 사람에게 죽음이 피난처가 되는 거와 비슷합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부자가 오히려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자신이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것들이 공허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5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옳게 사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니 저자들은 겁에 질려 소스라치리라.
저는 천국과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람에 따라서 천국으로 경험되기도 하고 지옥으로 경험되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천국을 춤추는 곳으로 가정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와서 기분 좋게 춤을 배웁니다. 어떤 사람은 옛날 왕비 옷을 거창하게 차려입었습니다. 이 사람은 춤을 가볍게 출 수가 없습니다. 춤을 출수록 힘듭니다. 빨리 그곳을 떠나고 싶습니다. 그에게 천국은 오히려 지옥입니다. 돈 버는 이야기만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미 지옥을 사는 게 아닐는지요. 겉으로는 평안하고 즐거운 듯하나 실제로는 시 14:5절이 말하듯이 겁에 질려 소스라치는 건 아닌지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세상을 희망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고 믿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 인식과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이 가난한 자의 피난처라는 말은 자칫 자기 합리화나 현실도피, 또는 냉소주의에 떨어집니다. 이 세상은 다 부패했고,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살이는 다 헛되다는 자기의 주관적인 생각에 갇혀서 밤새워 그림을 그리고 작곡하거나 시를 쓰는 이들과 물리학과 의학과 고고학에 천착하는 이들과 세상을 개혁해보려는 정치인들과 기업가들과 가족을 위해서 노동의 무게를 견디는 노동자들의 모든 노력을 무시합니다. 자기 합리화와 현실도피와 냉소주의는 하나님의 통치를 희망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해당하지 않습니다. 현실 삶에 훨씬 더 역동적으로 참여합니다. 삶의 본질과 근본에 휩싸이려고 훨씬 더 많이 애를 씁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희망한다는 말이 어떤 분들에게는 멀리 느껴질 겁니다. 너무 고상한 말이라거나 자녀를 키우고 맞벌이해야 할 우리의 현실 삶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다른 복잡한 일들로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세상 안에서 삽니다. 세상은 없는 게(無) 아니라 존재합니다. 제가 존재하고 다른 사람도 존재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구에는 온갖 미생물이 가득합니다. 바이러스도 그 미생물에 속합니다. 만물이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라는 거대한 그물망 안에서 서로 의존적으로 살아갑니다. 존재의 신비이자 창조의 신비입니다. 더욱이 그 하나님의 창조는 궁극적으로 선합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도 지금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만 근본에서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 능력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 능력과 신비를 느끼는 사람은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예를 들겠습니다. 여기 20억 원짜리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있고, 2억 원짜리 연립주택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값만으로 본다면 두 사람의 삶은 비교가 안 됩니다. 사람이 집에서 산다는 존재의 차원에서만 본다면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갑니다. 집안에 거실과 부엌과 침실과 화장실이 있습니다. 각각의 공간에 여러 사물이 놓여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그 공간을 오가면서 자신이 살아있다는, 즉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20억 원 아파트에서 살아야만 이런 느낌이 더 진실해지거나 강력해지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속으로 이왕이면 20억 원짜리 집이 훨씬 낫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게 현실적인 생각이겠지요. 그 현실을 우리가 부정할 수는 없어도 이런 현실에만 매달리면 결국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내면이 공허해집니다. 평생 교회에 다녔는데도 실제로는 하나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즉 하나님과 구원을 겉으로 말하면서도 가난한 사람을 알게 모르게 무시하고, 가난을 두려워하는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적지 않습니다. 순식간에 “어리석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게 왜 어리석은 자인지를 모르니까 더 불행한 일입니다.
저의 설교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성경은 가난 자체를 미화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은 모두 가난해야 한다고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럴만한 영적인 내공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발적인 가난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 이야기는 가난한 자와 그들의 삶을 무시하고 혐오하는 시대정신에 대한 비판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지 않는 이 교만한 세상에 대한 준엄한 비판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 당신이 가난한 자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과감하게 선포했습니다. 그 말씀을 믿는 사람은 최소한 일용할 양식만 있으면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난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이 세상을 바꾸려고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임할 것이라고(눅 6:20)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 안으로 한걸음이라도 깊이 들어가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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