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KLvRlR3ZXBU?si=KSTwjd_tKxIK1hiU
▣ 들어가는 말
- 영화 『가버나움』이 던지는 질문들
소년 자인의 외침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를 고소하고 싶어요.”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집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생리를 시작하자마자 팔려가는 11살 여동생 사하르, 닭 두 마리로 사하르를 빼앗듯 사가는 작은 식료품 가게 주인 아사드, 에티오피아 출신 불법 체류 노동자 여성 라힐과 그녀의 아기 요나스, 삶의 문제를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탓으로 돌리며, 가정을 꾸린 것을 후회한다는 자인의 아버지 셀림, 자신 외에는 누구도 자신을 비난할 수 없다고 항변하는 엄마 수하드, 시장에서 불법 체류증을 만들어 주며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는 브로커 아스프로…
‘이것이 인간인가.’ ‘이것이 삶인가.’ 너무나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세계이고 삶이지만, 우리가 보지 않고 외면하고 있는 세계, 어두운 곳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와 우리를 소름이 끼치게 하는 바퀴벌레 마냥, 평소에는 감추어져 있지만 언제든 튀어나와 마주칠 수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고통스러운 현실을 대면할 때마다 ‘누구의 잘못인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은 왜 이토록 비극으로 가득한가? 어찌 이다지도 불합리한가? 대체 신은 존재하는가?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11:23~24) 어찌해야 할까요? 고민이 깊어집니다. 이러한 세계에 대해 성경적으로 확실하고 근사한 해법을 제시해 드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저 역시 그저 무겁고 무기력하고 무서운 마음이 먼저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학적 질문을 주셨으니, 감히 조심스럽게 신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함께 숙고해 볼 수 있으면 합니다.
▣ 삶의 자리
- 마태의 신학
마태는 최초의 복음서 마가복음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서 하나의 연속적인 이야기로 만듭니다. 자신의 관점으로 새롭게 편집한 것이지요. 그러면서 마가의 이야기를 상당히 축소하고 많은 부분을 생략합니다. 대신 예수의 행동과 말씀에 초점을 맞춥니다. 마태에게는 사건이 벌어진 맥락과 상황보다는 예수의 말과 행동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마태가 보도하는 기적 이야기는 전부 마가복음에서 가져왔습니다. 오늘 말씀의 본문인, 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는 이야기만 제외하고 말입니다. 마태가 보기에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기적 이야기들만으로도 자신이 의도하는 메시지를 전하기에 충분하다 여겼나 봅니다. 그러니 마가복음 곳곳에 흩어져 있는 기적 이야기들을 모아 자신의 방식으로(순서, 배열) 새롭게 편집합니다. 그런데 이 기적 이야기에 한 가지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유일하게 마가복음에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이지요. 그것은 분명 마태가 생각하기에 뭔가 중요한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
- 가버나움
그 이야기는 가버나움이라는 도시에서 일어나는데, 히브리어로 “크파르 나훔”이라고 부릅니다. “크파르”는 “마을, 도시”라는 뜻이며, “나훔”이라는 말은 구약의 선지자 이름과 같은데, “긍휼, 자비, 위로”라는 뜻입니다. 결국, 가버나움은 “자비, 긍휼, 위로의 도시”인 것이지요. 예수 당시의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주변에 있는 상업적으로 주요한 마을이었습니다. 갈릴리 호수를 끼고 있어 물고기가 풍부해 어업이 주인 마을일 뿐 아니라, 이 마을은 당시에 남쪽 이집트로부터 북쪽 시리아의 다메섹까지 연결하는 중요한 무역로인 “비아 마리스”(해안길)가 통과하는 위치에 있어서, 각종 무역상을 위한 여관이나 편의 시설도 풍부했고 많은 사람이 붐비는 상업 도시였습니다.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사렛에서 자랐고, 예루살렘에서도 많은 말씀을 전하셨지만, 특별히 가버나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가버나움은 예수의 갈릴리 사역의 중심 도시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나사렛을 떠나 광야에서 시험을 받은 후,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마4:13)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 예수는 가버나움에서 사셨고, 가버나움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다양한 기적을 일으키셨고, 가버나움에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등 어부들과 세리 마태를 만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의 주 무대가 가버나움인 셈이지요.
- 산에서 내려오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은 ‘산상수훈’ ‘산상설교’로 알려진 주님의 보석과 같은 가르침의 말씀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마5:1) 앞서 말씀드렸듯이 마태는 의도적으로 마가의 이야기를 새롭게 편집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로 모아 한 곳(5~7장)에 배치합니다. 그 가르침의 장소를 ‘산’이라 표현하지요. 장소보다는 가르침의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가르침의 배경이나 구체적인 지명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곳을 ‘산’이라 표현하면서 실제의 삶, 일상의 삶과는 분리된 어떤 곳을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겐 ‘학교’ 정도라고 이해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 가르침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시니”(8:1)라는 표현으로 보아, 뭔가 상황이 바뀌었음을 보여주려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실제 현실에서,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현실에서 동떨어져 이루어진 가르침이 실제 세계에서 얼마나 쓸모가 있는지,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을 어떻게 현실에서 실천하는지 보여주는 것이지요.
▣ 백부장
- 이야기의 구조
예수가 산에서 내려오자, 많은 사람이 몰려드는데(8:1), 산상설교의 시작 장면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최초의 치유 사건인 나병 환자 이야기가 등장합니다(8:1-4). 예수는 시리아 사람 나아만을 깨끗하게 고친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보다도 더 강력한 분으로 묘사되지요. 마태는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예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춥니다. “내가 원한다. 깨끗하게 되어라”(8:3)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는 장면도 이와 비슷합니다. 등장인물들 사이에 어떠한 말도 하지 않습니다. 오직 병을 고치는 예수의 능력과 헌신에 전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요(8:14-15). 예수는 그저 말만 번지르르한 그런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말뿐 아니라, 그 말을 실현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다룰 이야기는 바로 이 두 사건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마태가 다룬 기적 이야기 가운데 마가복음에 없는 유일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마태가 볼 때, 뭔가 특별한 의미와 의도가 있는 것이겠지요.
아울러 가버나움이라는 장소를 의도적으로 알리고, 이곳에서 세 번의 치유(나병환자, 백부장의 하인, 베드로의 장모)사건을 다룬 후 바다를 건너 가다라(마가복음-거라사) 지방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무덤 사이에서 떠도는 귀신 들린 자 두 사람을 고치시고 다시 “본 동네”(9:1)라고 표현하고 있는 가버나움으로 돌아옵니다.
- 로마 백부장
언젠가 제가 가다라 지방의 무덤가에 있던 귀신들린 자 치유 사건을 다룰 때 말씀을 드렸듯이, 가다라 지방으로 예수가 가신 것의 의미는 오로지 유대인만을 위한 복음이 이방으로 확장되었다는 중요한 선교적 의미를 지닌 것이라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방으로 향하기 전에 먼저 이방인 백부장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이방 선교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지요. 믿음은 민족이나 혈통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로마 백부장(Centurion)은 고대 로마군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중급 장교입니다. 백부장은 보통 100명 정도의 병사로 이루어진 센투리아(Centuria)라는 소부대를 지휘했습니다. 백부장은 전쟁터에서의 용맹과 리더십을 바탕으로 선발되는 경험 많은 군인입니다. 따라서 전투 능력이 뛰어나 전쟁터에서 최선봉에서 활약하며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지휘하는 가장 노련한 군인입니다. 자기 부대에 속한 병사들의 훈련을 감독하고 엄격한 징계도 하는 중급 장교로, 병사들 사이에서는 높은 존경을 받는 지위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를 접하고 있는 곳으로, 약 1,500명 정도의 어부가 있었고 상업이 발달해 있어 군대가 주둔하기에 좋은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무역로에 위치하니 로마가 직접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겠지요. 그래서 이곳에 로마의 부대가 주둔하며 지역의 치안 등을 담당하고 있었을 것이고, 도시의 규모를 생각하면 그 부대의 규모는 그렇게 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가버나움에서 로마군대 백부장 지위는 상당하지 않았을까요. 이 사건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의 본문(눅7:1~10)을 보면, 자신이 예수를 직접 찾아오지 않고 유대 장로 몇 사람을 대신 보냈고, 그 장로들이 백부장을 칭찬하면서 자신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가버나움에서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 다만 말씀으로만
그 백부장이 예수께 찾아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8:6) 중풍병은 오늘날 뇌졸중이라 하는데, 주로 신체의 일부가 마비되거나 움직이지 못하고, 말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심한 두통이나 의식의 혼란 등의 증상을 보인다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질병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종교적, 영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많았지요. 그러다 보니 예수께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것이지요.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주여, 저의 집에 오심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
그의 태도와 믿음에 예수는 놀랍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가라, 네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대부분 사람은 주로 말보다 행동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니 가버나움 사람들은 산상수훈에서의 가르침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할 터인데, 백부장은 말로만 하라는, 가르침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믿음을 보이지요. 마태가 기적 이야기에서 최대한 말을 생략하고 행위에 집중한 것이 어쩌면 이러한 이유가 아니었을까요. 백부장의 믿음, 확신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대체 이 사람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해 보지요. 로마의 군인입니다. 죽고 죽이는 수많은 전투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지역에서는 대단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지요. 자기 병사들의 안전도 지켜야 하고, 지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사건과 사고, 민원을 해결해야 하지요. 언제 있을지 모르는 반란이나 폭동 등도 신경 써야 합니다. 무역로를 지나는 사람들도 세심히 잘 살펴야 하지요. 본문에 표현된 하인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제 판단으로는 부하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요. 중풍병이 걸린 것을 보면 나이도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함께 전장을 누비며 생사고락을 함께한 병사입니다. 자신이 가진 권한으로 할 수 있는 여러 수단을 찾아보았겠지요. 그런데 부하는 나아지지 않습니다.
아울러 예수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버나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을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그가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모를 리 없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본문을 참고해 보면, 가버나움에 있는 유대인들과 관계도 잘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를 대하는 그의 말과 태도를 보면, 그가 얼마나 훌륭한 품격을 갖춘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태도, 말 그 어디에도 점령군의 태도나, 상대를 깔보거나 강압적이거나 자만심 같은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지휘관이지만 부하의 고통에 연민을 가지고 최선을 다합니다. 피정복민이라고 자기의 정치 군사적 힘을 남용하지 않습니다. 상대의 종교를 진심으로 지지하고 인정합니다. 피정복민에 불과한 예수를 향해 ‘주님’이라는 표현을 스스럼없이 사용하고, 부탁하는 자로서 겸손한 태도를 보입니다. 어떠한 허세도 없습니다.
▣ 나가는 말
- 가버나움은 어디인가?
영화 『가버나움』에서 레바논 출신의 감독은 왜 제목을 가버나움으로 정했을까요. 가버나움은 예수 활동의 중심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버나움은 피정복민으로 학대받는 유대인들의 상황이 있고, 그 가운데 갈릴리 바다에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많은 유대 어부들의 고단한 삶이 있고, 무역을 위해 이리저리 떠도는 다양한 상인들, 떠돌이 장사꾼이 있고, 지역의 치안과 질서를 담당해야 하는 로마의 군대와 관리들…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있었을 테지요. 그 속에서 예수는 가난한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며, 병자들을 고치고 위로하며 자신의 사역을 하고 있었을 것이고요.
가버나움은 이 세계를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현실의 세계 말입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세상의 구석구석에는 온갖 비극과 눈물과 범죄와 고통과 아픔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 세계 속에서, 그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불평하지 않고 고통을 견디고, 반감 없이 고통을 직시하는 법을 배우려다 보면 어지럼증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건 가능한 일이며, 심지어 그 과정에서 막연하게나마 희망을 보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삶의 다른 측면에서 고통이 존재해야 할 훌륭한 이유를 깨닫게 될지도 모르지. 고통의 순간에 바라보면 마치 고통이 지평선을 가득 메울 정도로 끝없이 밀려와 몹시 절망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에 대해, 그 양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러니 밀밭을 바라보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게 그림 속의 것이라 할지라도.” 1889년 여름 어느 날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글 중 일부입니다. 스스로 입원하여 정신병원에서 지내며 자신의 불행을 극복하려는 고흐의 눈물겨운 사투가 엿보입니다.
가버나움이라고 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 백부장과 소년 자인
영화를 보며… 무엇을 보아야 할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영화 속 자인의 모습은 예수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버나움이라는 세계에서 사람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려 최선을 다하는 자인. “지금 여기를 참을 수 없다면 불행해집니다. 우리에게는 세 가지 선택권이 있습니다. 그 상황을 벗어나거나 변화시키거나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싶다면 지금 당장 이 세 가지 중에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결과를 받아들이십시오.” “지금의 상실은 존재의 상실입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함께 읽었던 에크하르트 톨레,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의 일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은 가버나움입니다. 그 가버나움에서의 삶은 고단하고 힘겨운 부조리의 삶이지요. 우리가 완전하지 않고, 세계가 완전하지 않으니 삶이 완전할 리 없습니다. 그 세계 속에서 자인의 부모처럼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탓’ ‘누구도 자신을 비난할 수 없다’ 세상 탓, 사회 구조의 탓, 더 나아가 신의 탓으로 돌리며 가버나움의 세계에 적응하며 살 수 있습니다. 어쩌면 대부분은 이런 삶을 살겠지요.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 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빅터 프랭클이 한 말입니다.
영화에서 자인이 보여준 모습은 오직 그만이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보입니다. 환경이나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삶이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에 인간으로서의 응답을 한 것이 아닐까요. 영화에 등장한 수많은 이들 가운데 자인만이 사람의 도리를 한 것 아닐까요. 그래서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며, 희망을 말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오늘 성경의 본문에서도 백부장의 모습은 그가 자신의 지위나 상황을 넘어 오직 인간의 도리, 사람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가버나움과 같은 이 세계에서, 우리는 삶이 던지는 물음을 듣고 있을까요. 그 물음에 인간의 길, 사람의 길을 선택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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