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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고난의 십자가, 세상의 아픔과 마주하다 (사 53:1–6, 마 25:40)

2025년 4월 6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BBuhIQ33-0Q?si=z8QrhqyRJ8fqBdRE

▣ 여는 말

- 본질적 질문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에서 한 청년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외침과 함께 자신의 몸에 불을 지릅니다. 그의 이름은 전태일. 당시 22살.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며 매일 16시간씩 일하던 어린 여공들의 삶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그들의 고통 앞에 자신의 생명을 던집니다.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씁니다. “그들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다. 그들의 가슴 속에 피맺힌 한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다.” 그의 죽음은 단지 한 명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침묵하는 사회를 향한 예언자의 외침이었고, 무관심 속에 짓눌린 생명을 위한 대속적 헌신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사야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사 53:3, 5) 전태일은 현대 산업사회의 고난받는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의 고통은 단지 개인의 분노가 아니라, 불의한 구조에 대한 저항, 그리고 연약한 이웃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그 고난의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예수 고난의 의미를 물어야 합니다. 전태일의 외침과 이사야의 예언,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를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의 시대는 우리를 향해, “세상의 고난받는 이들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물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4:9) 우리를 향해 질문합니다. 아울러,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의 고통에 침묵하고 있는가?” 그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정체성과 품격이 결정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질문은 신앙에 있어서 본질적인 물음이기도 하면서, 인간으로서 가장 핵심적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 난관 앞에 선 인간

사순절을 지나는 이 시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합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단지 신학적 사건이나 종교적 전통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인간의 고통, 권력의 잔인함, 무관심의 냉혹함이 교차하는 자리였습니다. 이 고난은 과거의 사건만이 아닙니다. 종교 안의 영혼에만 관계된 사건만도 아닙니다. 이 고난은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계속되고 있는 우리 삶의 이야기, 우리의 인간됨에 관한 본질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때로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왜 이런 고난이 내게 오는 걸까?” “하나님은 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실까?” 삶이 무너지는 그 자리에 서면, 기도도, 찬양도, 위로의 말도 마음에 와닿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다면, 왜 우리를 이토록 힘든 현실 속에 그냥 두시는 걸까요? 고통의 문제는 인간의 삶의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고통과 고난이 없는 삶은 없습니다. 그것이 개인 실존의 문제이든, 사회 구조적 문제이든, 내면의 심리적 문제이든, 육체적인 고통이나 가난의 문제이건 인간은 고통의 문제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난관 앞에 선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 왜 예언인가?

이런 물음 앞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놀라운 방식으로 응답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언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사야는 왜 자신의 메시지를 예언의 형식으로 전했을까요? 저는 여기에도 깊은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문학적 선택이 아니라 신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을 전하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신학적 인간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예언은 단순히 미래를 점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현재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백성을 회복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현장 발언’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이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라는 표현은 ‘말씀을 전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전달하고 있는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대화적 언어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위대한 신, 하나님이 바로 지금 이 순간, 너의 눈을 바라보며, 너의 곁에 오셔서 너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라는 말이지요. 너무나 가까이에서, 우리 곁에서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함께 교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예언형식은 고난과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언어입니다. 예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언어입니다. 강력한 희망의 불꽃을 담고 있는 언어이지요. 눈앞에 보이는 현실 너머의 진리를 보게 하고, 절망하지 않게 하며, 고통에 무너지지 않게 하며, 품격있게 고난을 겪어낼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진 신의 언어인 것이지요. 한편으로는 심판과 경고로 마음을 찌르고, 또 한편으로는 위로와 회복으로 마음을 감싸줍니다. 백성의 죄를 고발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치유의 도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언은 ‘단지 정보가 아니라 영혼을 흔드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이사야는 바로 이런 고난의 시대를 사는,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 나라를 잃고 소망조차 사라져버린 사람들에게 선언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사 53:5) 인간의 삶의 본질 가운데 하나인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을 향한 외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고통과 어떤 상관도 없는 고통에서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 고통받는 분이시다! 엄청난 선언입니다. 고통받는 신이라니요! 신은 너무나 크고 거대하고 전능하기에 인간의 생사고락 따위와는 무관한 존재라 여겼는데, 그 신께서 고통을 받는다는 놀랍고도 위대한 통찰,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예언을 토해낸 것입니다.

너희의 고통을 대신 당하시는 분이라고 선언합니다. 너희의 잘못과 허물과 죄악으로 비롯된 고통이지만, 그래서 너희가 그 고통과 고난을 겪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지만, 너희의 하나님은 그 고통을 함께 지시는 분이시다. 그 고통을 대신 당하는 분이라고. 그분은 고난을 통해 말씀하시고, 고난 가운데 우리를 회복의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선언이지요.

 

▣ 고난받는 종

- 시대적 정황

이사야는 기원전 8세기 남유다에서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 때(사 1:1) 활동했습니다. 이 시기는 외부적으로 아시리아 제국이 확장하여, 초강대국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결국, 기원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지요. 남유다는 이에 큰 위기감을 느끼고 살아남기 위해 주변의 여러 나라와 아슬아슬한 줄타기 외교를 하며 버티고 있는 상황입니다.

내부적으로는 종교적인 타락이 심각합니다. 예배는 형식이 된 지 오래 이고, 우상숭배가 난무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흩어지고 도덕과 윤리의식은 찾아볼 수 없게 되지요. 사회 정의가 무너져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착취와 불의한 재판이 성행합니다. 이러한 혼란과 타락, 위기의 상황에서 이사야가 메시지를 전한 것이지요.

- 역설의 신학

오늘 읽은 본문은 ‘제2이사야’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이는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는 백성에게 전한 위로와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유다 민족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고, 민족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믿음마저 무너집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 표현은 이 민족 전체가 타락하고 어떤 구심점 없이 각자도생으로 갈가리 찢어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타난 고난받는 종의 모습은 유배된 공동체 안에서 “대속적 지도자”라는 “고난받는 종”이라는 새로운 지도자상을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포로 생활을 겪고 있는, 고난을 겪고 있는 이들이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놀랍습니다. 고난받는 이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지도자는 절대적인 힘으로 적을 물리치는 절대적 군주상이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의 고난을 끝내줄 수 있는 강력한 군사적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고난받는 종이라니요. 자신들의 고통을 대신 지는 지도자라니. 엄청난 역설입니다. 아울러, 고난받는 종은 사회에서 철저히 배제된 자, ‘우리가 귀히 여기지 아니한 자’입니다. 신체적 질병(“질고를 아는 자”), 무력함, 죽음을 통해 고난과 고통의 사회학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낮고 천한 자가 하나님의 도구, 역사의 변혁자, 고통받는 영혼의 구원자가 된다는 점에서 놀라운 역전의 신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억압받는 자의 형상

이사야 53장은 이른바 ‘고난받는 종의 노래’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유배당한 시대, 이사야는 한 사람의 불가사의한 고난을 예언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이사야 53:3, 5) 히브리어 원문에서 ‘찔림’(דָּקַר)은 폭력적인 죽음, ‘상함’(כָּעַב) 역시 심각한 육체적·심리적 파괴를 의미합니다. 이 종은 무력하지만, 그 고난을 통해 다른 이들이 나음을 얻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가 죄인을 심판함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을 대신해 고난받음으로써 드러나는 신비한 방식을 보여줍니다. 이 모습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 사건에서 완전히 성취됩니다.

- 예수의 고난, 구조적 악과의 충돌

예수는 단지 어떤 사람들의 증오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고난은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 경제적 기득권층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교차하는 자리에서 발생했습니다. 그는 병든 자, 가난한 자, 배척받은 자들과 함께하셨고, 그것이 결국 그를 고난과 죽음으로 이끈 것입니다.

오늘의 세계에도 고난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작년 국회에서 백배 노동자 고 정슬기 님의 아버지 정금석 님은 “사람은 기계가 아닙니다.” 절규합니다. 그녀는 하루 14시간 이상을 일하다 새벽 배송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평택항에서 컨테이너 내부작업을 하다 300kg가량의 날개에 깔려 사망한 23세의 이선호 씨… 길거리에서 노숙하며 소외된 채 살아가는 도시 빈민들. 이들은 이 시대의 고난받는 종들입니다.

한나 아렌트의 통찰, “악은 생각보다 평범하다. 평범한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체제에 순응할 때, 그것은 악이 된다.” 예수의 고난을 만든 것도 결국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 아니었던가요. 이익이 될 때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환호하다가, 손해가 될 것 같으면 ‘십자가에 매달아라’ ‘돌로 쳐라’ 외치던 사람들. 외면하고, 방관하고, 침묵한 사람들. 오늘 우리의 모습, 교회의 모습 아닌가요.

- 십자가는 저항의 상징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랑의 희생이면서 동시에 세상의 불의에 대한 비폭력 저항이었습니다. 체 게바라는 쿠바 혁명 이후, 그는 남미 곳곳의 가난과 불의에 분노하며 “한 사람의 고통에도 무감각한 삶은 살 가치가 없다” 말합니다. 비록 폭력적 수단이 논란이 되지만, 그의 삶은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하고자 했던 저항적 윤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을 반대하며 세금 납부를 거부했습니다. 그의 『시민 불복종』은 “불의한 법에 복종하는 것은 그 자체로 죄”라고 선언합니다. 불의한 세계에서 정의로운 자가 있어야 할 곳은 감옥이라고 감옥에 갇힌 그를 찾아온 에머슨에게 이야기하기도 했지요. 예수도 불의한 체제에 침묵하지 않고, 사랑이라는 방식으로 저항하셨습니다. 예수는 그 구조적 침묵 속에서 소외된 이들을 ‘이름’으로 불러주셨고, 그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 사순절, 사회적 감각을 회복하는 시간

우리는 사순절을 개인적인 금식과 경건으로만 국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감각, 윤리적 민감함을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금식하는 이유는 누군가의 굶주림에 공감하기 위함이고, 우리가 침묵하는 이유는 가장 연약한 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함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말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사회적 책임을 동반한다.” 믿음은 단지 내 영혼의 평안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상처에 책임지는 용기입니다.

예수의 고난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고난은 부활로 이어졌고, 절망은 희망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난을 통과해야 합니다. 오늘날 십자가는 전쟁 속 난민, 외롭게 죽어가는 독거노인, 청년들의 번 아웃,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 속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는 그 자리에서 지금도 고난받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우리는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습니까?

 

▣ 나가는 말

- 가장 좋은 일, 가장 좋은 길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1859)는 18세기 프랑스 혁명 전후의 혼란과 변화,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시절이자, 가장 나쁜 시절이었다.”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하지요. 이 소설에는 ‘시드니 카턴’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총명하고 재능 있는 법률가였지만,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한 채 무기력과 술에 빠져 살아가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인생을 “쓸모없는 삶”이라 말하며 자포자기한 채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루시 마네트’라는 여인을 만나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가 ‘찰스 다르네이’와 사랑에 빠졌음을 알고 자신의 사랑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그는 루시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냅니다. 그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내 목숨을 기꺼이 내놓겠습니다.”

이후, 루시의 남편이 프랑스 혁명 속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단두대 앞에 서게 되자, 시드니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자리를 바꾸어, 그를 대신하여 사람들의 환호와 증오가 뒤섞인 광기 속에서 처형당합니다. 그가 마지막에 남긴 고백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내가 이제까지 해온 일 중 가장 좋은 일이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은 내가 이제까지 걸어온 길 중 가장 좋은 길이다.” 시드니 카턴은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희생을 통해, 루시가 사랑하는 이들을 구원하고, 자신의 인생에도 궁극적인 의미를 남겼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실패자’였지만, 결국 가장 위대한 사랑을 실천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이사야 53장 5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혹은 온전한 자신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 삶은 타인을 사랑하는 것,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일 아닐까요. 자기 십자가 아닐까요. 크고 대단한 희생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작고 소소한 희생과 헌신, 올바름을 위해 할 수 있는 고난을 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 희생의 길이 멀리에 있다 여기지 마십시오. 나와는 관계없는 길이라 여기지 마십시오. 그 길로 가는 것을 피하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기꺼이 그 희생과 고난의 길을 선택하시고 당당히 가십시오. 그것이 우리를 거룩하게, 아름답게, 자기답게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살립니다. ‘과거가 현재를 구원합니다.’ 우리의 고난이 우리의 자녀들을, 다음 세대를 구원할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고난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개인의 구원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정의와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난 자리입니다. 이 사순절, 우리는 고난받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작은 행동으로 그들의 삶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의 상처 안에서 우리는 치유 받고, 그의 고난 안에서 우리는 부름 받습니다. 우리의 고난으로 자신과 세상이 구원을 얻습니다. 그분의 길을 따라, 세상의 아픔과 마주 서시길 기도합니다. 그곳에서 부활은 시작됩니다.

 

주님,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이 주님께만 해당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소서.

인간을 위해, 그들의 죄를 짊어지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가는 주님의 모습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그 길에서 구원과 해방, 자유와 평화를 얻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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