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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공간, 울림, 하나님
시편 19:1-6

무명에 가까운 수도자이며 신학교수 신부였던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31일에 95개조의 신학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당 출입구 위에 대자보 형식으로 게시했다는 사실이 역사적인 사건이긴 합니다만 마틴 루터에게는 그 날보다도 그의 개혁주의 신학이 원숙해지고 구체화한 전후의 맥락이 훨씬 중요할지 모릅니다. 예컨대 종교개혁의 불이 당겨지기 몇 년 전인 1513년부터 1515년까지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시편을 강의했고, 이어서 1515년, 1516년에는 로마서를 강의했습니다. 마틴 루터가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총(sola gratia), 오직 성서(sola scriptura)라는 종교개혁의 기본 개념을 얻게 된 것이 곧 시편과 로마서 연구에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루터를 신앙의 선배로 생각하는 우리는 오늘 루터의 신앙적 열정과 신학적 깊이에 조금이라고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그가 연구하고 강의한 시편 중에서 일부를 명상의 방식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시편 19:1-6절은 자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투르 바이저라는 구약신학자는 이 시편의 저자를 위대한 예술가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이 시인의 통찰력과 집중력에 의해서 구사된 비유적 언어들은 괴테, 하이든, 베토벤과 같은 탁월한 예술가들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런 시편을 읽으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선입관 때문에 정작 중요한 영적인 깊이를 놓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참된 예술은 비록 경험의 세계와 더불어 시작하고 그런 과정의 공부를 필요로 하지만 결국에는 선험(a priori)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뛰어넘는 하나님에 대해서 진술한 이 시편을 이해하려면 우리의 종교적 선입관을 버리고 신비한 근원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과연 이 시인으로 하여금 이렇게 노래하게 만든 영적 경험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요?

공간
1절에서 이 시인은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창공은 그 훌륭한 솜씨를 일러 줍니다.” 하고 노래를 시작합니다. 이런 구절은 창세기 1장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순서에 따르면 빛이 첫 번째이고 이 하늘, 또는 창공은 두 번째입니다. 하나님께서 “물 한가운데 창공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갈라져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창공을 만들어 창공 아래 있는 물과 창공 위에 있는 물을 갈라놓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창공을 하늘이라 부르셨다고 합니다.(창 1:6,7). 여기서 하늘이 만들어졌다는 말은 곧 이 세상에 공간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창세기 기자와 오늘 시편 기자는 한결같이 하늘과 땅이 갈라져서 생긴 이 공간을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행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해, 달, 별, 유성과 혜성, 구름 등등, 그런 하늘에 속한 것들과 강과 육지, 나무와 새들이 모두 이런 공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간이 곧 생명의 보금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도 역시 공간 안에서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우주물리학에서 말하는 빅뱅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지요? 이 우주가 하나의 점에서 폭발해서 거의 무한한 크기로 확장되었다는 이론입니다. 여기서의 핵심도 역시 공간의 등장입니다. 성서의 창조 설화나 현대물리학의 빅뱅이론이나 이 우주의 시작이 공간 형성이라고 증언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이 공간 사건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조금만 시야를 아래쪽으로 돌리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지구는 지난 45억년 동안 이런 공간을 유지하면서 생명의 꽃을 피웠습니다. 모든 생명체와 사물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진딧물 같은 미물이나 이름 없는 야생초도 역시 이 지구의 공간에서 우주론적인 가치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지구라는 공간 안에서 인간을 비롯해서 모든 생명체들이 자신의 몫을 원만하게 감당하기만 한다면 지구는 앞으로도 50억년 이상 이런 생명의 질서를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의 무한 욕망으로 인해서, 또는 예상하지 못한 천재지변으로 이런 공간이 허물어진다면 지구의 생명도 해체되고 말겠지요.  
이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생명 현상에는 또 하나의 내면적 의미가 있습니다. 즉 공간 안에서 생명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활성화되려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공간 안에서 거리가 유지되지 않으면 생명이 활동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태아가 영원히 어머니 몸 안에만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면 그는 결코 완전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밖으로 나와서 어머니와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만 이 아이의 생명은 완성됩니다. 어떤 점에서 사람과 사람의 모든 관계도 역시 이런 공간적인 거리를 확보해야만 생명 지향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의 사이에도 그런 공간적 거리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지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감은 우리를 훨씬 깊은 영적인 세계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울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구라는 공간 안에 무엇이 있을까요? 이곳에는 도저히 우리가 생각해낼 수 없을 만큼 많은 생명체와 사물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생물학자들과 물리학자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 훨씬 많을지 모릅니다. 지구 안에 있는 많은 것들 중의 하나가 곧 ‘소리’입니다. 소리는 곧 공기의 울림입니다. 그 진동이 우리의 고막을 통해서 뇌신경을 자극하기 때문에 우리가 소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공기는 지구에만 있는 물질이기 때문에 공기의 울림인 소리도 역시 지구에서만 가능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항성은 불덩어리니까 공기가 있을 까닭이 없고, 행성 중에서도 지구와 같이 소리가 가능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공간과 울림이야말로 생명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은 공간이라는 조건과 울림이라는 현상을 통해서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청각 장애인들에게는 미안한 말이 되겠지만 내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황홀해할 때가 많습니다. 계곡 물소리, 산사의 뒤뜰 대나무 숲의 바람소리, 젖먹이의 숨소리를 들을 때 생명의 충만감을 느낍니다. 우리 식구가 가능한 빨리 아파트를 떠나서 전원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이유 중의 하나도 숲에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살고 싶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한편으로 도시의 소음 때문에 정작 생명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외부와 차단된 아파트에 살기 때문에 자연의 소리와 단절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무런 불편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된 소리로부터의 소외와 단절을 별로 심각하게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내적인 생명력이 고갈되고 소진되었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앞에서 공간의 거리가 확보되어야 생명이 가능하다고 말했듯이, 아름다운 울림도 늘 적당한 거리를 필요로 합니다. 연인들끼리 나누는 사랑의 속삭임은 겨우 30cm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심포니를 감상하려면 최소한 10m는 떨어져 있어야 할 겁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아름다운 울림이 있으려면 적당하게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붙어 있으면 결코 울림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비주의자들은 아름다운 영혼의 울림을 위해서 혼자 있는 걸 연습했습니다.
우리는 소리의 또 다른 차원도 생각해야합니다. 우리가 듣지 못하는 소리와 울림이 지구 공간 안에 널려 있습니다. 꽃망울 터지는 소리, 안개가 나뭇잎을 스치며 내는 그 울림은 우리의 청각으로 포착해낼 수 없습니다. 보통 사람에게 들리지 않는 그런 울림의 존재론적 깊이를 자신의 고유한 영적 감수성 안에서 담아낼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예술가들과 철학자들이 아닐까요? 소로우는 <월든>에서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성공하려고 그처럼 필사적으로 서두르며, 그처럼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鼓手)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라.”
베토벤이 청각을 잃은 상태에서 작곡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청각이 열린다면 단지 공기의 울림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울리는 소리를 포착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으며, 신약의 사도들과 바울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우주론적 소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낮은 낮에게 그 말을 전하고 밤은 밤에게 그 일을 알려 줍니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구석구석 울려 퍼지고 온 세상 땅 끝까지 번져갑니다.”(2-4). 그는 온 우주 구석구석에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시인은 소리의 존재론적 능력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좁은 영역의 소리밖에는 들을 줄 모르는 우리의 청각을 뛰어넘어 훨씬 근원적인 소리를 포착해낼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이 이 시인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위에서 시편 기자의 노래 몇 마디를 통해서 공간과 울림이 생명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만, 오늘 시편 기자는 단지 공간과 울림으로 구성된 우주의 장엄을 찬양하려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런 자연을 찬양하는 노래는 어디나 많습니다.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이, 신나게 치닫는 용사와 같이”(5)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당시 이방의 신화적인 요소들도 이 노래에 들어와 있습니다. 시인은 자연을 향한 순간의 감정이나 느낌을 노래하는 게 아니라 그런 자연 현상에 대한 깊은 통찰에 의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다시 1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창공은 그 훌륭한 솜씨를 일러 줍니다.” 자연의 오묘함과 신비가 놀라운 현상이기는 하지만 결국 그는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야말로 이 세계의 모든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본 사람이 취할 수 있는 바른 태도입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는 인간을 그 중심에 두기 시작했습니다. CCM이나 복음찬송이 거의 인간에 대한 노래입니다. 예컨대 얼마 전까지 많은 교회에서 모임이 있을 때마다 불려지던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은 찬송은 그 가사와 곡조가 아무리 애틋하다고 하더라도 예배를 위한 찬송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적 경험과 그 기쁨이 아무리 절절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예배의 중심에 들어서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은혜롭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예배에서는 가능한대로 절제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배에서는 인간의 느낌과 감정과 결단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진정으로 영광을 받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개신교 예배는 훨씬 근원적인 예전(liturgy)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소위 ‘열린예배’라고 일컬어지는 예배 형식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인간의 종교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전면에 부각되는 참된 종교적 상징의 예배 방식이 필요합니다. 오늘 드리는 이런 음악예배가 그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간 울림’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건물에서 앞으로 21세기 교회 음악의 바람직한 대안과 실험들이 풍요롭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 길을 올곧게 가는 것이야말로 종교적 권위주의와 온갖 인간 중심의 업적 신앙에 물들어 있던 16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자기 삶을 던졌던 마틴 루터의 뜻을 기리는 우리가 감당해야할 작은 사명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위의 설교는 21세기 교회음악 아카데미 주최, 종교개혁 487주년기념 음악예배, 2004년 10월30에 행한 것>
시편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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