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과 주의 재림
빌 4:4-7, 대림절 제3주, 2012년 12월16일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쁨 공동체
빌립보서는 기쁨의 책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뻐하라는 권고를 반복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도 그런 말로 시작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이런 말을 들으면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살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기뻐한다는 건 어렵습니다. 오히려 짜증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습관적으로 몸에 밴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사가 못마땅합니다. 요즘 신경성 장애가 많다는 것은 이런 사실을 대변합니다. 삶이 왜 기쁘지 않은 걸까요? 어떤 이들은 기뻐할만한 일들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먹고 살기도 힘들고, 세상이 자기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통계를 보더라도 삶의 조건이 좋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행복을 더 느끼고, 따라서 삶을 더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습득한 세상살이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런데 빌립보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돈을 열심히 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을 좋은 대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해야 한다는 말하지도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입신양명, 처세술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출세하고 존경받고 살 수 있는지에 대한 기술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인생살이는 믿음과 상관없이 굴러갑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생에서 실패할 수 있고, 결혼을 못하거나 안할 수 있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간혹 믿음으로 바람직한 부부생활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 교회에서 아버지 학교나 부부 학교를 개설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은 살아가는데 단순한 참고사항일 뿐이지 신앙의 문제는 아닙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48세에 결혼했는데, 결혼 생활은 크게 불행했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행복한 삶의 조건을 일치시키려는 생각은 오해입니다.
빌립보서가 말하는 기쁨을 또 하나의 다른 방식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을 종교적 엑스타시로 여기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든지 상관없이 종교적으로 초월적인 망아의 차원에 들어가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한국교회에는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방언, 신유, 입신 같은 은사에 매몰되어서 살아갑니다. 이런 초월적 은사주의에 빠지면 일단 기쁨이 충만한 것처럼 보이긴 합니다. 삶의 현실들을 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은 마약에 중독되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술에 취해서 실제적인 걱정거리를 잠시 잊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이성이 마비된 상태에서 경험하는 기쁨은 건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빌립보서가 말하는 기쁨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그것에 대해서 본문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는 바울이나 그것을 받아볼 빌립보 교우들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알고 계시지요? 설명이 더 필요한가요?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기뻐해야합니다. 부활 생명을 희망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존재론적인 기쁨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기뻐하라는 말은 구원을 노래하라, 부활 생명을 찬양하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뜻과 똑같습니다.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왜 기뻐해야 하는지, 그리고 기쁨이 어디서부터 오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합니다.
관용 공동체
반복해서 ‘기뻐하라’고 말한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여기서 관용은 헬라어 ‘에피에이케이아’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사전에 세 가지 뜻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kindness, forbearance, graciousness.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정중하게 대한 태도를 가리킵니다. 특히 잘못이 있는 사람을 관대하게 대한다는 뜻이 강한 단어입니다. 구약에서는 현자들의 성품으로 거론되기도 하고, 디모데전서에서는 감독의 품성으로 거론됩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 관용을 교회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보았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라는 말은 곧 관용을 교회의 정체성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또한 그것이 기쁨을 아는 공동체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관용은 말처럼 간단한 게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관용보다는 비판, 배격, 재단에 익숙합니다. 다른 사람을 적대적으로 대합니다. 지금 싸움이 일상화된 우리 사회를 보면 눈에 확 드러날 것입니다. 지금 대선 마지막 국면입니다. 전체 국민이 여와 야로 나뉘어 싸웁니다. 정치만이 아니라 교육, 노동, 기업을 포함해서 모두가 서로를 적으로 여기면서 싸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관용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왜 그럴까요? 교양을 쌓는다고 해서 이런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양이 있으면 교양 있게 싸우고, 없으면 없이 싸웁니다. 사람은 서로를 경쟁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특히 자본주의가 극에 달하고 있는 현대사회는 그런 현상이 더 심합니다. 사실 세상을 향해서 싸우지 말고 관용을 베풀라고 말할 자격이 교회에는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세상보다 더 많이 싸웁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만 하더라도 감리교회, 성결교회, 예장 합동이 거의 교단 분열에 이를 정도로 싸웁니다. 개별 교회 내에서도 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가 관용 공동체라는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관용은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데서 가능합니다. 바울은 관용을 말하면서 이어서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덧붙였습니다. 주께서 가까이 이르렀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다면 관용을 베풀지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이건 그렇게 복잡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관용을 베풀지 못하는 이유는 시시비비가 우리의 영혼을 엄습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걸 따질 때는 분명히 따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잘잘못이 무의해지는 순간이 눈앞에 닥치면 그런 것에 연연해할 수가 없습니다.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어떤 사건을 만나게 되면 다른 것들은 작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내일 결혼을 앞둔 사람이나 10억원 복권에 당첨된 사람은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관용을 베풀 수 있습니다. 내일 죽는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일은 없을 겁니다. 초기 기독교는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온 영혼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영적 관점에서 작은 차이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서로가 관용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주의 재림을 자기 삶의 토대로 받아들인다는 게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신앙과 삶이 따로 논다는 뜻입니다. 칭의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칭의는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만한 업적이 없다 하더라도 믿음만 있으면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 거꾸로 아무리 많은 업적이 있어도 믿음이 없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놀랍기도 하고, 역동적인 말씀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우리가 말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두 가지 중의 하나가 그 대답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기독교 신앙 자체를 잘 모른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세상의 삶에 길들여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면서 동시에 세상의 삶에 길들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긴장관계, 또는 변증법적 관계입니다.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오면 당연히 세상의 삶에 길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세상의 삶에 길들여지지 않아야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경험하고 있는 세상살이와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재림신앙이 실질적으로 연결됩니까? 전혀 다르게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세상살이에서는 많은 문제가 급하게 돌아갑니다. 집 장만과 취업, 자녀들 교육, 노후대책과 복지 문제 등, 모든 것이 발등에 떨어진 불처럼 다가옵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물불 가리지 말고 뛰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말은 뜬금없는 것처럼 들립니다. 재림은 거리가 멀고 실제 삶은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에 신앙과 삶의 일치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말하는 관용을 실제 삶의 능력으로 살아내기가 힘듭니다. 조금 준비가 된 사람이라고 한다면, 저를 객관적으로 볼 때 느끼는 바이지만, 관용의 포즈만 취할 뿐이지 실제로는 관용적이지 못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주의 재림이라는 신앙의 중심에 들어가서 관용을 사람들에게 보이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가 신앙의 토대로 삼고 있는 재림 문제를 직면해서 그 영성의 중심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서만 우리에게 익숙한 세상이 전혀 새롭게 보일 것입니다.
재림 공동체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해 봅시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주는 헬라어 퀴리오스의 번역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4절의 그 ‘주’도 퀴리오스의 번역입니다. 하인이 주인을 가리킬 때, 로마 신민이 황제를 가리킬 때 ‘퀴리오스’라고 합니다. 생사여탈권을 가진 이가 바로 퀴리오스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그 단어를 예수님에게 붙였습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은 예수님이 가까이 오셨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이상한 생각이 들 겁니다. 2천 년 전에 가까이 오셨다는 예수님이 지금까지 오지 않으셨습니다. 백년, 이백년도 아니고 2천년 동안이나 재림이 지연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초기 기독교인들은 실제로 자신들이 생존해 있을 동안에 예수님이 재림하실지 모른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이 곧 오신다면 재산도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일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면, 즉 내일 우리의 생명이 완성된다면 학교에 갈 필요도 없고, 장사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도신경에도 예수님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예수 재림은 기독교 신앙의 토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은 계속 지체되었습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두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다시 오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했든지, 아니면 예수님의 재림이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이미 일어났든지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의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하십니까?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빌립보서의 진술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예수님의 말씀(막 1:15)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근거해서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셨습니다. 병든 사람을 고치기도 하셨고, 사죄를 선포하셨고, 안식일과 성전을 전혀 새롭게 해석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 의가 곧 이뤄질 것이라고 확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님의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처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라 오히려 악의 통치가 기승을 부린 것입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의 소명이 파탄 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생각을 뛰어넘어 실현되었습니다. 부활이 그것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이 ‘임박했다.’고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라고, 또는 부활의 주님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믿는다는 말은 곧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근거해서 볼 때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본문 말씀은 부활 생명이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이 가까이 온 것만이 아니라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지금의 생명은 여전히 불완전합니다. 이 불완전한 생명 안에 절대적 생명인 부활 생명이 은폐의 방식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확 드러나는 순간이 종말입니다. 그때까지는 숨어 있습니다. 애벌레 안에 나비가 숨어 있듯이 말입니다. 숨어 있는 그 부활생명을 지금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 경험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약속을 희망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것을 경험한 사람은 세상의 삶에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쫓기지 않습니다.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관용을 베풉니다.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봅시다. 우리 교회 교우들은 종말론적인 희망 가운데서 서로에게 관용으로 대하고 있을까요? 잊지 마십시오. 주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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