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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광야에서 들려오는 소리 (사 40:1–11 , 막 1:1–8)

2025년 12월 7일 예배 영상 https://www.youtube.com/live/Bu2pI6OmYms?si=XxW5R5oEhouN7oYu

▣ 들어가는 말

- 잃어버린 소리를 찾아서

“그는 울타리 곁을 지나다 갓 핀 수선화 한 송이를 꺾었다. 그러고는 한동안 그 꽃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성이 차지 않는다는 듯이. 수선화를 생전 처음으로 보는 사람처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눈을 감고 냄새를 맡더니 한숨까지 쉬었다. 그는 꽃을 내게 건네 주었다. ‘두목, 돌과 비와 꽃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부르고 있는지도, 우리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일 거예요. 두목, 언제면 우리 귀가 뚫릴까요! 언제면 우리가 팔을 벌리고 만물(돌, 비, 꽃 그리고 사람들)을 안을 수 있을까요? 두목, 어떻게 생각해요? 당신이 읽은 책에는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장면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모두 그들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고, 그 언어로 우리를 향해 손짓하는데,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수많은 언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정작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세계 사이에, 사람과 신 사이의 진정한 소통은 단절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6-8) 이사야에 등장하는 이 구절은 어쩌면 바로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말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언제 우리는 서로에게 온 마음과 영혼을 열어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모든 것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을까요? 시설에서 장애 가진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분노와 고통과 미움과 안타까움과 깊은 무기력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의 삶과 영혼을 애타는 마음으로 바라보아도, 교사의 마음은 아이에게 가 닿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절감하게 됩니다. ‘그들의 언어를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언어도 서로에게 닿지를 못하는데, 우리는 어떻게 자연 사물의 언어, 심지어 신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왜 그 소리, 언어를 잃어버리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아마 우리 안에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해야 할 일들은 끝없이 쌓여 있고, 해야만 한다고 믿는 의무들은 우리를 한순간도 쉬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운 욕망의 목소리들—더 많이 가지고 싶고, 더 높아지고 싶고, 더 인정받고 싶고, 누구에게 뒤처지지 말아야 한다는 불안한 소리가 끊임없이 우리 영혼을 뒤흔듭니다. 여기에 세상이 쏟아내는 수많은 자극이 더해지지요. 귀를 쉬게 하지 않는 소음들, 우리의 관심을 훔치는 광고들, 잠시도 고요를 허락하지 않는 수많은 화면, 볼거리와 자극 거리가 넘쳐나면서 우리의 마음은 점점 산만해지고 분주해집니다. 그러다 보면 정작 귀 기울여야 할 소리 : 속삭이는 미세한 신의 목소리, 우리를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의 소리, 이름 모를 들풀들의 미소,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는 타인의 눈, 살며시 잡아주는 손길의 따스함, 우리 영혼의 미세한 떨림. 이 모든 것이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고, 너무 쉽게 묻혀버립니다. 우리가 잊어버린 것은 일상 속 사소한 일정이나 약속 따위가 아니라, 우리 존재의 중심에서 울리는 가장 본질적인 소리라는 사실을 대림절은 우리에게 다시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광야의 소리’를 잃어버렸습니다.

▣ 광야에서 시작되는 위로

- 위로하라, 위로하라

이사야 40장은 전체 이사야서의 전환점입니다. 39장까지가 심판의 메시지라면, 40장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위로의 책(Consolation)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제2이사야”라 부릅니다. 이사야 40장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역사적·정치적 광야를 통과하는 순간을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40:1) 그들의 모든 기반이 붕괴하고, 존재가 흔들리고, 정체성이 무너져 버린 그곳에서 하나님은 “위로하라, 위로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위로’는 단순한 정서적 치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행위가 지금 시작된다는 존재론적 선언입니다. 하이데거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 생활 속에서 ‘세상-내-존재’가 지탱하던 모든 일상적 의의를 상실했습니다. 그들의 세계는 해체되었고, 본래적 질문과 실존의 바닥만 남았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사40:3)

왜 ‘광야’일까요? 들뢰즈의 철학에 따르면, 광야는 모든 기존 질서와 정체성이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되는 자리입니다. 바벨론이라는 체제가 해체되고, 이스라엘이 의지하던 모든 상징적 질서가 무너지고, 그 틈 사이에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존재적 공백. 하나님은 바로 그 공백 속에서 새로운 질서, 새로운 길을 여십니다. 레비나스적 관점으로 보면, 광야는 ‘타자’의 목소리가 가장 선명하게 들리는 자리입니다. 도시의 소란과 우상의 말들이 사라진 자리에서만 하나님이라는 근원적 타자의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광야에서만 시작됩니다. 새로운 세계는 모든 게 무너진 자리에서 열리는 것이지요. 나를 가득 채운 욕망의 소리가 고요히 잦아들 때, 타인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40:3)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מדבר)”인데, ‘말하다’를 뜻하는 동사 “다바르(דבר)”와 같은 어근입니다. 즉 광야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자리라는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광야는 생존 불가능한 곳이자, 동시에 하나님이 가장 선명하게 개입하시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신을 만나기 위해 사람들은 광야로 나아가곤 했지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다시 광야에서 시작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광야에서 무엇을 준비하라는 것일까요? ‘예비하다’ ‘준비하다’의 히브리어 “페누(פנו)”는 ‘비우다, 치우다’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즉 준비는 무엇을 더하는 행위가 아니라 빼는 행위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염려를 털어내고, 삶의 소란을 정리하는 것이 바로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지요.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40:4) 이사야의 이 선언은 단지 도로를 정비하는 비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계를 다시 구성하시는 시적, 존재론적 언어입니다. 낮아진 자는 높아지고 굽은 것은 곧게 되고 깨어진 관계는 회복되고 불의한 구조가 바로잡히며 고통받는 존재는 새로 일어납니다. 이는 아감벤이 말한 카이로스(Kairos)—임계적 시간—의 도래입니다. 즉, 하나님이 개입하여 역사가 새롭게 전환되는 시간. 광야는 그 임계 시간이 열리는 장소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40:8) 광야에서 인간의 연약함—하이데거가 말한 유한성(finitude)—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유한성을 직면할 때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는 선언이 진정한 위로가 됩니다. 광야는 인간의 목소리가 죽는 자리이자, 하나님의 말씀이 울리는 자리입니다.

 

▣ 왜 광야인가?

- 복음의 시작

마가는 복음서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여기서 ‘시작’(ἀρχή)은 단순한 연대기적 출발점이 아니라, 기존 시간 질서가 중단되고 ‘다른 시간의 문’이 열리는 임계적 시점(kairos)을 뜻합니다. 대림절이 바로 그러합니다. 세속적 시간 안에서 살지만, 그 시간 속으로 하나님의 시간이 스며들고, 이미 오셨으나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주님의 시간이 침투해 들어오는 ‘문턱의 계절’입니다. 마가는 바로 이 “임계적 시간의 도래”를 복음의 시작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 광야

마가는 복음의 시작을 성전이나 예루살렘 중심부가 아닌 ‘광야’에서 시작합니다. 광야는 인간의 질서가 멈추는 자리이자, 새로운 질서가 출현하는 임계 공간(threshold)입니다. 문명과 비문명의 경계, 권력과 비권력의 경계, 종교 체계 내부와 외부의 경계, 인간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자리에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는 자리이지요.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현대 정치철학·신학·언어철학·존재론을 가로지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이탈리아 철학자입니다. 그의 언어로 말하면 광야는 “어떤 것이 끝나고 동시에 다른 것이 시작되는 장소” 즉, 시간과 공간이 흔들리고 재정의되는 전환 지대(liminal space)입니다. 대림절은 우리에게 이 광야를 다시 불러냅니다. 가득 찬 도시의 소음 속에서 들리지 않던 하나님의 숨결이 세상의 ‘바깥’에서 새로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 말씀(Logos)이 아니라 소리(φωνή)다!

마가는 이 임계의 공간에 등장한 세례 요한을 ‘소리(φωνή)’라고 부릅니다. 요한은 말씀이 아닙니다. 그는 실체가 아니라 실체의 도래를 알리는 전조(前兆), 진동, 울림입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막 1:3) 소리(phonē)는 의미의 운반자이지 의미 자체가 아니듯, 요한은 메시아를 가리키지만, 메시아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는 문턱에 서 있는 존재,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서성이는 자, 오실 분의 발자국 소리를 미리 울려주는 진동, 나타나기 위해 사라져야 하는 울림입니다. 대림절은 바로 이런 ‘소리의 시간’입니다.

 

- 요한의 외침

요한의 외침은 도덕적 훈계나 단순한 회개의 요청이 아닙니다. 그의 외침은 시간을 뒤흔드는 사건(event)입니다. 세례 요한의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로마 제국의 시간, 헤롯 왕조의 시간, 성전 체계의 시간이 균열을 맞습니다. “주의 길을 준비하라”라는 선언은 세상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이 도래하고 있음을 알리는 카이로스적 침입입니다. 대림절의 본질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반복되는 달력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이 열리는 문턱 위를 걷고 있습니다. 요한의 소리는 그 문이 열렸음을 알리는 울림입니다.

요한의 세례 역시, 광야에서 베풀어집니다. 권력의 중심이 아닌 주변부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그의 세례는 성전 제도 밖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성전의 물이 아닌, 요단강의 물. 제사장들의 손이 아닌, 광야 예언자의 손. 체제 내부가 아닌, 체제와 체제 사이의 빈 공간. 아감벤은 이런 자리를 정치적·신학적 창조가 발생하는 임계 지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나라는 늘 중심에서가 아니라, 경계선에서 시작됩니다. 대림절의 하나님도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서 오십니다. 말구유에서, 낮은 곳에서, 소리와 울림처럼 겸손하게 오십니다.

 

▣ 우리의 광야

-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광야’란 무엇인가?

광야는 단지 고대 이스라엘의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영적·실존적 임계 공간입니다. 아감벤의 시각으로 보면, 광야는 중심과 주변의 경계—‘문턱의 자리’입니다. 현대인의 삶에서 광야는 소음과 정보로 가득 찬 일상에서 잠시 떨어져 나온 자리, 사회적·종교적 체제에로부터 벗어난 자리, 익숙한 것이 해체되고 새로운 의미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자리입니다. 광야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곳’이 아니라 두 세계가 겹치는 임계 공간(threshold space)입니다. 예를 들면, 직업 상실의 순간, 인간관계의 붕괴, 기대의 좌절, 팬데믹, 정체성의 흔들림, 내적 공허. 이런 자리들은 모두 광야의 현대적 형태입니다.

 

-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아감벤이 말하는 메시아적 시간은 종말이 먼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으로 스며드는 ‘다른 시간’입니다. 현대인이 광야에 서게 되는 순간, 그는 이런 ‘임계의 시간’ 속에 들어갑니다. 과거의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새로운 길은 아직 보이지 않으며 바로 그 사이에서 하나님의 시간이 침투합니다. 이때 그리스도인은 일상의 시간(chronos)이 멈추고 하나님의 시간(kairos)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광야는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는 문턱입니다.

 

- 그 속에서 어떻게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들었던 소리는 ‘도래하는 시간’의 울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먼저, 소음의 중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익숙한 것의 과잉 속에서는 들리지 않습니다. 욕망의 과잉, 정보의 과잉, 계획의 과잉, 종교적 바쁨의 과잉 속에서 신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지요. 광야는 비워진 공간이기에, 비로소 말씀이 울릴 여백이 생깁니다. 둘째, 균열 속에서 들립니다. 아감벤은 ‘예외 상태’ 속에서 평소 들리지 않던 근원적 소리가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삶에서 일어난 균열—아픔, 실패, 불확실함, 상실—은 새로운 진동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줍니다. 하나님의 소리는 항상 문턱에서 들리는 것입니다. 안정의 중심이 아니라 불안의 주변에서 울립니다. 셋째, 자아가 움츠러든 틈새에서 들립니다. 요한이 ‘소리’로 존재했던 이유는 ‘말씀’을 위한 공간을 내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도 자아의 확신, 통제 욕구, 인정 욕망이 약해지는 틈, 그곳에서 말씀이 스며듭니다.

 

▣ 나가는 말

- 어떻게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될 수 있는가?

요한은 임계의 존재였습니다. 그는 실체가 아니었으며, 실체가 도래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소리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그 소리가 될 수 있을까요? 1. 자기중심의 침묵을 깨뜨리는 작은 진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메시지가 되려 하기보다, 말씀을 통과시키는 울림체(resonator)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중요해지려 하면 소리가 막히고 내가 낮아지면 소리가 멀리 퍼집니다. 요한의 말처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2. 문턱에 선 사람들 곁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광야의 소리는 중심 권력의 언어가 아니라 주변부의 울음, 외로운 자의 한숨, 약자의 미세한 떨림과 함께 공명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의 “소리됨”은 슬픈 자들 곁에서 함께 서고, 낙심한 자들의 눈높이에 서고, 경계에서 밀려난 사람들과 함께 걸을 때, 비로소 신적 울림을 품게 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란 급진적 낙관도, 저급한 위로도 아닙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시간을 살아내고, 말하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의를 실천하는 작은 행동, 약자를 위한 연대, 침묵 속의 기도, 고통의 자리에서 손을 잡아주는 행위, 이 모든 것이 “주의 길을 준비하는 소리”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문턱에서 사라져야 하는 소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한은 등장과 동시에 퇴장합니다. 그의 존재 가치는 그의 ‘사라짐’ 속에서 완성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의 소리됨도 자기 과시가 아니라 말씀을 위한 공간을 열어주는 섬김의 행위입니다. 소리가 사라질 때 말씀이 남습니다. 우리가 작아질 때 하나님이 크게 들립니다. 광야에서 시작된 그 외치는 소리가 우리 삶을 새롭게 하고, 우리 공동체를 새롭게 하며, 이 땅을 새롭게 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주님,

광야 같은 우리의 인생에

당신의 작은 목소리를 들려주소서.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소란한 세상 속에서

당신의 은혜의 길을 준비하게 하소서.

작은 헌신과 작은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참된 대림의 백성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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