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만나를 만나다
출 16:2-15, 창조절 셋째 주일, 2014년 9월21일
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6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7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8 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9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10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오늘 제1독서인 출 16:2-15절에는 그 유명한 만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내용을 간략히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한 뒤에 미디안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 과정이 흥미진진합니다. 이집트의 바로에게 열 가지 재앙이 내리고, 모세가 지팡이를 홍해 위로 내밀자 바다가 갈라졌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사히 건넌 다음 중무장한 채 뒤따라오던 바로의 기마병들이 물속에 수장되는 대목에서는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분으로만 세상을 살 수는 없습니다. 매일 홍해가 갈라지는 것도 아니고, 매일 악이 괴멸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신바람이 나는 일이라도 지나가면 곧 시들해집니다. 남는 것은 일상의 현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출애굽의 흥분이 가라앉자 일상적인 문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식수부터 시작해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전까지 살던 이집트에서의 삶과 전혀 달랐습니다. 고대 이집트는 나일강 유역을 중심으로 해서 넓은 경작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농산물을 지중해의 여러 나라에 팔아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부를 바탕으로 고대 이집트는 큰 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날 미국에 이민 가서 사는 한인 교포들처럼 이집트에서 비록 소수민족으로 눈치를 받기는 했지만 먹고사는 문제에서는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를 따라서 이집트를 나와 광야생활을 시작하고 보니 먹고사는 게 막막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이집트를 떠난 게 후회막급이었을 겁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면서 출 16: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들의 말이 적나라합니다. 지금 먹을거리가 다 떨어져가니 어떻게 해서라도 먹을거리를 찾아보자 거나, 이런 어려움을 헤쳐 나갈 복안이 모세에게 있는지 슬며시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자에 대한 예의도 없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신앙적인 체면도 없이 배고파 못살겠으니 당신들이 책임지라고 데모를 하는 중입니다.
이때 모세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답답했을 겁니다. 광야를 횡단하려면 앞으로 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광야생활 초장부터 서로 원망하다가는 가나안은커녕 광야에서 모두 지리멸렬의 길을 걸을지도 모릅니다. 현실이 어렵다 하더라도 광야만 건너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실의 어려움을 참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백성 사이의 간극이 깊습니다. 모세는 가나안을 향한 희망과 열망으로 영혼이 뜨거워서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현실에 더 민감하기 때문에 그런 현실이 해결되지 않으면 모세를 환호하던 손으로 돌을 던질 겁니다.
이런 상황을 모세가 어떻게 뚫고 나가야만 했을까요? 배가 고파도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고 무조건 ‘앞으로 전진!’ 하고 외칠 수 없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대다수는 일단 주린 배를 채워야 합니다. 그것도 배불리 채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과 고대 이스라엘의 모습이 다를 게 없습니다. 어쨌든지 모세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를 실제로 채워주든지, 아니면 더 큰 어려움, 예를 들어 전염병이 돌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겁니다. 다른 것으로는 이집트 고기 가마 곁을 그리워하는 백성들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배를 채워주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게 바로 만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침마다 광야에 나가서 만나를 수확해서 하루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출 16장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민 11장에도 만나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에서는 만나보다는 메추라기가 중심 주제로 나옵니다. 민수기 전승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만나만 먹고 살게 되자 체력이 저하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기를 먹지 못하는 걸 모세에게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메추라기를 보내주셨다고 합니다. 메추라기는 계절풍을 타고 미디안 광야에 몰려 왔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잡아서 영양을 보충한 것 같습니다. 이에 반해서 오늘 설교 본문인 출 16장은 메추라기 이야기를 짧게 다루고 주로 만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침에 이슬이 마른 뒤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깔렸습니다. 그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로 묻기를 ‘이것이 무엇이냐?’(출 16:14)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여호와께서 주신 양식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만나는 원래 가나안 지역의 사투리인 ‘만’이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그 뜻은 ‘무엇’입니다. 무엇이라는 단어가 만나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만나는 요즘에도 시나이 반도 내륙 지방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그걸 지금도 ‘만’이라고 부릅니다. 만나는 사막에서 자라는 관목 잎사귀에 연지벌레가 붙어서 만들어내는 이슬 모양의 형성물이라고 합니다. 그게 땅에 떨어졌다가 밤이 되어 기온이 떨어지면 딱딱하게 굳습니다. 그걸 사람들이 주워 바구니 등에 담을 수 있습니다. 다만 녹는 온도가 낮기 때문에 햇빛이 들기 전에 거둬들여야 합니다. 맛도 달콤해서 지금도 식량이 부족한 부족들이 그걸 즉석 먹을거리로 이용한다고 합니다. 모세는 원래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을 치면서 살았기 때문에 만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배고파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불현 듯 만나를 기억해냈겠지요. 그걸 여호와께서 주신 양식이라고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은 자연현상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깨닫습니다. 모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몇몇 질문이 가능합니다. 만나가 하나님이 행하신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사건이 아니라 자연 현상에 불과하다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양식이라는 성경의 말은 틀린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는 자연현상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아는 게 신앙의 본질입니다. 또 다른 질문은 이렇습니다. 출 16:35절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당시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가 수백만 명이 됩니다. 그게 과장된 숫자라고 하더라도 수십만 명은 됩니다. 그런 숫자의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생기는 만나로만 충분히 먹으면서 사십년을 버틸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약간의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만 먹은 게 아닙니다. 다른 먹을거리도 있었습니다. 광야의 토착민들에게서 먹을거리를 구입할 수도 있었고,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을 수 있었습니다. 성서기자들은 그런 것들을 다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먹을거리가 있었지만 만나를 기본적인 먹을거리로 삼았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이 내려주신 특별한 은총으로 여긴 겁니다. 이런 신앙은 이상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 대대로 만나 이야기를 후손들에게 전해주었고, 거기서 감동받았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좀더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독자라고 한다면 뭔가 꺼림칙한 대목을 만나게 될 겁니다. 만나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를 출애굽기 기자는 아주 정확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진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불만, 원망이 그 이유입니다. 본문 2-15절에서 여섯 번이나 원망이라는 말이 언급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출애굽기 기자의 신학적 의도가 들어있는 게 분명합니다. 8절 한 구절만 읽겠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 사건을 암시하면서 한 이야기입니다.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만나 이야기는 하나님의 은총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불신앙에 대한 경고입니다.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은총에 휩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어려움으로 인해서 그것을 망각해버리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은총은 이스라엘을 책임져 주신다는 약속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출애굽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은 광야로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존을 당연히 지키십니다. 이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들이 만나를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셨을 겁니다. 만나가 아니라면 또 다른 방식으로 그들을 지키셨겠지요.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생존을 지키신다는 사실을 놓쳤다는 데에 있습니다. 출애굽기 기자는 그 사실을 만나 이야기를 전하면서 반복했습니다. 잊지 말라고,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적인 원망은 광야 시대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서 계속되었습니다. 구약성경 곳곳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원망은 기본적으로 생존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두려움은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런 두려움에 근거한 종교현상이 바알신앙입니다. 바알은 풍요의 신입니다. 풍년과 다산을 보장해주는 신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바알숭배를 여호와 신앙과 가장 크게 대립적인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따르던 이 바알신앙은 모든 인류의 거룩한 로망입니다. 오늘의 자본주의가 바로 이런 바알신앙입니다. ‘부자 되세요!’ 하는 인사를 나눌 정도로 부에 집중하는 오늘 현대인들은 모두 바알숭배자들입니다. 물론 구약성경에도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시고, 후손도 많이 늘려주시고, 재산도 늘려주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먹고 살고 아기를 낳아야 하니, 하나님이 그런 걸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양자는 완전히 다릅니다. 핵심적인 차이는 다음입니다. 바알신앙에서는 물질적인 풍요 자체가 목적이라고 한다면 하나님 신앙에서는 하나님 자체가 목적입니다. 바알신앙에서는 가난과 굶주림이 저주이지만, 하나님 신앙에서는 오히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바알숭배의 유혹에 빠졌습니다.
저는 먹고 사는 문제가 별 거 아니니 그런 것을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잘 믿으면 된다고, 그게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인생살이가 잘 풀린 사람들은 그게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정말 절박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기운 빠지는 소리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현실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이 해결은 한두 사람이 노력해서 되지는 않습니다. 사회전체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경제민주화는 바로 이런 노력의 일환입니다. 연봉의 차이를 줄여 나가고, 절대 빈곤층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들을 찾아야 합니다.
그 해결책으로 오늘 제3독서(마 20:1-16)에 나오는 포도원주인 이야기가 맞춤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열 시간 일한 사람이 원망하는데도 불구하고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일당을 지급했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를 줄여나가는 노력들도 필요합니다. 인간다운 품위를 가능하게 하는 복지도 더 확충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생존에 대한 두려움만은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일은 만나를 서로 골고루, 그리고 공평하게 나눠먹는 일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면 더 이상 원망하는 일도, 두려워하는 일도 없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면서 먹을거리 문제를 해결했다 해서 더 이상 원망하지 않고 살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은 반복해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바알숭배에 떨어졌습니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모습니다. 사람은 나쁜 조건만이 아니라 좋은 조건에서도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그게 심해지면 원망합니다. 오늘 우리를 보십시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롭게 살아가는데도 걱정이 많고 원망도 많습니다. 그걸 일일이 거론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일면 다 타당한 걱정거리입니다. 개중에는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그들은 다른 이유로 이웃과 세상을 원망합니다. 오늘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 이런 원망이 얼마나 많은지 다 잘 아실 겁니다. 이런 것은 근원적으로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런 두려움이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죄와 두려움은 한 쌍입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분열된 인간은 그 어떤 방식으로도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신약성서기자들은 만나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요 6장에는 오병이어 이후에 예수님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의 대화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광야의 만나 사건을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자신들의 조상들이 모세를 통해서 만나를 먹었다고 말입니다. 만나 사건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표적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하늘로부터 온 게 아니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긴 대화 끝에 48-51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만나는 광야의 음식으로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아침마다 나가서 모아오는 걸 귀찮아하는 사람을 제외하면 누구나 하루치의 만나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나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피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만나는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만 일시적으로 필요한 먹을거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정적으로 우리의 목숨을 연장하는 데 필요한 만나에만 목숨을 걸고 살 수는 없습니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의 떡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생명의 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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