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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1:15-23, 창조절 열둘째 주일, 20141123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소마-교회론

교회란 무엇일까요? 교회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교회는 인류 역사에서 언제까지 지속될까요? 교회에 나와야만 구원받을까요? 여러분은 오늘 왜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이런 질문들은 이 자리에서 한두 마디로 대답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기독교 역사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곧 교회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도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질문하고, 나름으로 대답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읽은 엡 1:15-23절도 그런 노력의 하나입니다. 22, 23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본문이 말하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그의 몸(소마)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를 가리켜 몸-교회론이라고 합니다. 이 개념을 이해하려면 머리와 몸의 관계를 먼서 생각해야 합니다. 머리와 몸은 완전하게 결속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머리와 몸을 분리하면 사람이 죽듯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되면 죽습니다.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따라서 교회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부단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그런 연결을 확인하기가 사실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겉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창한 십자가 첨탑이 세워진 교회당을 소유한 교회라고 해서 그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게 보장되는 건 아닙니다. 성가대와 장로들과 여러 제직들이 조직되어있고, 수많은 종교 활동이 벌어진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하는 일들을 많이 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이고, 권력에 집착하고, 민중을 호도하고, 성직을 매매하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일종의 이익집단으로 변질된 적이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어떻게 해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요? 이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완전한 해결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지금 교회는 종말이 오기 전 시대에 순례자로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아직 완전한 자리를 잡지 못했으며, 수많은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그게 보이는 교회의 현실 모습입니다. 보이지 않으면서 이미 승리한 영광의 교회에 기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전투하면서 십자가의 고난을 짊어지고 가야 할 보이는 교회의 숙명입니다.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교회는 전투 중에 있기에 항상 불안합니다. 부활생명을 약속으로 받았지만 교회가 견뎌내야 할 현실 상황은 척박합니다. 교회 밖의 조건만이 아니라 교회 자체도 여전히 수많은 상처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는 밀밭과 비슷합니다.

 

고린도전서에도 몸-교회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전 12:27절은 이렇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고린도교회에 속한 신자들 사이에서 분쟁이 크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분리될 정도의 심한 분쟁입니다. 어떤 이들은 바울파, 어떤 이들은 아볼로파, 어떤 이들은 게바파, 또 그리스도파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지체들이 하나의 몸이라는 사실을 거기서 설파했습니다. 손과 발이 서로 역할이 다르지만 하나의 몸이라는 겁니다. 바울의 이런 이야기를 듣고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정신을 차렸는지는 우리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아마 완전하게 해결은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 뒤의 기독교 역사를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부부도 그렇고, 부모와 자식 사이도 그렇습니다. 교인들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각자 삶의 호흡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교회를 너무 이상적인 공동체로 생각하면 실망하고, 또 실수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우리는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반복해서 물어야합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면 교회는 늘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이런 말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착각할 수 있습니다. 목사의 말에 순종하라는 것일까요? 교회에서 하는 일에 무조건 동의하라는 말일까요? 교회법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이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 것인지에 대한 확실하고 직접적인 증거를 손에 쥘 수는 없습니다. 간접적인 대답에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배당해야 할 대상이 누군지,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지배당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문제도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본문 21, 22a절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신 일에 대한 설명입니다.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여기에 열거된 통치, 권세, 능력, 주권, 이름은 지배의 속성이 있습니다. 당시의 로마 황제에게 주어진 권력에 해당됩니다. 황제는 만인지상의 자리입니다. 제국의 모든 이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오늘의 대통령도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습니다. 한해 예산인 3백 몇 십 조원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검찰총장을 비롯해서 여러 사정 기관의 장을 임명합니다. 작은 도시의 시장들도 상당한 권력을 행사합니다. 이런 것들이 세상을 실제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우리는 다 그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기자는 통치, 권세, 능력, 주권,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선포합니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인 모두가 고백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어떤 근거가 있을까요? 망상은 아닌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권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해야만 우리의 신앙에 근거가 확실해지고 성숙해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양 극단으로 빠집니다. 하나는 열광주의입니다. 이유와 근거를 무시하고 무조건 믿으면 된다는 태도가 그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냉소주의입니다. 에베소서 기자는 이런 극단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합리적인 신앙을 가르칩니다. 18절에서 그는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알려면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눈으로 다음의 사실을 보라고 말합니다. 20절입니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이어서 위에서 언급한 모든 통치와 권세 등등을 거론했습니다. 통치와 권세가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사실의 근거는 예수의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심이라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또 부활과 승천에 대한 이야기냐?’ 하고 지루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 하나의 사실로부터 시작했고, 신약성서는 하나의 사실을 변증하고 있기 때문에 저도 그것을 반복해서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활과 승천은 우리가 한 번 전해들은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이 구구단을 외우는 것처럼 무조건 외워야 할 공식도 아닙니다. 그것은 종말에 가서야 다 밝혀질 궁극적인 질문이자 대답입니다. 물리학도 그렇습니다. 요즘 <인터스텔라>라는 영화가 인기라고 합니다. 우주의 블랙홀, 웜홀 개념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리의 깊이로 들어가야만 그게 이해가 됩니다. 물리의 끝은 없어서 들어간 것만큼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부활과 승천 이야기를 늘 새롭게 열린 진리의 태도로 대해야 합니다.

 

통치, 권세, 능력, 주권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실제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에 의해서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고 끝나기도 합니다. 요즘 한창 갑론을박 하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누리과정 재정지원도 그들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실업수당도 그들이 처리합니다. 우리의 운명이 완전히 그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권세와 능력 앞에서 주눅이 듭니다. 거꾸로 그런 권력을 손에 쥔 사람들은 허세를 부리고 교만해집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만약 그런 힘에 의해서 지배받는 삶만을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모든 권력보다 우월하다는 성서말씀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이 대목에서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 권력은 우리의 생명을 완성시키지 못합니다. 그것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연봉을 늘리고, 취미생활을 다양하게 할 수 있게 하고, 의료보험을 비롯해서 여러 종류의 보험과 복지생활을 향상시키는 것뿐입니다. 이런 것들이 실제로 중요하기는 하되 인간 생명의 완성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생명의 완성이라는 말이 너무 거창하게 들리면 만족이라는 말로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혹은 참된 안식과 평화라는 말로 대치해도 됩니다. 저는 연봉이 늘어났다고 해서 삶이 만족스러워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별로 못 봤습니다. 당장은 뭔가 호기심을 자극시킬 수 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그런 것들은 평범해지고 맙니다. 모든 세상의 힘들이 다 그렇습니다. 이런 말이 비현실적인 것처럼 들립니까? 사람의 운명, 그리고 행복 여부는 결국 연봉으로 결정된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고 싶은 분들은 그렇게 살면 됩니다. 다만 연봉에 자신의 운명을 걸어두는 것처럼 어리석은 삶이 없다는 것만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 교우들을 비롯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생명의 완성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경험했습니다. 약간 다른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연봉을 늘린다거나, 교육을 많이 받는다거나, 출세한다거나, 심리적인 힐링을 받는다거나, 이러저런 엔터테인먼트에 심취하는 게 아니라 한 유대인 나사렛 출신 예수의 운명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생명 완성의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의 전통을 우리는 이어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여기 모여서 예배드리는 분들 중에서 이 사실을 부정하는 분들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실감이 가지 않는다는 분들은 제법 있을 겁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이 너무 멀게 느껴지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설교자의 한계를 절감합니다. 설교자는 그 사실을 선포할 뿐이지 실제로 느끼고 동의하게 하는 일은 성령의 일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깨워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게 앞에서 인용했던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에 해당되는 겁니다.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밝아지기를...

 

플레로마-교회론

오늘 설교의 제목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입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는 뜻입니다. 머리는 몸을 지배합니다. 몸은 머리의 지배를 받아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인 이유는 그에게 참된 통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우편자리를 통해서 생명이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앞의 설교 내용을 간단히 요약한 겁니다. 이제 마음의 눈을 성령께서 밝혀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모든 사실을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본문의 한 단어를 설명하겠습니다. 그 단어가 우리의 생각을 크게 확장시켜줄 것입니다. 23절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과 병행해서 또 하나의 사실을 언급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입니다. 그 구절을 다시 읽을 테니 들어보십시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충만은 헬라어 플레로마의 번역입니다. 플레로마는 영어로 fullness, completeness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루터는 그 단어를 Fülle라고 독역했는데, 의미는 영어와 비슷합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본문은 교회를 두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충만입니다. 이 구절이 말하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의 완성이며, 그것이 곧 교회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가 만물을 완성한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가 만물의 완성을 향해서 나간다는 사실입니다. 첫 번째 사실은 앞에서 어느 정도 답이 주어졌습니다. 만물은 스스로 자신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들은 세상에 나와서 살다가 죽습니다. 지구와 태양과 별들도 그런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이런 운명을 극복하셨습니다.

 

두 번째 사실이 중요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구원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공동체에 머무는 게 아니라 만물의 구원을 희망하고 기다리는 공동체로 자리매김 됩니다. 만물이 어떻게 완성되는지, 즉 구원받는지를 교회는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지켜내야 하고, 새롭게 해석해야 하고, 구원의 현실성(reality)들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개개 기독교인은 이 척박한 세상에서 먹고 살기가 바쁘기 때문에 만물의 구원에 대해서 생각하기 힘들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모두 위대한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거나, 교회를 개혁해나갈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최소한 예배에 충실하기만 하더라도 우리는 만물의 구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를 전하고 노래합니다. 만물이 완성될 종말에 대한 희망으로 성찬식을 거행하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서로 나눕니다. 기독교인의 예배와 기도와 찬송, 그리고 더 나아가 신자들 사이의 사귐(코이노니아)은 기본적으로 우주론적인 구원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런 공동체에 우리가 속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기쁘고 설렙니다. 그리고 자랑스럽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2천 년 전 에베소 교회가 지켜온 신앙고백의 한 대목을 읽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소마, 즉 몸이며,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플레로마, 즉 충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오늘 우리의 영적 관심이 그 본질에 집중되어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 교회가 그 본질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고 있을까요?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할 뿐만 아니라 같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로서 서로 격려하고, 또한 각자 노력합시다.

에베소서 1:15-23
https://youtu.be/bPZMK3ZW9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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