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타고 오십니다!
지난 주일은 부활절이었고, 오늘은 부활절 둘째 주일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부활주일부터 일곱 주간을 부활절기로 지켰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부활이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하다는 의미이겠지요. 매주일 예배를 드리는 주일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기독교의 모든 것은 곧 예수님의 부활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모든 성서도 역시 예수님의 부활에 집중됩니다. 모든 말씀이 부활만을 주제로 한다는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그것을 바탕에 놓는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계시록 1:4-8절 말씀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은 지금의 터키 서부지역에 있는 일곱 교회에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 일곱 교회는 에페소, 스미르나, 베르가모, 티아디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게이아입니다.(1:11) 그는 이들 교회에 이렇게 인사를 합니다.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그분과 그분의 옥좌 앞에 있는 일곱 영신께서, 그리고 진실한 증인이시며, 죽음으로부터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시며, 땅 위의 모든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은총과 평화를 내려주시기를 빕니다.”(4,5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세 가지 특징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실한 증인”이며, “죽음으로부터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며, “모든 왕들의 지배자”라고 말입니다.
1)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가르침, 그의 치유, 그의 십자가와 부활 등, 그의 삶과 운명 자체가 곧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에게서는 참된 하나님의 사랑이 발현되었습니다. 그에게서만 참된 생명이 나타났습니다. 그에게서만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바로 하나님의 유일한 증인입니다.
2)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증인이라는 사실의 가장 단적인 증거는 곧 부활 사건입니다. 부활은 곧 종말에 우리에게 완전히 알려지게 될 영원한 생명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한 분이시며, 이 세상에 생명이 가능하게 하신 분이십니다. 그 생명의 깊이가 바로 부활입니다.
3) 이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는 “땅 위의 모든 왕들의 지배자”이십니다. 이건 요한의 고백일 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왜 중요한지를 알려면 초기 공동체의 상황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이 집필되던 시기는 기독교가 로마 황제에 의해서 극심하게 박해를 받던 때였습니다. 다른 건 둘째 치고 황제숭배가 그들을 극심한 어려움에 빠지게 했습니다. 황제를 숭배하지 않으면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고, 심한 경우에는 순교까지 당할 정도였습니다.
황제숭배
요즘 우리는 신앙생활로 인해서 크게 박해받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은 늘 황제숭배를 요구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물질이기도 하고, 정치적 이데올로기이기도 하고, 또는 신앙적인 차원에서 포스트모던의 영지적 혼합주의, 즉 뉴에이지 류의 상대주의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런 것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또는 은밀하게 활동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기복주의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종교다원주의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수의 구원론적 토대를 희석시키는 것들이 바로 오늘의 황제숭배입니다.
밧모섬에 유배를 당한 요한이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왕들의 지배자라고 외친다는 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제 정신이 아니든지 전혀 새롭고 궁극적인 진리이든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땅 위의 모든 왕들의 지배자라는 요한의 고백은 옳은가요? 현실적으로만 본다면 세상은 황제숭배에 의해서 작동되는 게 분명합니다. 우리는 한미 FTA를 찜찜하게 생각하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장개방이라는 원리가 바로 세계를 지배하는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당에 우리는 예수가 지배자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나요. 어떤 사람들은 그걸 말장난이라고 생각할 것이며, 또는 현실과는 아무 상관없는 주장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우리는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지금 이 세상은 분명히 황제숭배 논리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어도 그것 때문에 출세를 한다거나 돈을 버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 건 처세술과 경쟁력으로 가능합니다. 신앙이 아무리 좋은 젊은 여자라고 해도 그것 때문에 멋진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 건 다른 재주를 필요로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모든 왕들의 지배자라는 요한의 고백은 틀린 건가요?
여러분, 요한이 이미 앞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부터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라고 고백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황제들의 방식으로 황제들을 굴복시키지 않습니다. 군사와 돈으로 그들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사실 아무 것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지난 인류 역사에 수많은 나라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을 뿐이지 궁극적인 승리자는 없습니다. 현재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군림하지만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아 또 새로운 강대국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황제숭배의 역사는 반복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경제와 군사의 힘에 의지하신 분이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생명의 근원이 되신 분이십니다. 요한은 바로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분만이 모든 왕들의 지배자가 되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에게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바란다고 기도했습니다.(6후) 이 단어도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 당시에 로마에서는 황제만 영광과 권세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황제들은 인간이 아니라 신에게만 돌릴 수 있는 그런 영광과 권세를 누렸습니다. 이제 요한은 황제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영광과 권세를 돌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황제는 이 세상의 힘을 통해서 폭력과 경쟁과 자기만족을 제공할 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생명을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만 진실로 영광과 권세를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 세상의 황제들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예수의 부활은 아직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춘향전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과거를 보러간 이몽룡에게서는 감감 무소식입니다. 춘향이는 수발을 들라는 원님의 말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가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원님의 힘을 하늘을 치솟을 듯하고, 춘향이는 무기력합니다. 이몽룡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 이야기의 결과를 알고 있는 우리는 그 상황이 별로 답답하지 않지만 춘향의 입장에서는 막막한 심정이었을지 모릅니다.
구름을 타고
초기 기독교인들의 상황도 이와 다를 게 없었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에게만 영광과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고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황제에게서 시달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한 가지의 희망으로 그 상황을 버텨냈습니다. 다시 오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이 그것입니다. 재림신앙은 부활 신앙과 똑같은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은 재림에서만 온전하게 실현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난 주일의 설교에서 우리가 확인했듯이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증인으로 세우신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경험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제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때가 바로 예수의 재림입니다.
요한은 그것을 다니엘과 스가랴의 예언을 빌려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며,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입니다. 땅 위에서는 모든 민족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7절)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신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구름은 도술을 부리는 손오공이 타고 다니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니요. 지금 요한은 마술이 무언지를 보여주려는 게 아닙니다. 고대인들에게 구름과 하늘은 생명의 은폐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신다는 이 말은 예수님이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생명과는 전혀 다른 생명으로 오신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은 황제들이 약속으로 주는 부국강병, 은퇴 후의 안락한 삶, 높은 연봉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유전공학을 통해서 미모와 건강을 유지하는 것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 하는 생명입니다. 사람들에게 시선 집중을 받는 것과는 다릅니다. 재림의 생명은 우리가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만 주어집니다. 구름을 타고 오듯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생명의 실체로 다시 오십니다.
요한은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2천 년 전에 일어났던 예수님의 부활은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나타났지만 이제 재림에 일어날 예수님의 부활생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명명백백하게 나타납니다. 그때에 우리는 모든 생명의 실체를 얼굴을 얼굴로 맞대어 보듯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잠정적이고 일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가지 우리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요한의 설명에 따르면 땅 위의 모든 민족이 재림의 주님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재림의 주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2천 년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들은 인식할 수 없었지만 이제 재림의 하실 주님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왜 가슴을 칠까요? 진리를 놓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겠지요. 그들은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훗날 주님이 재림할 때 땅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황제숭배와 율법주의에 갇혀 있던 그들은 전혀 다른 생명 사건 앞에서 기절초풍하게 될 것이다. 이런 충격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에게도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일어나게 될 생명의 완성이 우리의 모든 생각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나이, 아멘!
요한은 이런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나이, 아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표현은 성서에서 오직 여기에만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모든 것이 달려 있기 때문에 특별히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기독교 신앙은 이 땅 복지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모범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하지도 않습니다. 예수의 재림을 목표로 합니다. 이 말은 곧 이 세상의 모든 인간적 행위들은 부활의 완성인 재림 신앙 앞에서 상대화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어느 국가도 절대적이지 않고, 그 어떤 이념도, 혁명도, 체제도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 모든 것을 지양합니다. ‘나이 아멘’입니다.
앞에서 저는 춘향전 이야기를 잠시 했습니다. 옥에 갇혀 있는 춘향이에게 이몽룡이 반드시 자기를 찾아오리라는 희망이 있었을까요? 그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어려운 상황을 버텨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과거에 급제한 이몽룡은 춘향의 운명을 질적으로 새롭게 했습니다. 그네는 낭군이 반드시 다시 온다고 확신했습니다. ‘나이, 아멘’. 요한을 비롯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이렇게 기다렸으며, 지금도 우리도 그런 신앙으로 삽니다.
혹시 지금까지의 제 설교를 들으시고 조금 막연한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지금 중요한 건 돈을 벌어서 편안하게 사는 거지 예수님의 재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없습니까? 만약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바울이 고백했듯이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요한 시대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서 8절 말씀을 보충한 것 같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말이 인간적인 게 아니라 바로 알파요 오메가이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분이십니다. 시간을 초월하신다는 말은 곧 전능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우주 전체의 시간과 공간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서 이 세상에 생명을 완성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신앙으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의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볼 것입니다. 그들은 놀라운 충격에 빠질 겁니다. 우리도 부활생명의 온전한 실현 앞에서 기쁨과 환희에 휩싸일 것입니다. 나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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