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차별성과 보편성
로마서 10:5-15, 성령강림절후 8째 주일, 2011년 8월7일
그리스도교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고 대충 윤곽만 압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부활 승천하신 뒤에 그를 따르던 이들이 모여서 그의 말씀을 나누고 유월절 만찬을 나누면서 그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초기 구성원들입니다. 그들이 그런 모임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당장 그리스도교라는 하나의 종교가 역사에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 천천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당시 논란의 중심은 율법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경우로 말한다면 대한민국 법과 같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이 대한민국의 법을 인정해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교가 태동되던 당시에 율법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기준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제자들을 비롯해서 초기 그리스도교의 구원성들은 당연히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들은 대다수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은 어릴 때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절대기준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당연히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듯이 초기 그리스도교 사람들도 율법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 세계로 전파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율법과 상관없이 살던 이방인들도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예루살렘 종교회의를 다루고 있는 행 15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었습니다. 결론은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강요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문제가 그것으로 간단하게 해결된 게 아닙니다. 유대 그리스도교와 이방 그리스도교 사이에서 계속적으로 신학적인 갈등으로 남았습니다. 그런 기간이 상당히 오래 지속되다가 결국은 각각 제 갈 길로 갔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분열입니다. 다시 하나로 결합되지 못했습니다. 율법을 신봉하던 유대 그리스도교는 역사에서 사라졌고 그것을 거부하던 이방 그리스도교만 역사에 살아남았습니다. 그 후예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방 그리스도교의 신학적인 토대를 놓은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도 원래는 율법주의자였고,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정도로 유대교에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왜 율법의 길을 버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신학적 서술이 바로 로마서입니다. 그는 율법을 무조건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변증법적으로 극복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복음은 율법의 부정이 아니라 율법의 지양(止揚, Aufhebung)입니다. 바울의 이런 신학적 패러다임 쉬프트로 인해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 역사에 확고한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두 가지 의(義)
오늘 설교 본문인 롬 10:5-15절은 이것에 대한 신학적 해명입니다. 바울은 두 가지 의를 대립적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5절이 말하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이고, 다른 하나는 6절이 말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먼저 5절을 보십시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레위기 18:5절의 인용입니다. 율법을 실천하면 사람은 의로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율법의 기본입니다. 문제는 아무도 율법을 온전하게 실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이미 앞부분에서 충분히 해명했습니다. 율법을 실천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람이 죄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롬 3:9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인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롬 5:20) 율법은 사람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합니다. 양심을 자극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각성하는 일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거기서는 인간의 근본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실정법이 인간을 살리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법은 일종의 필요악입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두 번째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6절)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행위에 초점이 있다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존재에 초점이 있습니다. 인간 구원 문제에서 행위와 존재의 관계는 매우 미묘합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거나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거꾸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거나 나무가 좋아야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전자는 행위의 관점이고, 후자는 존재의 관점입니다. 행위가 없으면 존재를 인식할 수 없고, 존재가 없으면 행위의 근거가 실종됩니다. 이것을 믿음이 우선이냐 아니면 믿는 자답게 사는 윤리가 우선이냐의 관점으로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배제하지는 않지만, 어디에 무게의 중심을 두느냐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당연히 믿음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설명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믿음의 열매인 행위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반론이 만만치 않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을 올바른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느냐 하는 주장입니다. 그런 주장이 바로 율법정신입니다. 오늘의 실정법이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류 문명이 제시한 인간 구원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회를 가리켜 문명사회라고 합니다. 매우 세련되어 보입니다. 도덕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성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것은 결국 인간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바울이 비판하고 있는 율법주의의 한계를 그대로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은 윤리적으로 아무리 훈련을 받아도 실제로는 의로워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작년에는 옥한흠 목사님이 돌아가시더니 일주일 전에는 하용조 목사님이 훨씬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이분들은 홍정길, 이동원 목사님과 더불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4인방에 속한다고 합니다. 한국교회의 한 시대를 풍미하신 분들입니다. 이분들의 목회 특징은 평신도 교육입니다. 특히 제자훈련을 한국교회의 트렌드로 올려놓으신 옥한흠 목사님이 선두 주자였습니다. 약간 다른 성격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삶의 변화라는 동일한 관점으로 교회를 크게 키우신 분은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이십니다. 그분들은 평신도의 제자다운 삶과 성화를 일관되게 외치셨습니다. 그런 목회와 설교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혹독한 제자훈련을 받고 감칠맛 나는 성화 설교를 들었어도 신자들이 변하지 않더라는 것이 그분들의 한결같은 소회였습니다. 그동안 사람을 너무 나이브하게 대하신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변하지 않는 사람의 구원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계속해서 “당신, 똑바로 살아야 돼!” 하고 닦달해야 하나요?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방식의 신앙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충고를 듣는 걸 즐거워합니다.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이 태산과 같습니다. 지교회도 봉사해야 하고, 해외 선교도 해야 하고, 도덕적으로 똑바로 살아야 합니다. 의사였다가 나중에 가톨릭의 사제가 된 이태석 신부의 책이 계속해서 베스트셀러입니다. 그는 수단에서 한센씨병, 일명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을 위해서 살다가 대장암에 걸려 50세도 채 안 되는 나이에 죽었습니다.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될 만한 분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으면 하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삶이 복음인 것처럼 주장되면 문제가 일어납니다. 철저하게 율법적으로 살았던 바리새인의 삶이 그렇게 살아갈 수 없는 사람에게 영적으로 부담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특히 세리와 죄인들에게 그런 삶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오늘 그것을 요구합니다. 복음이 아니라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청중들은 그런 요구에 적당히 반응하면서 나름으로 종교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일종의 영적인 나르시시즘(자기연민)입니다.
차별 없는 하나님
바울이 말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전혀 다른 길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는 업적의(業績義)라고 한다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칭의(稱義)입니다. 업적의는 사람이 자신의 업적으로 통해서 의를 획득하는 길이라면 칭의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행하신 사건을 믿음으로 의를 획득하는 길입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아라, 도덕적으로 살아라, 양심적으로 살아라,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해서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하라고 해서 하는 동물이 아닙니다. 그런 방식으로 사람과 사람이 사는 세상이 바뀐다면 이 세상은 이미 천국으로 변했을 겁니다. 중심의 존재론적 변화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변화이고, 오늘 본문에 따르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구약에 근거해서 해명합니다. 오늘 본문에 구약성경이 유독 많이 인용됩니다. 레 18:5, 신 30:12, 신 30:14, 사 28:16, 욜 2:32, 사 52:7절이 그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가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 이미 구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내용을 바울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현실에서 맞춰서 해석했습니다. 그 현실은 유대인과 헬라인의 차별입니다. 본문 12절에서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율법을 기준으로 하면 차별이 있습니다만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는 것을 기준으로 하면 차별이 없습니다. 놀라운 시각입니다.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바울에 의해서 이제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율법이라는 걸림돌이 제거되었습니다. 율법주의는 가고 복음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구원의 차별성에서 구원의 보편성으로 방향이 달라진 것입니다. 차별적 구원에서 보편적 구원으로의 전환입니다. 이것이 가능해진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놓여 있습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의 바로 앞인 롬 10: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에 의해서 예수 복음의 정체성이 빛을 발하는 대목입니다.
바울의 이런 가르침은 혁명적입니다. 이렇게 바꿔 놓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주장으로,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주장으로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냐 하고 화를 낼 겁니다. 그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교회 안에 들어온 몇몇 소수의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가능하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도 율법을 폐기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율법을 빙자해서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사건이 유대인과 헬라인의 차별을 넘어서 모든 이들의 구원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는 이들은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도 포함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성실하게 산 사람도 포함되지만 성실하게 살지 못한 사람도 포함됩니다. 수능을 못 본 학생들도, 경쟁력이 없어서 최저 생활비도 못 버는 사람들도, 몸을 파는 여자들도, 우리나라에 돈 벌러 온 외국인 노동자들도, 공산주의자들도, 여러분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들도,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다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런 보편적 구원의 종말론적 현실을 기다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방식으로 차별이 고착화되는 오늘의 이 세상에서, 돈이 사람을 점점 더 심하게 차별하는 이 세상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까요? 우리 모두 각자가 감당해야 할 삶의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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