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3.2. 눅 4:16-21
고향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고향인 나사렛에 들어가셨을 때 일어난 유명한 일화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도 이 일화를 전하고 있는데, 내용적으로 보면 누가복음이 가장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안식일을 맞아 다른 경건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두루마리 한권을 받아들고 한 곳을 직접 읽으셨습니다. 그 말씀은 이사야 61:1,2(58:6)절입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예수님이 교회에서 설교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었는데, 회당장은 그곳에 모인 사람 중에 랍비가 있으면 그에게 그런 일을 부탁했습니다. 예수님도 랍비라는 칭호를 받으셨으니까 말씀을 전할 수 있었겠지요.
거기 모였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칭찬하고 설교에 탄복했다고 합니다.(눅 4:22) 그 장면이 상상이 갑니다. 고향을 떠났다가 오랜 만에 돌아온 청년이 감동적인 설교를 했으니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예수님이 이렇게 환영만 받았다면 이 이야기는 특별한 의미가 없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는 차원에서만 보았습니다. 요셉이 누굽니까? 자신들과 똑같은 이웃 사람입니다. 아주 평범한 목수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요셉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예수님도 특별한 인물이 아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친구가 랍비처럼 설교를 했다는 사실로 인해서 그들의 기분이 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예수님은 자기를 반대한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나쁠만한 이야기를 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엘리야와 사렙다 과부에 얽힌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엘리사와 이방인 나아만 장군 이야기입니다. 오랜 가뭄에 시달리던 사렙다 땅의 과부는 엘리사를 통해서 굶주림을 면했습니다. 이방인 나아만도 엘리사를 통해서 천형인 나병을 치료받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구약의 인물 중에서 초자연적 능력이 가장 뛰어난 인물들입니다. 그들에 관해서 유대인들은 아무런 시비를 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 당시 정통 유대인들에게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시당해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받았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절벽에서 떠밀어내려고 했을 정도였다고 하니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알만 합니다.
유대의 정통주의자들에게 무시당할만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읽으신 이사야서 본문에 이미 나왔습니다. 오늘 말씀 눅 4:18,19절을 읽겠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명단을 보십시오. 가난한 이, 묶인 사람, 눈먼 사람, 억눌린 사람이 그들입니다. 이들이 놓인 자리는 바로 예수님이 자신을 반대한 사람들과의 논쟁에서 언급하신 사렙다 과부 및 이방인 나아만의 자리와 똑같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삶에서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됩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오늘의 교회도 역시 이런 사명을 이어받습니다. 사람들이 무시하는 사회적 약자를 교회가 돕지 않으면 누가 돕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돕든 않든 상관없이 교회는 꾸준히 이런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런 입장을 사회과학적으로 접근한 신학운동이 지난 20세기 후반부에 강력하게 일어났었습니다. 로마 가톨릭을 중심으로 한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과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한국의 민중신학입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당파성(Parteichlichkeit)을 그 신학적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편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3세계의 민주화와 노동 해방을 위해서 전심전력으로 투쟁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하나님 나라 운동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 사회 구조를 개혁해나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당파성이 늘 옳은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과 그 안에 사는 모든 인간을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일부의 사람들만 편애하실 리가 있나요? 그냥 쉽게 이야기해서, 여기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가난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들을 수도 없다면, 그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도 어긋나는 일이겠지요. 어떤 사람이 눈이 멀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해방과 자유가 필요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 각성
오늘 본문이 유독 가난한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에 주님의 구원을 선포하게 하셨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 열거된 사람들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가난한 사람, 묶인 사람, 눈먼 사람, 억눌린 사람들의 특성은 무엇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영적 각성입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파수꾼을 보십시오. 그는 새벽이 동터오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와 같다는 예수님의 비유도 역시 이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바로 이런 간절한 기다림과 직결된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부자와 건강한 사람과 똑똑한 사람들의 특성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에게는 간절함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보존하는 것에만 신경을 쓸 뿐입니다. 앞의 사람들은 전적으로 새로운 삶으로 변화하기를 바라지만, 뒤의 사람들은 이미 자기에게 주어진 것, 소유한 것을 유지하기만을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또한 무엇으로 간절한지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현대인들의 특성은 이런 간절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이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이 돌아갑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아갑니다.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지금 세상이 얼마나 치열하게 돌아가는지 잘 몰라서 그런 말을 한다고 말입니다. 눈에 쌍심지를 키고 살아가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유치원 교육부터 대학교육, 삶의 현장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 순간도 한눈팔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잘 보십시오. 그것이 참된 변화를 향한 열망인지, 아니면 자신이 성취한 것을 확대 재생산하려는 욕망인지를 말입니다. 후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강렬해도 참된 간절함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전적으로 새로운 삶을 향한 강력한 요구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선포될 수 있습니다.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건강한 자가 아니라 눈먼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게 하셨다는 오늘 본문은 바로 위에서 말한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무엇을 강렬하게 열망하는 사람의 영적인 눈에만 하나님의 구원이 현실로 다가온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이건 그렇게 복잡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쉽게 생각해보십시오. 천사가 우리에게 와서 “당신은 이제 눈을 뜨게 될 것이오.” 말했다고 합시다. 우리처럼 눈이 멀쩡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결코 구원의 말씀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간절하게 필요한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 없으며, 따라서 그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은 귀찮습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은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복음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율법이 아니라 오직 믿음이라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 사실을 지켜내기 위해서 배수진을 치고 유대-기독교와 투쟁했습니다. 율법적인 업적이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하나님에게 인정받는다는 바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인격과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눈에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상과 연결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저의 경우를 말씀드리는 게 좋겠군요. 마지막 심판에서 목사를 판단하는 기준이 목회의 성과가 아니라 단순히 믿음뿐이라고 한다면, 누가 그걸 더 좋아하겠습니까? 큰 목회로 인해서 자랑거리가 많은 목사인지, 아니면 그런 게 전혀 없는 목사인지, 그 대답은 분명합니다. 가난한 사람, 눈먼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된다는 것은 자기의 소유와 업적이 전혀 없어서 다른 곳으로부터의 도움만을 절실하게 기다리는 사람만 하나님의 구원에 마음을 연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이 뜬구름 잡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분들을 위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야겠습니다. 저는 요즘 다비아 서울오프 모임 때문에 한 달에 한번 서울에 갑니다. 서울역 앞에는 노숙자들이 있습니다. 대낮에도 술 취한 이들이 있습니다. 저는 간혹 그분들을 보면서 참으로 자유를 만끽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저는 죽었다 깨도 그런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못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구원이 자유라고 한다면 저보다는 그분들이 구원에 더 가까이 다가간 분들이겠지요. 제가 노숙자가 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니까 접고, 가능한 경우를 생각해보지요. 제가 말기 대장암 진단을 받았다고 합시다. 아마 처음에는 견디기 힘들어하겠지요. 그러나 차츰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될 겁니다. 만약 내가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건강한 사람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구원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으며, 그것을 더 확실하게 봅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지금 너무 건강하고, 소유한 게 상대적으로 너무 많아서 하나님의 구원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닐는지요.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모두 노숙자로 살거나 불치병 환자가 되어야만 하나님의 구원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다만 그런 분들에게 일어나는 어떤 정신적인 현상이 바로 기독교 영성과 비슷하다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업적과 소유에서 자유로워질 때 그것을 뛰어넘어 임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강력하게 요구하게 되고, 결국 그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구원의 현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업적과 소유를 잘 포기하지 못한다는 엄정한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무언가를 부둥켜안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우리의 이런 근본적인 한계를 이미 알고 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주목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이사야의 말씀을 읽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바라보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21절) 이 성서의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이 자리”는 바로 예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이사야가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이 실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님에게서 실현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현실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작은 성취도 포기하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근본적으로 없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구원의 현실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신앙은 바로 이 사실에 근거합니다. 어제 밤에 제 딸들에게 오늘 설교를 요약해서 전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질문하더군요. 이사야가 말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느냐고 말입니다. 눈먼 자가 지금 당장 눈을 뜨게 되었나요? 예수님이 지금 설교하신 나사렛 회당에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일어났다고 말했다면 어딘가 잘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은 전혀 잘못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삶을 향한 간절함이 시작되었다면 이사야의 예언이 이미 이루어진 것과 같습니다. 이들에게서 하나님의 구원을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리기 시작했다면 하나님의 구원이 실현된 것과 같습니다. 이런 설명을 들어도, 하나님의 구원이 아직은 완전하게 일어난 건 아니지 않느냐, 하고 조금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눈먼 자가 눈을 뜨는 건 아닙니다. 뜰 수도 있지만 그게 늘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건 아닙니다. 살아가는 환경조건이 모두 급격하게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언젠가는 일어나게 됩니다. 아니, 그런 것보다 더 큰 일들이 일어납니다. 눈먼 자가 보게 되는 것보다 더 엄청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그것을 이미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로부터 살아나셨습니다. 궁극적인 생명으로의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종말의 생명에 참여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부활생명을 향한 간절함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영적인 통찰을 얻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향해 순례의 길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이사야가 예언한 하나님의 구원이 실현된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시시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며, 얼마나 큰 은총인지 늘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과 하나 된 사람에게는 이미 현재 하나님의 구원이 현실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게 얼마나 감격스러운 사건인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우리에게까지 전승해준 2천 년 전의 누가 공동체와 더불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님에게서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믿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우리의 운명을 완전히 맡기고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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