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 이야기
눅 8:26-39, 성령강림후 다섯째 주일, 2016년 6월19일
26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 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34 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 35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신약성경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는 자그마치 2천 년 전에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와 비교하면 삼국시대(BC1-AD7세기) 초기가 그 시기에 해당됩니다. 그 시기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와 크게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차이로 인해서 예수님 이야기를 읽을 때 한편으로는 오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제3 독서로 읽은 눅 8:26-39절에 나오는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일행은 갈릴리 호수 서쪽에서 배를 타고 호수를 가로질러 맞은 편 ‘거라사인의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 지역은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서 유대인인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기에는 꺼림칙한 곳입니다. 예수님의 짧은 공생애 중에서 이런 일은 예외적입니다. 마가복음(5:1-20)과 마태복음(8:28-34)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면 초기 기독교에 잘 알려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거라사 땅에 들어가서 처음 만난 사람은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을 ‘귀신 들린 자’라고 말합니다. 그 장면을 누가복음 기자가 어떻게 묘사하는지 보십시오. 27절입니다.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여기에 등장하는 귀신들린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완전히 벌거벗었다는 뜻은 아니겠지만, 정상적인 옷차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집에서 살지 않고 공동묘지에서 지냈습니다. 이 사람의 운명에 많은 사연이 들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이런 사람이 동네마다 한 사람씩은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불쌍하게 생각해서 헌옷을 입혀주기도 하고, 먹을거리를 주기도 했습니다. 미친 사람이 동네에 나타나면 동네 아이들이 놀리곤 했습니다.
거라사의 광인은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면서 엎드려서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의 고함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이 문장만 보면 이 광인이 예수의 정체성을 이미 알아봤다는 말이 됩니다. 거라사까지 퍼진 예수에 대한 소문을 이 광인도 들었겠지요. 어쩌면 내심 예수를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광인의 이 외침은 미친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귀신의 소리입니다. ‘당신 때문에 귀신 노릇 해먹기 힘들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가 이렇게 외친 이유는 예수님이 이미 더러운 귀신에게 명령을 내려서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했다는 겁니다. 고대인들은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가거나 나올 수 있는 인격체로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심리와 정신현상을 의학적으로 해명하기 어려웠던 고대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와 미친 사람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예수가 그에게 “네 이름이 뭐냐?” 하고 묻자 광인은 군대라고 대답했습니다. 군대는 헬라어 로기온의 번역입니다. 로기온은 로마 군직제로 볼 때 군사 6천명 크기의 부대를 가리킵니다. 광인은 예수에게 악한 영이 모이는 곳인 무저갱으로 들어가게 하지 말라 사정했습니다. 이어서 만화 같은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마침 그곳에 돼지 떼가 방목되고 있었습니다. 광인은 돼지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예수가 허락하자 귀신들이 광인에게서 나와서 돼지에게 들어갔으며, 곧 돼지 떼는 귀신과 함께 갈릴리 호수에 빠져들어 몰사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귀신을 마음대로 호령하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고, <엑소시스트>나 <곡성>이라는 영화를 본 것처럼 뭔가 찜찜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도대체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이제 이야기는 다른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놀라서 도망칩니다. 마을로 들어가서 자기들이 본 것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마을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확인하려고 사건 현장으로 갑니다. 그들은 거기서 더 놀라운 장면을 목도합니다. 미친 사람이 옷을 입고 단정한 자세로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본 겁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광인은 원래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 무덤 사이에서 고함이나 지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정신 말짱한 사람처럼 앉아 있는 겁니다. 이미 눈빛도 달라졌겠지요. 그들은 광인이었던 이에게 검사가 피의자를 심문하듯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물었습니다. 광인은 전후 사정을 그대로 말했습니다. 이 소문이 인근 지역에 퍼졌습니다. 사람들은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자신들 지역에서 떠나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예수는 그곳을 떠나려고 배를 탔습니다. 미쳤다가 제 정신을 회복한 이 사람은 예수를 따라가고 싶어 했습니다. 보통 때 제자들을 향해서 ‘나를 따르라.’ 하셨던 예수가 이번에는 오히려 그를 돌려보내면서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그 말씀에 순종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무엇이 여러분의 마음에 강한 울림으로 남습니까? 우선 이 전체 이야기에서 서로 대비되는 두 인물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미쳤다가 예수를 통해서 정신을 차리게 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삶을 자기의 뜻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마가복음은 5:1절 이하에서 이 사람의 형편을 좀더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미친 사람이 광기를 부릴 때 위험하니까 사람들이 그를 쇠사슬로 묶었지만 그것도 별로 소용이 없었습니다. 광인은 쇠사슬을 툭툭 끊어내곤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이 사람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 했을지는 상상이 갑니다. 아낙네가 혼자서 마당에 빨래를 널고 있는데 이 사람이 나타났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가족들이 저녁밥을 먹고 있는데 머리가 산발된 모습의 이 사람이 문을 두드리면서 배고프다고 죽는 소리를 내는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민폐가 막심한 사람입니다. 막 5:5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거라사 지역에는 로마군 14사단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광인은 어린 시절 로마 군대의 만행을 경험하고 정신이 이상 된 거로 보입니다.
오늘 현대인의 모습도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으로는 거라사 광인과 비슷한 게 많습니다. 요즘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공격적입니까? 얼마나 자학적입니까?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해서 공동묘지를 배회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며칠 전 유럽연합 탈퇴 건(브랙시트)으로 국회의원을 살해한 영국이나 툭하면 일반 대중들을 향한 ‘묻지 마’ 총질이 벌어지는 미국에서 보듯이 소위 선진국들도 마찬가지이긴 합니다만 우리에게는 그런 현상이 일상적으로 나타난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몸을 건강하게 하는 데는 민감하지만 정신 건강에는 소홀합니다. 거라사 광인의 어린 시절에 겪었던 끔찍한 사건을 요즘은 청소년들은, 특히 남자 청소년들은 인터넷 게임으로 간접 경험하고 있습니다. 게임은 대개 전쟁 이야기입니다. 전쟁은 적을 죽이지 않으며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논리로 작동되기 때문에 이런 게임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그게 머리에 각인이 되어 세상을 그런 방식으로 살게 됩니다.
병적으로 나타나는 사회현상만을 귀신 들림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어느 정도 안정된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도 공격적이거나 자학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많습니다. 교회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지난 설교 ‘율법과 십자가’를 듣고 어떤 분이 대구성서아카데미에 이런 대글을 달았습니다. ‘과거 청교도 신앙에 바탕을 둔 신앙생활을 했던 제게 율법과 십자가는 언제나 커다란 모순이었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은총을 말하면서도 교회는 끊임없이 행위를 강조했고, 자유와 기쁨이 아닌 좌절감과 죄책감의 나락으로 빠지곤 했거든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충고했던 것처럼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는 신앙생활이었던 것 같습니다. 조울증을 겪는 환자처럼 한껏 교만했다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를 반복했습니다.’ 프로이트나 니이체 등이 이미 진단한 것처럼 교회가 집단 히스테리에 걸려 있는 것으로 보이는 행동을 스스럼없이 행합니다.
다른 한 인물은 거라사 마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나름으로 광인에 대처하는 방식이 있었습니다. 광인을 쇠사슬로 묶거나 마을 밖으로 축출함으로써 자신들의 체제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미친 사람은 마을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좋은 훈계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공부 안 하고, 말 잘 안 들으면 너도 저렇게 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폐지를 수집하는 노인들을 보고 자기 딸에게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돼.’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요즘도 많습니다. 거라사 사람들에게 광인은 한편으로 불편한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유익한 존재였습니다. 자신들의 우월감을 보상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마을이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숨 막히는 평화이긴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광인이 제 정신을 차렸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까요? 잔치를 베풀고 광인을 고친 예수를 큰 스승으로 대접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들이 오랫동안 구축해놓은 마을 질서가 흔들릴 것을 걱정한 것일까요? 거라사 사람들 가운데에 우리도 이미 섞여 있을지 모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광인이 귀신 들린 사람입니까? 아니면 광인을 쇠사슬로 묶어놓고 마을 밖으로 쫓아낸, 급기야 광인을 고친 예수마저 쫓아낸 마을 사람들이 귀신 들린 사람입니까?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광인의 소리를 이렇게 전합니다. ‘하나님은 죽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죽였다.’ 맨부커 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에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채식을 고집하던 여자가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가 과연 정신병에 걸린 것일까요? 제가 설교 시간에 사회 문제를 자꾸 거론해서 미안하지만 여러분의 이해를 돕는 거니까 이해해주십시오. 해외 원정 도박 건을 변호하는 일로 50억 원을 받은 변호사가 있습니다. 전관예우에 의해서 한 해에 백억 이상의 수임료를 올린 변호사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거나 모르게 일어나는 이와 비슷한 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귀신 들린 게 아닐는지요. 그래서 곳곳에서 곡성(哭聲)이 터지는 게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제 정신을 잃고 무엇인가에 귀신 들린 채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저는 여기서 모두가 한꺼번에 치유될 수 있는 만병통치 비법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나온 이 광인이 어떻게 치유되었는지를 보충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광인은 우연하게 예수를 만났습니다. 우리가 우연하게 예수를 만난 거와 같습니다. 모태신앙이라고 해도 근본적으로는 다 우연하게 예수를 만난 겁니다. 만났다고 해서 모두가 이런 광기를 치료받을 수 있는 건 압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거부하거나 피상적으로만 대합니다. 구경꾼으로만 남는 경우도 많습니다. 본문의 광인은 예수를 가장 깊이 있게 만났습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상처를 치유 받았습니다. 본문은 그런 것을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지만 저는 광인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그 문제를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습니다.
광인도 광인 나름입니다. 모든 순간에 정신을 잃어버린 경우도 있지만 이따금 제 정신을 차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치매에 걸린 분들이 모든 정신 활동을 못하는 게 아닌 거와 같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광인도 정신이 날 때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도 자기를 인간으로 대해주는 사람을 주변에 만나지 못했습니다. 증상이 더 심해졌습니다. 학교에서 문제아를 모두 문제아 취급하면 증세가 더 심해지는 거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제 처음으로 자기를 생명의 심층에서 대해주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는 변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 군대의 만행에 의한 트라우마에 더 이상 묶이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옷을 바르게 차려 입을 수 있을 정도로 제 정신을 차린 겁니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삶의 방향이 또렷해진 겁니다.
지금 우리는 제 정신으로 사는 시간이 얼마나 되고, 제 정신을 놓치고 사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계산해보셨나요? 거라사 사람들이 자신들의 체제가 위험스러워질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예수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마을에서 떠나주기를 요구했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자신들이 이루어놓은 것을 잃을까 하는 염려가 반복되면서 숙명적으로 거기에 묶이는 삶의 태도를 귀신 들림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런 시간들이 우리 인생에 너무 많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이방인들의 염려가 우리의 삶을 다 지배해버렸습니다. 그런 것으로 인생을 다 소비합니다. 신앙의 차원은 제쳐두고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인생의 남은 시간을 계산해보십시오. 20년, 30년이 남았나요? 아무리 길게 잡아도 100년은 넘지 않습니다. 중간 나이인 40대 신자라고 한다면 넉넉잡아 50년쯤 남았습니다. 이 시간이 긴가요? 늙고 병든 시간을 빼면 얼마나 될지 모릅니다. 그 시간을 어떤 일에 쓰는 게 가장 현실적인 선택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돈 버는 데 씁니다. 죽을 때까지 거기에 모든 걸 쏟습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위태로운 사람들이라면 어쩔 수 없긴 합니다만 현대인들은 생존과 상관없이 모든 시간을 돈벌이에 쏟습니다. 사회 시스템이 그런 방식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개인이 벗어나기도 힘듭니다. 우리 모두 돈이라는 귀신에 들린 겁니다. 제가 보기에 예수와의 만남에 남은 인생을 쓰는 게 최선입니다. 왜냐하면 그를 통해서만 우리는 제 정신을 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공지능이 현실로 다가왔다고 떠벌리는 21세기에 오히려 귀신 출몰과 비슷한 현상이 많아집니다. 누가 귀신 들린 사람이고, 누가 제 정신을 차린 사람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삶의 중심이 흔들리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죄와 죽음의 힘이 귀신처럼 현대인들의 삶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서로 소외시키거나 소외당하고, 서로 공격하거나 자기를 파괴합니다. ‘나는 아니다.’라고 확신하십니까? 죄와 죽음이라는 귀신을 향하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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