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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그는 목자시다 (사 40:1-11)

그는 목자시다

40:1-11, 대림절 둘째 주일, 2014127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오늘 설교 본문인 사 40:1-11절에 나오는 문장의 특징은 명령문이 많다는 것입니다. 위로하라, 외치라, 소리를 높이라, 하나님을 보라 하라, 등등의 문장입니다. 1절과 6절은 각각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이 말씀의 역사적 배경은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587년 바벨론에 의해서 패망 당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고, 유대 지역은 바벨론의 식민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런 세월이 50년이나 되었습니다. 이제 포로생활이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역의 때가 끝났다는 사실을 외쳐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새벽이 가까우면 어둠이 더 짙은 것처럼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은 아무나 눈치 챌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그 사실을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게 아니라 외쳐야만 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외치는지 보십시오

 

이사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라고 외쳤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그 준비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며,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실제로 광야를 횡단해야 합니다. 광야는 거칩니다. 골짜기도 많습니다. 거기에 길을 내려면 낮은 곳을 높이고 높은 곳을 깎아내서 평탄하게 해야 합니다. 당시에 이런 대대적인 토목공사는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고국에 돌아갈 때 한번 사용하려고 그런 공사를 벌일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실제로 큰 길을 내라는 게 아니라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명령에 대한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이사야의 외침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기뻤을까요? 당연하겠지요. 20세기 초에 이러저런 이유로 한반도를 떠나 중국이나 러시아에 흩어져 살던 교포들이 대한민국 땅에 정착할 수 있을 거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느끼는 기분과 비슷할 겁니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무조건 기쁜 일만은 아닙니다. 일단 광야와 사막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길을 무사히 통과하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했다고 해서 만사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바벨론에서 50년 동안 살면서 닦은 삶의 터전만 잃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런 일은 훨씬 더 오래 전 고대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할 때도 있었습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출()애굽과 탈()바벨론은 같은 의미의 사건입니다. 양쪽 모두 억압적인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리킵니다. 출애굽 당시에 모세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디안 광야로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애굽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반란입니다. 출애굽기의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사분란하게 애굽을 뛰쳐나온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훗날 광야생활을 시작하면서 보였던 태도들이 이에 대한 증거들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먹고 마실 것들이 부족할 때마다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최소한 의식주 문제만은 어려움이 없었던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런 주장들이 때로는 조직화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내전의 조짐까지 보였습니다. 지도력의 위기에 몰리자 모세는 하루에 3천명을 즉결처분하는 방식으로 그 위기를 극복한 적도 있습니다.

 

풀과 꽃 같은 인생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자는 이사야의 외침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냥 호응만 받은 게 아닙니다. 출애굽 당시처럼 반대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였지만 청중들의 주장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생각할 때도 고국귀환에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런 와중에 이사야는 영혼에 힘을 주는 말씀을 경험했습니다. 6-8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는 다시 외치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외쳐봐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지 않는데, 무얼 외치냐는 반문입니다. 마틴 루터는 외치라는 단어를 설교하라.’(predigen)로 번역했습니다. 루터 번역에 따르면 6a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소리가 말한다. 설교하라! 내가 말했다. 무엇을 내가 설교해야 합니까?” 설교는 들은 말을 기계적으로 그대로 전하는 게 아니라 해석해서 전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를 알려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 대답이 6b-8절입니다. 들어보십시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 스쳐 가는 야훼의 입김에. 백성이란 실로 풀과 같은 존재이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지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인생은 풀이나 꽃처럼 시들고 만다는 표현은 상투적으로 들리지만, 본문에서는 살아 움직이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이 말은 누구를 향한 것일까요? 그 대상은 둘입니다. 하나는 바벨론 제국입니다. 당시 바벨론은 근동지역을 지배하던 초강국이었습니다. 그 제국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벌벌 떨었습니다. 오늘의 어떤 나라가 바벨론 제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초국가 기업이 바벨론 제국일 수도 있습니다. 제국은 기본적으로 현실유지(status quo)를 효율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질서입니다. 이런 질서가 흔들리면 사람들의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예를 들어 현재 돈의 가치가 한 달 뒤에 10분의 1로 줄어든다고 가정해보십시오. 또는 대기업 임원의 연봉과 말단 직원의 연봉이 지금은 백배 이상 나는 경우가 있지만 내년부터 두 배 이상 나지 않도록 조정된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주한 미군이 내년에 철군한다고 가정해보십시오. 난리가 날 겁니다. 좋은 질서든지 나쁜 질서든지 그게 해체되면 혼란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걸 두려워하고, 결국 그런 질서와 힘은 점점 더 강력해집니다. 이사야 당시에 바벨론 제국이 그와 같았습니다. 이사야는 그 바벨론 제국 권력자들이 곧 시들고 말 풀이나 꽃에 불과하다는 소리를 들은 겁니다. 바벨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제 그는 그 사실을 외침으로써 탈바벨론 앞에서 주저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롯한 모든 인간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90편은 그것을 적나라하게 묘사했습니다. 한 인간의 삶은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존재했는지 조차 확인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90:5,6).’ 옳은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개인적으로 아무리 뛰어나도 풀이나 꽃보다 나을 게 없습니다. 인생이 짧다는 것만이 아니라 생각과 판단이 제한적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당장은 세상의 모든 진리를 자기가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세상의 권력이나 사람들은 순식간에 말라버리는 풀이나 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따르면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던 이사야는 이제 그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영적인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소리를 듣습니다. 9절입니다.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한번 자신감을 얻은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어느 순간에 다시 의기소침해질지 모릅니다. 복잡하고 혼란스런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만이 아닙니다. 이사야의 설교를 들어야 할 청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이사야의 설교에 일부러 귀를 막는 게 아닙니다. 바벨론 제국의 권력이 풀이나 꽃과 같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그런 세력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도 돈보다 삶이 더 소중하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돈에 절대적으로 지배받고 있지 않습니까. 이사야와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제국의 흥망성쇠에 맞물려 돌아가는 자신들의 운명 앞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건 신앙이 없어서도 아니고 지식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그게 인간의 한계이면서 현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반복해서 삶의 중심이 흔들리고 허물어지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상황을 어느 누구도 한꺼번에 초월할 수 없습니다. 꾸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게 최선입니다. 시인이 되려면 좋은 시를 많이 접해야 하는 것처럼, 보석 감정사가 되려면 진짜 보석을 가까이 접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누군지에 대한 말씀에 가까이 가는 게 삶의 혼돈을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오늘 본문 후반부에서 그 하나님이 누군지를 설명합니다.

 

양과 목자

10절에 따르면 앞으로 하나님은 강한 자로 임하게 될 것입니다. 직접 세상을 다스릴 것입니다. 세상과 역사를 판단할 것입니다. 지금은 바벨론 제국이 세상과 역사를 지배하고 있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이 바벨론 제국을 심판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십니다. 이사야는 그 사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특별한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목자입니다. 11절은 이렇습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하나님을 목자로 묘사하는 구절이 구약에, 특히 시편에 자주 나옵니다. 23:1절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이며, 80:1절은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입니다. 목자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것은 풀밭, , , 목동들의 노랫소리 등입니다. 목자의 일이 겉으로는 낭만적으로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풀밭을 찾아다니는 수고를 해야 하고, 포식자와의 목숨을 건 싸움도 벌여야 했습니다. 목자는 그야말로 요즘 <미생>이라는 웹툰 드라마에서 보듯이 살벌한 생존경쟁의 한복판을 헤쳐 나가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목자라는 표현의 핵심은 목자와 양의 관계에 있습니다. 목자는 양의 안전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집니다. 그리고 양은 목자를 무조건 신뢰해야만 합니다. 목자가 아무리 험한 곳으로 인도한다고 해도 자신의 운명을 목자에게 완전히 맡겨야 합니다. 지금 이사야는 이런 전통적인 목자 표상에 근거해서 바벨론 포로생활의 막바지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손길을 완전히 신뢰하라고 외치는 중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목자가 양을 포식자의 손에서 건져내듯이 지켜주셨을까요? 만약 바벨론 귀환만을 생각한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지만 이스라엘의 긴 역사를 본다면 별로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포식자들의 먹이로 전락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 후에 예루살렘에 다시 국가를 세우고 성전을 건축했지만 주변의 제국에 의해서 계속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명실상부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면서 살았던 시기는 길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서 파괴되었고, 거의 2천년에 걸쳐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 없이 살았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들의 생존은 위태롭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야 선지자의 설교는 틀린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바벨론 포로와 그 귀환이라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서 최선의 설교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가 목자와 양이라는 사실을 그는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이게 구약 선지자들의 뛰어난 점이면서 동시에 한계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피조물인 인간이기에 역사 전체를 꿰뚫어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의 전통에 바르게 섰기 때문에 하나님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걸 배우면 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구약이 말하는 목자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경험하고 인식하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10:14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이 바로 선한 목자라는 말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생각한 이스라엘의 해방과 독립과 번영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악순환의 반복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첨단의 현대문명을 이룬 오늘의 인류가 평화롭게 살지 못한다는 데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생명은 그런 것들과 완전히 차원이 다릅니다. 그것은 곧 부활입니다. 부활은 세상 생명의 연장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산해낼 수 있는 삶의 즐거움들이 아닙니다. 부활은 죽은 자들로부터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에게서 유일회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단 한번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창조처럼 절대적인 사건입니다. 창조의 완성인 종말에 그 부활의 실체는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 놀라운 부활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선한 목자라고 고백할 수 있었고, 오늘 우리도 그런 신앙의 전통에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우리의 선한, 그리고 유일하고 참된 목자이십니다. 이 사실이 아직 멀게 느껴지시는지요. 아니면 절실하게 다가오는지요. 다음의 사실만은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이사야 40:1-11
https://youtu.be/_8PYtGLS3_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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