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윤리의 근거
마태복음 18:21-35, 창조절 둘째 주일, 2011년 9월11일
오늘의 제3독서인 마태복음 18:21-35절은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단락은 21, 22절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형제의 잘못을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됩니까?” 율법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늘려서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칭찬을 받고 싶어서 이런 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전혀 다른 대답을 하셨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걸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490번의 용서라는 뜻입니다. 용서가 끝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단락은 23-34절입니다. 예수님은 이 용서에 대한 문제를 비유로 부연해서 설명하셨습니다. 천국은 어떤 임금이 회계 결산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겁니다. 임금의 하인들이 1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돈은 천문학적 액수입니다. 5천만 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일당입니다. 대충 계산하면 5백억 원입니다.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임금은 당시의 관습대로 아내와 자식을 팔아서라도 빚을 갚게 했습니다. 이 사람은 참아달라고 했습니다. 임금은 그 사람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탕감해주었다고 합니다. 탕감 받은 이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다가 자기에게 빚을 진 친구를 만났습니다. 빚은 1백 데나리온입니다. 자신이 탕감 받은 것과 비교해보면 50만분의 1에 불과합니다. 이 사람은 갚을 길이 없는 친구를 기어코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임금은 이 사람을 불러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 너도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 18:32,33) 이 사람도 결국 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단락은 마지막 절인 35절입니다. 비유에 대한 해석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구절은 “우리가 우리에게 지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라는 주기도 구절과 상응합니다.
용서의 미덕?
세 단락으로 구성된 위 본문은 용서의 미덕을 말하는 것일까요? 용서의 미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용서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가치입니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마태공동체에서도 이런 문제들이 심각했다고 합니다. 마음의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나왔고, 교회에 나오지만 서로 마음의 문을 닫아두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일어나나는 흔한 일입니다. 아무리 신앙으로 모였다고 하더라도 갈등은 여전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교회 지체들이 상호 실수도 하고, 심지어 모함하는 일도 있습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경구는 교회 공동체에도 해당됩니다. 교회를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이미 승리한 교회이고 절대적인 교회이지만, 보이는 이 현실 교회는 여전히 전투 중에 있는 교회이고 상대적인 교회입니다. 지금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역사의 구체적인 교회에 절대적인 것을 기대했다가는 실망할 뿐입니다. 교회 지도자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할 것도 없습니다. 이 현실 교회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끊임없이 개혁해나가면 됩니다. 그게 바로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에클레시아 샘퍼 래포만다”에 담긴 뜻입니다. 이런 개혁의 과정에 용서가 자리합니다. 용서가 교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는 이 말씀은 ‘용서의 영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것을 용서 만능주의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궁극적으로 옳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현실 삶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 형사재판을 진행하는 판사가 있습니다. 그는 반인륜적인 범죄를 행한 피의자에게 선고를 내려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일흔 번까지 용서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습니다. 개인의 영성으로는 용서할 수 있어도 법을 집행하는 공인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모든 잘못을 무조건 용서한다면 사회 질서 자체가 허물어집니다. 이 문제는 재판과 같은 공공의 차원만이 아니라 일상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자녀 교육만 보십시오. 자녀들이 문제를 일으켰을 때 어떻게 대하는 것이 용서의 영성를 따르는 것일까요? 자녀들끼리 사소한 일로 자꾸 다투었습니다. 한 두 번은 말로 타이를 수 있지만 그것이 더 반복되면 분명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겁니다. 사업을 하는 분들도 경쟁사를 용서의 영성으로만 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천국에 들어가서 사는 게 아니라 아귀다툼처럼 보이는 이 세상에서 삽니다. 거기서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과 같은 두 사실에서 느끼는 영적인 딜레마이고 긴장입니다. 하나는 무제약적인 용서의 영성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으로 불가능한 세계 안에서, 즉 용서가 아니라 책임을 물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라고 한다면 후자는 세속의 윤리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세속의 윤리에 그대로 대입시킬 수는 없습니다. 세속의 윤리만으로 살아간다면 그건 또한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 딜레마를 마틴 루터는 ‘두왕국론’으로 설명했습니다. 하나님 왕국의 윤리와 세속 왕국의 윤리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된다는 것입니다. 뮌처와 칼뱅은 그것을 일치시켜 보려고 했습니다. 뮌처는 무력을 통해서라도 억압받는 농민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칼뱅은 제네바에서 신정정치를 실천해보려고 했습니다. 둘 다 실패했습니다. 두 왕국을 무리하게 일치시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루터는 이 둘의 질서와 윤리를 구분했습니다. 하나님이 영주에게 세속의 방식으로 통치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런 세속의 윤리를 교회가 지나치게 참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루터가 더 옳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뮌처의 혁명이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옳은 길이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를 지지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교회사 학자들이 더 진지하게 논의하면 됩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윤리라 할 무제약적인 용서가 우리의 현실 삶에 무조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의 신학적인 근거를 정확하게 제시한 사람이 루터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세속의 질서가 완전히 구분된다면, 즉 무제약적인 용서가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예수 믿고 죽어서 천당 갈 것만 생각하면서 세상살이는 적당히 요령껏 하면 되냐, 하는 질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게 편리합니다. 신앙적으로는 독실하고 세상살이에는 영악한 겁니다. 그런 모습의 한 전형이 서울의 강남 지역에 나타납니다. 그곳은 대체적으로 부자들이 사는 곳이라고 합니다. 땅값과 집값이 전국에서 가장 비쌉니다. 그 지역의 특성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정치적으로 매우 보수적입니다. 지난 급식문제로 서울시 주민투표가 있었는데, 강남 지역만 보편적 급식을 반대하는 비율이 높았습니다. 그 이전의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강남 지역만 오세훈 씨의 지지가 더 높았고 나머지 지역은 한명숙 씨의 지지가 골고루 높았습니다. 강남의 몰표 덕분으로 오세훈 씨가 시장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차이는 0,5%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지역의 그리스도인 비중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아주 높다는 것입니다. 보통 높은 게 아니라 전국에서 최고로 높습니다. 대략 40%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정확한 수치는 조사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평균에 비해서 거의 두 배 가량 높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소위 잘 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강남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망교회와 사랑의교회를 비롯해서 대형교회도 그곳에 몰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윤리와 신앙을 교회라는 특별한 자리에 묶어두고 세상살이는 아주 세속적으로 요령껏 하는 게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아닙니다.
빚진 자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 왕국의 질서를 세속 왕국의 질서에 일치시킬 수도 없고, 방금 말씀드린 대로 완전히 구분해서 사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길은 무엇인가요?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 건가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유를 다시 보십시오. 1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1백 데나리온을 갚지 못한 친구를 감옥에 넣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이 사람이 친구를 감옥에 넣은 이유는 자기가 1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사람의 기억은 기계적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만 골라서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필요 없는 것만 기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게 삶을 왜곡하는 길입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일종의 기억입니다. 무엇을 기억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영성이 달라집니다.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을 비롯해서 구약성서에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도 좀 막연합니다. 어떤 하나님을 기억해야 하나요? 오늘 설교 본문에 한정해서 본다면 하나님이 1만 달란트를 탕감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 기억이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운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길이 보입니다. 누가 옆에서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말을 걸 것이며, 그는 여기에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현대인들은 1만 달란트 탕감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자신들은 빚을 진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빚이라고 하면 단순히 은행빚, 카드빚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빚은 죄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에게만 집중하는 삶의 태도가 바로 죄입니다. 그 죄가 존재론적인 깊이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통찰이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원죄 개념입니다. 원죄 개념을 현대적인 용어로 바꾸면 ‘악의 평범성’입니다. 유대계 독일 여자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1906-1075)가 나치 친위돌격대장인 아이히만의 전범재판을 보면서 쓴 용어입니다. 아이히만은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는 평범한 가장입니다. 집에서 나올 때 아이들을 안아주고, 아내와 키스를 나눕니다. 직장에 와서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못한 채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냅니다. 모든 이들에게 아이히만의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탕감에 대한 기억이 우리의 영혼에 깊이 각인된다고 해서 우리 삶의 모든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삶에서는 싸워야 할 때도 있고, 책임을 물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처한 자리에서 판단하고 처리하십시오. 그러나 그 모든 윤리적 판단과 행위는 1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그럴 때만 우리의 판단과 행위는 적개심과 자기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그 토대로 작동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라도 평소에 하나님을 더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용서와 은총을 더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그 사랑을, 그 생명의 신비를 더 기억하십시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키십니다.(빌 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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