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8.17. (엡 2:14-22)
에베소서 기자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첫 구절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성서에만이 아니라 우리의 찬송가, 기도, 신학에도 빈번하게 나오는 이 구절이 상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때가 흔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 기독교인들은 다른 현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평화’라는 말의 참된 의미와 깊이를 잃어버렸습니다. 현대는 평화가 아니라 경쟁과 승리를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평화는 일종의 패배주의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매우 불행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둘째, 기독교인들은 성서가 말하는 평화를 관념적인 차원으로만 받아들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폭력적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영적으로 평화롭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의 생각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평화를 얻기 위해서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온갖 종류의 영성 훈련에 매진합니다. 가능한대로 세상의 일은 내버려두고 영적인 일에만 관심을 두려고 합니다. 이런 생각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는 평화를 진지하게 자기 삶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기자는 우리와 달랐습니다. 그에게 평화는 좋은 거니까 가능하면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살아야 한다는 덕담이나 훈화나 도덕적 규범이 아니었습니다.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더 좋은, 그런 상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그것이 없으면 기독교가 아예 성립되지 않는 본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라고 선언해야만 했습니다. 이 선언이 곧 교회의 초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역시 이 선언에 의해서만 성립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지금 에베소서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평화입니다. 오늘의 교회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문제로 이미 해결된 상태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실감하기 어렵지만, 초기 기독교가 처한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처음 교회가 시작하던 시기에는 오늘 본문 14b절이 묘사하듯이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처럼 지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지옥의 불쏘시개로 쓰기 위해서 이방인을 만들었다는 식으로 이방인들을 조롱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방인은 척결해야 할 대상이지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할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이방인들에 대해서 배타적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이유는 많습니다. 마치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은 우린 한민족이 일본에 대해서 좋은 생각을 품을 수 없는 것처럼 주변의 이방 제국들에게 식민 지배를 받은 유대인들도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배타적이고 독선적이었던 유대인들을 이방인들이 어떻게 생각했을는지는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는 악덕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유대인이었습니다. 중세기까지도 유대인들을 향한 유럽 사람들이 증오가 어땠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구체적인 이유 없이 유대인들을 증오하는 반셈주의는 현대 세계사를 엄청난 비극으로 몰고 갔습니다. 히틀러가 6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살상한 것도 역시 유럽 사람들의 반유대주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이런 반목과 대립과 증오의 역사는 초기 기독교 당시에 심각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방인들은 어느 마당 안으로는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신전을 왕래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복음서에도 이방인을 폄하는 내용들이 간혹 등장합니다. 이런 문제들이 초기 기독교 안에서는 전혀 새로운 상황에서 전개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평소에는 직접 다투는 일들이 별로 없었지만, 초기 기독교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형편에서는 서로 불편한 일들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이런 일들이 간단히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의 갈등이 초기 기독교에서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행 6:1-7절은 소위 ‘일곱 집사’ 선정에 관한 일화를 보도합니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예루살렘 원시 기독교가 사도들의 업무를 분담하기 위해서 일곱 명의 집사를 임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와 이방인 기독교 공동체의 분리라고 합니다. 그들은 한 교회에서 더 이상 함께 신앙생활을 할 수 없어서 결국 분리된 것입니다. 행 15장에 따르면 그 여파가 안디옥 교회에까지 미쳤습니다. 당시 안디옥 교회는 이방 기독교의 대표였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인들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토라를 지키고 할례를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결국 예루살렘 종교회의가 열렸고, 결국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토라와 할례를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바울의 설명이 갈라디아서 2:1-10절에 나옵니다. 예루살렘의 베드로는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즉 복음 전도의 길을 분리하기로 했습니다. 이것도 사실은 교파 분열이니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몇 가지 사실에서도 우리는 초기 기독교 당시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문제가 심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기에 신앙생활을 더불어 지속할 수 없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토라와 할례였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은 “율법 조문과 규정”이라고 했습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는 이방 기독교인에게 토라를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이방 기독교인들은 그걸 반대했습니다. 위에서 행 15장이 보도한 예루살렘 종교회의가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더 이상 토라와 할례를 짐을 지우지 말도록 결정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 기독교인들 중에서 과격한 사람들은 그 뒤로도 계속해서 이방인들에게 토라와 할례를 강요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는 율법 조문 때문에 교회가 분리된다는 게 말이 되냐,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 문제는 특히 유대인들에게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토라와 할례가 바로 신앙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태어나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좋게는 학습효과이고, 나쁘게는 세뇌를 당한 것입니다. 바꿔 놓고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지금 로마가톨릭 성당의 미사에 참여한다거나, 러시아 정교회의 미사에 참여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어색하고 불편할 겁니다. 사람은 종교 형식이나 정치 이념에서 한쪽으로 굳어지면 도저히 다른 쪽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생각이 보수적으로 굳어진 사람은 진보적인 사람을 철없는 사람쯤으로 생각하게 되고, 진보적으로 굳어진 사람은 보수적인 사람을 상대하기 싫은 고집불통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고, 한계입니다.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
에베소서 기자는 15a절에서 유대 기독교인과 이방 기독교인을 원수처럼 갈라놓은 율법 조문과 규정을 예수님이 폐지했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 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15,16절) 이 말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 사이의 담을 허무셔서 하나가 되게 하셨으며, 더 궁극적으로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시켰다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은 담은 율법 조문이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담은 죄였습니다. 율법이나 죄나 모두 평화를 깨는 장벽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율법은 좋은 것이고 죄는 나쁜 것인데, 왜 똑같이 평화를 막는 장벽이냐,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분명히 다릅니다. 구약성서에 나온 여러 종류의 율법을 보십시오. 사람이 그 가르침대로 살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게 바로 구약의 중심 역사관인 신명기사관입니다. 반면에 죄는 인간을 파괴하는 힘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이웃을 파괴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율법은 선이고 죄는 악입니다. 전혀 다른 겁니다. 그러나 그 깊이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바울의 로마서에 따르면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해줍니다. 바울은 아주 극단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도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율법이나 죄 모두 결국 ‘자기의’와 연루된 인간의 행위이며, 그것에 의한 결과입니다.
조금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해야겠군요. 여기 두 학생이 있습니다. 한 학생은 공부도 잘하고 학교생활도 아주 모범적입니다. 그는 그것으로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 학생은 공부도 못하고 학교생활도 엉망입니다. 그야말로 문제아입니다. 그는 그것으로 열등감에 빠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모범생 학생을 추켜세우겠지만, 근본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둘 다 똑같습니다. 자만심이나 열등감이나 모두 학급의 평화를 깹니다. 이런 것은 한 학급의 차원만이 아니라 한 사회, 한 나라, 더 나아가서 전체 인류 공동체에서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에베소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 기독교인과 이방 기독교인을 원수 짓게 하는 율법 조문을 폐지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제 평화가 성취되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만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평화도 가능해졌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평화를 가로막는 율법을 폐지했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그가 율법 책을 불에 태워버렸나요, 아니면 신학논쟁을 통해서 그걸 굴복시켰나요? 에베소서 기자의 이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 신앙의 가장 원초적 사실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람들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구약의 율법은 나름으로 죄를 극복하기 위한 기준들이었지만, 그것도 결국 인간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은 근본적으로 완전한 성취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인간이 아무리 인격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변한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그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인데,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너무 교리적으로만 듣지 마세요. 실제 우리의 삶을 보십시오. 여러분 주변에 사회적 신분도 좋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사람들의 삶이 어떤지를 보십시오. 그들의 고상한 삶이 무조건 부러운가요? 그렇다면 그건 여러분이 속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의 삶에 어떤 허무가 자리하고 있는지, 어떤 욕망과 번민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는 혼자 고독하게 죽어야 합니다. 우리에게서는 결코 구원이, 생명의 완성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노력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 온전히 순종하셨으며, 그 결과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노력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길을 하나님이 제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너무 심심한가요? 아무런 노력도 없이 구원받는다는 게 뭔가 찜찜한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율법(자기)의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유대 기독교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토라와 할례를 강요했습니다.
여러분, 오해는 마십시오. 값싼 은혜를 역설하는 게 아닙니다.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신앙이 옳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 값이 비싸서 값을 매길 수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값은 하나님 자신이 치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그 값입니다. 그 방식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어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된 생명을 얻는 길이 열렸습니다.
에베소서 기자는 지금 바로 그 사실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제는 하나님의 의를 얻으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은 폐기되었다고 말입니다. 즉 율법이 폐기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표현하지만, 완성이나 폐기나 근본 의미는 똑같습니다. 율법이 철저하게 상대화되었다면 이제 유대 기독교인과 이방 기독교인 사이에 막혔던 담이 하물어진 것입니다. 이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진정한 평화의 관계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기자는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에베소서 기자의 진술에 근거해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고 반복해서 앵무새처럼 외칠 수는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평화가 요원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교회의 교파 분열은 입에 담기도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150개 이상의 교파로 나누인 한국교회 현실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라는 말은 죽은 언어입니다. 겉으로는 올림픽 제전을 펼치면서도 뒤로는 폭력을 서슴지 않고 행사하는 나라들도 있습니다.
오늘은 ‘평화통일남북공동기도주일’입니다. 1945년 광복 이후 63년이 흘렀는데도 남과 북은 여전히 분단되어 있습니다. 이런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민족이 유일합니다. 참으로 불행한 민족입니다. 저는 분단의 책임이 누군지, 지금 어느 쪽이 도덕적으로 우월한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정치가들이 자기의 입장에서 주장할 문제겠지요. 저는 오늘 에베소서 기자의 신앙고백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분단된 한민족을 하나로 만든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이것이 현실만 본다면 허황된 꿈같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시는 평화를 향한 영적 통찰력을 놓치지 않는다면 삼천리반도 이 땅에 진정한 평화와 일치가 일어나는 걸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이미 2천 년 전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일어났습니다. 원수 같았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참된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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