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얼굴의 빛(고후 4:1-6)
사도권 변론
신약성서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 안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고린도후서는 바울의 사도권을 중심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단적으로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전체적인 윤곽에서만 본다는 이런 구분은 틀리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바울은 추호도 의심 없는 위대한 사도지만, 초기 기독교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요. 바울이 반기독교 운동의 선봉에 섰다가 중간에 돌아섰다는 사실, 그의 신학이 극단적이라는 사실, 초기 기독교의 신학이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과도기였다는 사실 등등, 이런 여러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보아야합니다.
3장1,2절은 그 당시의 상황을 아주 리얼하게 보여줍니다. “우리의 이 말이 또 자화자찬처럼 들립니까? 그리고 어떤 사람들처럼 우리가 소개장을 가지고서야 여러분을 찾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또 다른 데로 갈 때에도 여러분의 소개장이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여러분 자신들이 바로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소개장이 아닙니까? 그것은 누구에게나 다 통하고 누구든지 읽을 수 있는 소개장입니다.” 이런 설명을 따른다면 소개장을 들고 고린도교회에 와서 바울의 가르침을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소개장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바울의 입장에서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겠지요. 예루살렘의 사도들로부터 나왔든지 아니면 고린도교회 교우들의 마음을 움직일만한 어떤 비중 있는 사람이나 어떤 교회에서 나왔을 겁니다. 어쨌든지 권위 있는 소개장을 손에 들고 고린도교회를 찾아온 사람들과 바울 사이에 큰 갈등이 일어난 것은 분명합니다. 요즘 우리나라 교회도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다투는 것과 비슷합니다. 북한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이 양쪽이 극과 극으로 서로 다릅니다. 타종교에 대한 시각, 성적 소수자에 대한 시각이 전혀 다릅니다. 요즘은 기독교 교리가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이런 갈등이라고 해봐야 지엽적인 데 머물고 말지만, 바울 당시에는 기독교의 정체성 자체를 좌지우지할 만큼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4장1,2절 말씀은 그 당시에 기독교가 변질될 위험성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설명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힘입어 이 직분을 맡은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드러내지 못할 창피스러운 일들을 다 버렸으며 간교한 행동도 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비뚤어지게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밝혀 드러내었으니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나 모든 사람의 양심 앞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말씀을 ‘비뚤어지게’ 전하지 않았다는 진술은 곧 비뚤어지게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비뚤어지게 전하는 사람은 당연히 권위 있는 소개서를 갖고 고린도교회에 들어와서 바울의 권위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헐뜯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주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언급함으로써 그들의 문제점을 간접적으로 지적합니다.
빛의 창조자
원시 기독교에서 바울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아주 각별합니다. 그는 거의 복음 일원론에 가까울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만 일관되게 전했습니다. 이 말은 곧 그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그렇게 명백한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겠지요. 이미 기독교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예수를 통한 구원 말고 다른 걸 전할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신약성서의 시대로 돌아가서 이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당시에 기독교는 아직 체계를 갖추지 않았습니다. 특히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히브리파 유대인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디아스포라인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율법이 어느 정도로 강력한 진리 기준이었는가 하는 점을 감안한다면 바울과 그 적대자들 사이에 벌어진 갈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과 율법 문제는 단지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사고방식에만이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철학 문제와 연관됩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영지주의적 용어를 통해서 설명합니다. 복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의 마음이 어둡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십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악신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어둠과 빛을 대칭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영지주의는 이 세상을 이렇게 선악이원론으로, 빛과 어둠 이원론으로 해석했습니다. 이 영지주의가 기독교 신앙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분적으로는 설득력 있는 주장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진리를 깨닫는다거나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은총의 빛이 임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두워지면 결국 복음을 인식할 수 없다는 바울이 이 언급은 바로 그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당시의 주류철학이라 할 영지주의에 머물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이 빛과 어둠의 문제는 영지주의를 넘어서서 구약성서의 창조론으로 돌아갑니다. 6a절 말씀을 보십시오. “‘어둠에서 빛이 비쳐 오너라’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 주셨다고 합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빛과 어둠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두 가지 존재론적 세력이지만 바울에게는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빛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빛을 창조한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빛을 비쳐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복음과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비뚤어지게 전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이 창조의 빛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인식론은 창조론에 그 뿌리를 둡니다. 진리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의 내면에 내재해 있는 게 아니라 빛을 창조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칭의와 성화, 그 전체 과정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은총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드시고 비추어주시는 그 빛이 아니면 복음과 진리를 결코 인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게 실제로 무슨 의미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머리가 똑똑하다고 해서 진리를 깨닫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육적인 것은 육적인 것이며,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물리학과 심리학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복음과 진리를 깨닫는 건 아닙니다. 반대로 일자 무식자라고 해서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건 하나님의 빛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설명을 들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런 일들은 흔하게 일어납니다. 한쪽으로는 아주 뛰어나지만 다른 쪽으로는 멍청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수학 머리는 좋지만 음악 머리는 형편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명공학 쪽으로는 비상하지만 인간 존중감에서는 아주 유치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학에서는 뛰어나지만 인간관계에서는 미숙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베테랑이지만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까운 사람들이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만 분별할 수 있는데,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빛으로 일어나는 영적인 인식론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 그런 빛이 자기 마음속을 비추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바르게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변호합니다. 하나님의 빛에 의해서만 인식이 가능한 그 복음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얼굴과 하나님의 영광
오늘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까다로운 부분을 만났습니다. 단순히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외치기만 하면 충분하지 무엇 때문에 영지주의, 인식론, 창조론 같은 주제를 다루어야 하는가, 하고 궁금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을 힘들게 하려는 게 아닙니다. 신약성서 기자들이 이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우리도 그들의 생각을 따라가려는 것입니다. 6b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지금 그리스도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빛’난다는 사실을 진술했습니다. 어쩌면 이 문장이 신약성서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일지 모릅니다. 가장 핵심적인 건 아닐까요? 가장 신비로운 게 아닐는지요.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의 빛이 아니면 인식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닐는지요. 도대체 바울은 지금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얼굴 이야기는 앞서 3장12절 이하에 진술되어 있는 모세의 얼굴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은 시내 산에서 내려왔을 때 얼굴에 후광이 빛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후광을 보고 두려워하자 모세는 얼굴을 너울로 가렸습니다. 출애굽기 34장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바울이 왜 이 사건을 들추어냅니까? 모세의 얼굴에 빛나는 후광은 잠간 있다가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모세로 대표되는 율법은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잠정적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의 후광은 지나갔습니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후광이 빛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의 얼굴은 실제적인 육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의 삶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십자가, 부활, 그의 전체 운명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빛이 납니다. 빛난다는 것은 밝히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모세의 율법에서 밝히 드러났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밝히 드러난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것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체 삶에서 빛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입니다.
이 영광은 무엇일까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아주 명백하게 드러난다고 본 그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명실상부하게 주(主)가 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주가 된다는 말은 그가 창조자로서 확실하게 드러난다는 뜻이며, 나아가서 그의 구원이 확실하게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 세상의 창조자이신 그분의 구원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이런 말을 무조건 종교적인 차원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에 별로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창조가 완전하게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물을 마셔도 목마릅니다. 옆에 친구나 가족이 있어도 외로움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회생활에서 어떤 것을 성취했어도 여전히 불안합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창조 행위가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아직 완전히 구원받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그 창조와 구원의 완성은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우리가 잘 모릅니다. 아직 우리가 죽음의 강을 건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강을 건너지 않은 우리가 그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따라서 설명한다면,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빛난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런 주장은 과연 사실인가요? 이 질문으로 우리는 점점 더 깊이 기독교 신앙의 협곡으로 발을 들여놓은 셈입니다. 다시 질문합시다. 로마법에 의해서 33살의 나이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삼일만에 부활했다고 전해진 유대인 남자 예수의 삶과 운명이 곧 하나님의 영광, 즉 그의 창조와 구원을 빛내고 있다는 이 주장에 어떤 근거가 있을까요? 만약 이 사실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나 뉴턴의 만유인력처럼 실증적인 것이라면 이렇게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종말에 완성하신다는 교리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세계가 끝난 후에 증명될 수 있는 영적인 인식과 믿음의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는 바로 이 사실을 이해하고 믿은 사도들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도의 전통과 우리의 마음속에 빛을 비쳐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빛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믿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 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미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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