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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 일치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 일치

(요 17:20-26)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글의 성격이 크게 다릅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을 사실적으로 진술하는 반면에 요한복음은 그것을 철학적으로 변호하고 변증합니다. 그래서 부연 설명이 깁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요 17장만해도 그렇습니다. 1-26절은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공관복음에는 이런 내용이 없습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짤막한 코멘트만 전합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의 내용을 전하지만 그것도 아주 간단합니다. 오늘 본문은 공관복음의 겟세마네 기도에 해당됩니다. 이 내용은 읽기에 따라서 장황하다 싶을 정도로 깁니다. 무슨 뜻인지 따라잡기도 쉽지 않습니다.

 

 

영광은 절대 생명이다

     가장 까다로운 내용은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도 주었사오니”(22a)라고 기도했습니다. 24b절 말씀도 비슷합니다.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두 구절에서 ‘내게 주신 영광’이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여기에는 초기 기독교의 신앙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셨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리스도인들도 영광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질문이 따라옵니다.

     하나는 ‘영광’이라는 단어에 대한 것입니다. 영광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기도드릴 때도 영광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드린 ‘사죄기도’에도 이 단어가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밝게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하소서.’ 우리가 함께 부른 찬송가 68장 3절에도 “대 주재께 영광을 돌리오리.”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전승에 따르면 목자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라는 천사들의 찬송을 들었다고 합니다. 칼뱅의 신학을 가리켜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이라고 합니다. 성구사전에서 ‘영광’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수도 없이 많이 나올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에서 영광이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고 있지만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설명하라고 하면 머뭇거릴 때가 많습니다. 그것에 관해서 대충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뒤엉켜 있을 겁니다. 무언가 거룩한 것, 좋은 것, 절대적인 것, 신비로운 것 등등이라고 말입니다. 영광이라는 단어를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영광은 우리가 직접 확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출 33:18절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하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이어서 하나님은 모세를 반석 위에 서게 하시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여기서 말하는 카봇(Kabod), 즉 영광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람들에게 나타낼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것을 아무도 직접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분명한 현실성(reality)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바람과 같습니다. 구체적인 모양은 없지만 분명한 현실입니다.

     영광을 다른 말로 바꾸면 절대적인 생명입니다. 우리는 지금 절대적인 생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쉽게 분노하고, 실망하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곧 죽습니다.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우리의 생명은 지나갑니다. 젊음과 건강과 아름다움도 하룻밤의 놀이에 불과합니다. 돈도, 권력도, 명예도 아침 이슬과 같습니다. 사람에게는 절대적인 생명을 가리키는 영광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영광을 얻으셨다는 요한복음서의 진술은 곧 예수님이 하나님께만 가능한 절대적인 생명을 얻으셨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 질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영광을 얻으셨을까요? 어떻게 절대 생명을 얻으셨을까요? 그것에 대한 증거가 무엇일까요? 이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제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이 사실을 이미 알고, 또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 그 대답입니다. 예수님의 ‘올리심’입니다. 사도신경의 한 대목을 기억하실 겁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세 구절이 연달아 나옵니다. 다시 살아나심, 하늘에 오르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이 그것입니다. 이 셋은 똑같은 의미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내용을 부정합니다. 고대인들의 신화적 표상에 불과하다고 매도합니다. 주로 지성적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물론 그렇습니다. 부활, 승천, 하나님 우편은 신화적 표상입니다. 신화적인 옷입니다. 당시의 세계관은 신화적이었습니다. 성서가 그런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이상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요소들을 신화적인 것이라고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리에 대해서 문외한입니다. 오늘 우리의 세계관도 세월이 흐르면 신화적인 것이 될 겁니다. 중요한 것은 부활, 승천, 하나님 우편이라는 신화적 표상이 가리키고 있는 실체적 진실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절대적 생명의 세계로 옮기셨습니다. 그것은 곧 절대적인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일치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21절)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22절)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고유한 신앙 경험이나 인식입니다. 여기에서만 기독교가 성립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이런 인식과 경험을 추상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무시합니다. 믿음이 없다는 말을 들을까 염려되어 겉으로 말은 꺼내지 않지만 속으로는 이해를 못합니다.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아는 것처럼 위장하기도 합니다. 신앙 문제 앞에서 정직하지 않은 태도입니다. 정직한 사람들은 아마 교회를 떠날지 모릅니다. 여전히 교회에 붙어 있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무조건적인 믿음의 세계로 빠져듭니다. 경건주의나 열광주의로 도피합니다. 교회 행사에 매달리고, 교회에서 자신의 종교적 업적을 나타내는데 마음을 기울이고, 신앙을 이용해서 세상을 편리하게 살면 됩니다. 일종의 신앙 편의주의입니다. 이런 신앙을 건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태도는 어쩔 수 없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모두 이 세상의 세속적인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만 현실성으로 인정된 세속적 원리에 우리가 완전히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현실로 이해하기를 쉽지 않습니다.

     로마와 헬라의 세계관이 지배하던 시대에 살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현실성에 눈을 뜬 겁니다. 그들의 세계관은 예수님을 통해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에, 그런 인식의 혁명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그들은 유대교와 로마 정치와 헬라 철학으로부터 정신적 자양분을 받았지만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역시 성서시대의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똑같이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현실성을 인식하고 경험하면서 삽니다. 세상을 창조하고 완성할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절대 생명인 영광을 주셨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을 전혀 새롭게 바라보고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 일치

     요한복음 기자는 우리에게 더 엄청난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영광을 주었다고 말입니다.(22절)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절대 생명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절대 생명을 우리에게 좀더 익숙한 말로 바꾸면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제 삶은 절대 생명이나 구원과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영광의 다른 말인 구원과 동 떨어진 삶을 삽니다. 우리 자신에게 실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런 문제로 지나치게 불안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 마십시오. 그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우리의 영적 실존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실존에서 벗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바울도 자기 내면에 두 자아가 충돌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영광은, 완전한 구원은, 완전한 생명은 죽음의 문을 넘어서야만 가능합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예수님의 영광도 십자가 죽음 이후에 주어졌습니다. 이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죽음 이전까지 우리에게 이런 갈등과 시행착오는 반복될 겁니다.

     우리의 영적 실존이 근본적인 한계에 숙명적으로 놓여 있다면 아무런 노력 없이 대충 살아도 좋다는 뜻일까요? 빨리 죽기를 바래야한다는 말일까요? 예수님도 십자가 죽음 이전까지 영광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살았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이 일어나기 전의 공생애에서도 이미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선포한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사죄를 선포하고, 병자를 고쳤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간 이에게서 볼 수 있는 삶의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당시 종교 기득권자들에게는 무모한 것이며, 신성을 모독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물론 공생애 중의 영광이 부활 후의 영광과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공생애 중에 예수님은 사람이 당해야 할 모든 한계를 그대로 안고 있었지만, 부활 후에는 그것을 완전히 넘어섰습니다. 공생애의 영광과 부활 후의 영광은 형식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리고 질적으로는 동일합니다. 공생애의 예수님과 부활 후의 예수님이 하나의 인격체라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님은 공생애 중이나 부활 후나 동일한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직 죽지 않았기에 절대적인 생명을 살지는 못하지만 이미 절대적인 생명에 들어간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아직은 완전하지 못하나 완전한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흉내를 내라거나 위선을 행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미래에 주어질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를 약속으로 받은 사람들이 마땅히 감당해야할 삶의 태도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런 삶의 태도 중의 하나가 일치입니다. 21절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하나를 이룬 것처럼 제자들도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22절에서도 똑같은 말이 반복됩니다.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치에서 시작해서 모든 믿는 자들이 일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 일치를 요한복음은 ‘안에’라는 전치사를 통해서 설명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안과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제자들이 서로 안에 거하여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모든 세계가 하나로 변화됩니다. 이게 실제로 가능한 말인가요? 그것은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삼위일체가 하나님 존재의 신비이듯이 모든 이들의 일치는 신비입니다. 그 신비는 막연한 게 아닙니다. 생명의 심층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행하시는 구원의 놀라운 세계입니다. 우리가 놀랄 수밖에 없는 그런 절대적인 생명을 가리켜 영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사람들이 해야 할 우선적인 일은 교회 일치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일치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도 일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유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율법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문제로 분열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사분오열 되었습니다.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주교는 서로 대립하가가 결국 10세기에 완전히 등을 돌렸습니다. 1517년 개신교회가 시작된 이후로 기독교는 훨씬 많은 분파로 나뉘었습니다. 분열의 막장이 곧 한국 개신교회입니다. 모두 똑같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서도 서로 경쟁해야 할 대상으로 여깁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나가 되라고 영광을 주셨지만 우리는 갈라지기만 합니다. 아무도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는 곧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진 절대적인 생명을 알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어떻게 온 세상이, 온 우주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분열의 극치를 달리는 한 교회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억지로 일치를 이룰 수 없습니다. 서로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도 아주 사소한 문제로 틀어질 수 있습니다. 서로 통한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서로 실망하면 더 크게 벌어집니다. 이런 문제는 인격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결국 핵심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었다고 말씀하신 영광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절대적인 생명을 안다면 다른 차이들은 사소해지기 마련입니다. 거꾸로 차이가 확대된다면 그건 그리스도의 영광이 절대적인 것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영적 원리는 한 교회 안의 성도 사이에도, 교회와 교회 사이에도, 또는 가족 사이에도 적용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놀랍게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에게서 절대적인 생명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아멘! (부활절 일곱째주일, 5월16일)

요한복음 17: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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