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평화
골로새서 3:12-17, 성탄절후 제1주, 2012년 12월30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옛 사람과 새 사람
골로새서는 바울의 신학적 영향을 받은 어떤 사람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단순히 안부를 묻는 편지가 아니라 신앙적인 가르침을 주기 위한 편지입니다. 당시는 기독교 공동체가 시작되던 때였기 때문에 유대교와의 관계도 불분명하고, 전반적으로 아무런 체계가 없었습니다. 성경도 없었고, 노회나 총회도 없고, 교단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와 같은 편지들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아주 중요했습니다. 당시에는 골로새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교회 문서들이 출현했습니다. 골로새서가 신약성경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그것의 영적인 권위를 인정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골로새서 기자는 3장1-17절에서 기독교인을 가리켜 옛 사람과 구별되는 새 사람이라고 규정하면서 새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기독교인은 옷을 입듯이 ‘새 사람을 입은’ 사람입니다(골 3:10). ‘입는다.’는 말을 조심해서 보십시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실제로 새 사람이 되는 건 아닙니다. 새 옷을 입는 겁니다. 옷과 실제 몸은 다릅니다.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일단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게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 옷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이 저절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구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성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 성화마저도 사실은 믿음에 의한 선물입니다. 여기에 긴장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해야하지만, 그 노력마저도 상대화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변화된 삶이라는 게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은 또 기독교인다운 최선의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기자는 오늘 설교 본문인 골 3:12-17절에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제가 그 모든 것을 여기서 일일이 나열하지 않겠습니다. 한 가지만 보겠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기독교적인 덕목을 다섯 가지로 말합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이 그것입니다. 이런 덕목은 신약성서에 자주 거론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열매를 아홉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갈 5:22,23)가 그것입니다. 이런 덕목들은 순전히 기독교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로마 선생들도 그런 덕목을 가르쳤습니다. 오늘도 이런 덕목을 가르치는 선생들은 많습니다.
이 대목에서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덕목들이 당시 로마라는 문명사회가 말하는 덕목들과 차이가 없다면 우리가 굳이 성경을 읽거나 기독교 신앙을 가질 필요가 없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람직한 삶을 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 믿고 좀 착하게 살려고 한다는 말은 틀렸습니다. 착한 사람, 도덕적인 사람, 희생적인 사람이 되려면 굳이 기독교인이 되지 않아도 됩니다. 성서기자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세상의 덕목을 제시한 이유는 그것 자체가 결정적인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세상의 가치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삶의 가치가 세상의 보편성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문이 나열한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이라는 다섯 가지 덕목들은 소극적인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소극적이라는 말은 이런 덕목들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덕목들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다섯 항목 중에서 한 가지만이라도 성취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긍휼의 세계에 여러분은 완전히 들어갈 수 있나요? 긍휼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우리가 사죄 기도를 드릴 때 자주 ‘자비와 긍휼이 충만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루터 성경은 긍휼을 ‘herzliches Erbarme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불쌍하게 여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극한의 측은지심입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그런 경험을 하기는 할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잘 모릅니다. 자기 연민이 그렇게 표현되기도 합니다. 측은지심이 설령 들었다고 해도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상대방을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오해하면서 자신이 일방적으로 그런 마음을 느끼곤 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긍휼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덕목들로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
그렇다면 성경기자들이 제시하고 있는 것들 중에서 무엇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본질적인 것일까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그 대답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가 신앙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노력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행위로부터만 나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숨을 쉬려면 공기 중에 산소가 충분하게 있어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 하나님의 행위가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이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여기서 ‘한 몸’은 교회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허공에 떠 있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은 바로 이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앞에서 언급된 다섯 가지 덕목과 연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그 덕목들은 인간 사이에서 추구되어야 할 것들입니다. 그 인간 사이의 관계는 바로 교회 공동체에서 확인될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기자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평화와 연결해서 설명했습니다. 다섯 가지 덕목들이 실현되어야 할 교회 공동체가 가능할 수 있는 토대가 바로 그리스도의 평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무엇일까요? 우리말 성경은 헬라어 에이레네를 평강으로 번역했습니다. 바울 편지에 나오는 인사말을 번역할 때 주로 그렇습니다. 팔복을 다루는 마 5:9절의 같은 단어 에이레네를 ‘화평’이라고 번역했고, 예수 탄생의 목자 전승을 다룬 눅 2:14절에서는 ‘평화’라고 번역했습니다. 문맥에 따라서 세 가지 다른 말로 번역했는데, 그 뉘앙스가 조금씩 다릅니다. 평강(平康)은 주로 살아가는 게 편안하다는 뜻으로 쓰이고, 화평(和平)은 싸우던 두 사람이 싸우지 않게 되었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평화라는 번역이 가장 간명하면서도 정확한 번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헬라어 에이레네는 라틴어 팍스와 더불어서 훨씬 포괄적인 차원에서 수행되는 평화 사건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팍스 로마나’라는 말은 로마의 제국주의적 평화를 의미합니다. 정치, 경제, 군사적인 강압을 포함합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팍스 크리스티’(그리스도의 평화)를 외쳤습니다. 이것은 제국주의적 폭력에 저항한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라틴어 ‘팍스 크리스티’는 바로 오늘 본문 15절의 헬라어 성경에 나오는 ‘에이레네 투 크리스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단지 우리의 기분을 평안하게, 우리 집을 화평하게 한다는 뜻에 머물지 않고 훨씬 근원적인 차원을 가리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우선 평화가 실제로 가능한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은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평화가 아니라 다툼이 우리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평화로운 게 아니라 오히려 불안합니다.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국가적으로 그렇습니다. 먹을 게 부족하기 때문에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소유가 늘어도 그것으로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상대방을 적으로 생각합니다. 로마의 평화는 다른 나라를 억압적으로 다룰 때만 성립되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평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완전한 평화가 실현된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에이레네 투 크리스투’는 단순히 마음의 평정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더 근원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건져내신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원수 관계에서 친구 관계로 변화되었습니다. 원수 관계라는 것은 죄와 죽음을 가리키고, 친구 관계라는 것은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곧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그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으며, 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이런 말을 여러분이 자주 들어서 너무 뻔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사실이 늘 새롭게 경험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경험이 말처럼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최선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더 깊이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온 영혼을 다해서 상대방에게 가까이 가려는 것과 같습니다. 신약성서는 모두 그것을 증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영혼을 기울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평화에 들어가는 첩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의 평화가 당신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마음과 영혼을 지배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런 말씀대로 사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거냐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세상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예배의 삶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 사건에 가까이 가는 방법의 하나로, 이것이 가장 핵심적인 것인데, 예배를 말합니다. 16절 말씀은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킵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좀더 화끈한 방법을 기대했던 분들이라면 골로새서 기자의 이런 말에 실망했을지 모릅니다. 기독교 영성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좀더 진지하게 생각하십시오. 초기 기독교는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만약에 예배가 없었다면 기독교는 일종의 철학이나 사회운동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겁니다. 지금도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기독교에 그런 요소가 없는 건 아니지만 본질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배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예배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샘터교회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예배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배 열광주의입니다. 감정을 고조시키면서 어떤 엑스타시를 경험하게 하는 예배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말씀 중심적 제사와 대립되는 근동의 우상숭배적인 제사입니다. 또한 예배를 율법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보통 성수주일이라는 말로 일컬어집니다. 율법주의는 인간의 죄책감에 근거한 신앙입니다. 한국교회는 심지어 새벽기도회에 빠진 것으로 불안을 느끼는 분들이 있을 정도로 율법주의에 찌들려 있습니다. 거꾸로 예배 냉소주의자들도 있습니다. 예배를 단순한 종교적 의식이나 습관 정도로 여깁니다. 시간이 나면 예배에 참석하고, 다른 일이 있으면 쉽게 포기합니다.
예배를 열광주의, 율법주의, 냉소주의로 접근하면 곤란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생명의 신비인 영광을 돌리는 지고지선의 종교의식입니다. 마르바 던은 <고귀한 시간 낭비>라는 책에서 이 부분을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예배는 돈벌이도 아니고 취미생활도 아니기에 낭비처럼 보이지만, 그 어떤 것보다 고귀한 시간 낭비입니다. 자녀들에게도 바른 예배 참여를 가르쳐야 합니다. 당장은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여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영적으로 큰 차이가 납니다. 예배를 통한 하나님 경험이 그 사람의 영혼을 바르게 키우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새 사람으로 살기 원하십니까?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도록 하십시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평화를, 즉 구원 사건을 깊이 이해하고 가까이 가십시오. 혹시라도 먹고사는 게 바빠서 그런 것에 마음을 둘 형편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생각을 바꾸십시오. 그리스도의 평화가 아니면 우리는 참된 삶의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평화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단순히 교회에서 모이는 예배 시간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모든 삶에서 골로새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놀라운 방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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