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er::bec483ba-d204-47d4-afbd-8005746530c3

성탄절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 세 가지 (골 3:12-17)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 세 가지

3:12-17, 성탄 후 첫째 주일, 20181230

 

12.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오늘 설교 본문인 골 3:12-17절에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에 대한 대단히 소중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걸 실제로 알아듣고 받아들인다면 영혼이 풍요로워질 뿐만 아니라 삶의 내용이 탄탄하게 갖춰집니다. 오늘 본문은 특이한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 옷 입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라는 접속부사는 앞에 나온 어떤 이야기를 전제하는 겁니다. 그 이야기는 기독교인들이 피해야할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골 3:8절에는 다섯 항목이 나옵니다.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이 그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것들은 옷을 벗듯이 벗어버리고 대신 새로운 옷을 입어야합니다. 3:8절에 다섯 항목이 나온 것처럼 골 3:12절에도 옷을 입듯이 입어야 할 다섯 항목이 나옵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입니다. 이 다섯 항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이런 성품을 보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그러나 옷 자체가 사람은 아닙니다. 옷보다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노숙자가 법복을 입는다고 해서 판사가 되는 게 아니고, 대통령이 군복을 입었다고 해서 군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옷은 옷일 뿐입니다. 옷이 화려하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가 화려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허름한 옷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정신적으로 높은 수준의 철학자일 수 있습니다. 옷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상황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서 긍휼이 좋은 옷이기는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냉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래 참는 게 좋으나 빨리 결단을 내려야할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이들을 포용하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지만 내쳐야할 경우도 있습니다. 골로새서는 지금 기독교인들에게 나타나야할 성품을 거론했지만,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이 된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즉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보가 핵심입니다. 그것을 저는 오늘 설교제목에서 영적 실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12절에는 그것이 세 가지로 나옵니다. 루터 성경 12절을 제가 번역해서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거룩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사랑받은 사람으로서 진정성 있는 자비와 친절함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옷처럼 입으시기 바랍니다.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하는 질문에 정확한 대답이 세 가지로 나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이고, 둘째는 거룩한 사람이고, 셋째는 사랑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그걸 절실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이것을 실제로 이해하고 경험한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보는 것입니다. 제가 저의 관점에서 설명해볼 테니 여러분의 생각과 같은지 아닌지를 판단해보십시오.

 

선택받은 사람

선택은 신구약성경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개념입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곧 선택입니다. 12:1절은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모세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무엘과 이사야와 호세아 등 모든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유대 역사에서 이런 사람들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하나님이 유대 민족을 선택했다는 인식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믿음은 신약에 그대로 이어집니다. 바울의 편지 서두에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1:1절은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성경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한 사람들은 허다합니다. 우리도 그런 역사의 한 부분에 속합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경험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경험이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저절로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이에 대한 눈에 보이는 확실한 증거도 없습니다. 그런 경험은 바람 현상처럼 아주 신비롭고 지극해서 영혼의 눈이 밝지 않으면 주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설교를 듣고 있는 분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말을 낯설어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선택받았다는 말은 그렇게 이상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은 나름으로 선택을 받고 삽니다. 누구에게서 선택을 받느냐가 다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의 선택을 받습니다. 그의 영혼이 늘 돈에만 민감하다면 돈의 선택을 받은 겁니다. 정치적인 욕망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국가와 민족과 세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인 손익계산으로만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그 결과에 일희일비하면서, 아니면 자신의 정치력을 즐기면서 여유만만하게 삽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게 우리의 영혼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에게 선택받았다는 것을,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영혼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대한 확신이나 신뢰가 없으면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위축됩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게 선택받았다는 것이 우리 삶에서 큰 의미가 없다거나, 그런 선택이 없어도 그냥 편안하고 즐겁게 잘 먹고 잘 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시대정신에 충실한 기독교인들이 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도 하나의 인생입니다. 저는 그런 이들의 인생을 가타부타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복음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얻었다는 말은 존재의 기쁨과 자유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그런 길을 함께 가자고 여러분을 권면하는 중입니다. 생명을 얻었다는 말의 한 대목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선택입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 세 가지 중에서 나머지 두 가지를 설명하면 좀더 구체적인 대답이 주어질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

두 번째 항목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뭔가 불편하게 들립니다. 실제로 거룩한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추한 모습이 많습니다. 성경은 서로 모순되는 말을 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거룩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거룩한 사람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하기오스의 변형인 하기오이의 번역입니다. 하기오스는 거룩하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구별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대 헬라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은 거룩하다는 말과 구별되었다는 말을 같은 의미로 보았습니다. 기독교인이 자신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부른 이유는 세상과 구별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구별되었다는 표현도 우리에게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세상의 메커니즘에 묶여 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사람이라는 표현에 가장 가까운 다른 표현은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가톨릭과 신학적으로 투쟁할 때 붙든 가장 핵심 사상이 바로 이것입니다. ‘칭의론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은 어떤 업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실제적인 의가 아니라 법적인 의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실수와 잘못을 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만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만약 실제로 완전히 의로워지는 것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다면 기독교인은 평생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말은 의의 기준을 사람에게 두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둘 때만 성립됩니다. 예를 들어서 철부지 아들을 아버지나 어머니가 우리 아들 착하다.’고 인정하는 거와 비슷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도 아이가 아무런 변화 없이 늘 철부지로 머문다면 그는 철이 들지 않은 거겠지만 철이 들면 실제 삶에서도 변화가 시작됩니다. 철이 들기 전과 든 이후나 그 사람은 여전히 똑같은 사람입니다. 철이 들게 될 미래의 그를 하나님이 아직 철이 들지 않은 현재의 그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칭의(稱義)의 본래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거룩하심의 근거인 하나님과 결속되었다는 데에 놓여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그가 비록 세상 안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서부터 구별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결속을 그림처럼 본다면, 엄마 품에 안긴 아이입니다. 어떤 기독교인은 하나님 품에 안긴 아이처럼 살아가고, 또 어떤 이들은 그런 느낌과 경험이 전혀 없이 살아갑니다. 두 사람의 삶이 얼마나 다를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과 결속되었다는 사실을 현대인들은 냉소적으로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느낌과 경험이 크게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입으로만 하나님을 언급할 뿐이지 실제로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니 삶이 건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삶이 건조해지면 어쩔 수 없이 세상의 재미에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과의 결속을 실제로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를 아는 것만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소위 탕자의 비유를 아시지요? 둘째 아들은 아버지 곁을 떠났습니다. 그는 인생의 막장에 도달했습니다. 의지할 대상이 전혀 없어서 돼지 농장에서 돼지 먹이를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순간에도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이런 아버지로 아는 사람은 가장 단단하게 하나님과 결속되어 있는 겁니다. 돼지 농장이라는 상황에 떨어져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실제 그런지 아닌지는 아래에서 다루게 될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실존에 관한 세 번째 항목에서 보충될 것입니다.

 

사랑받은 사람

기독교인은 사랑받은 사람이라는 영적 실존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런 표현도 자칫 상투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씨씨엠 찬송 가사에서 볼 수 있듯이 값싼 감상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받았다는 것은 앞에서 나온 선택받았다는 것과 거룩하다는 것과 깊이 연관됩니다. 사랑받은 사람은 그 대상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느낌을 받고, 대상에 의해서 자신이 구별되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느낌이 아니라 삶의 경험이자 능력입니다. 연애하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 보십시오. 상대방에 의해서 자신이 새로워지는 걸 경험합니다. 선택을 받고, 보살핌을 받고, 구별된다는 느낌이자 경험입니다. 사람으로부터 받는 사랑도 이렇게 특별할진데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긴말이 소용없을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생명의 원천이자 근거이며 토대라는 사실에서 확인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그 사람은 생명의 능력과 그 신비 안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흔하게 사용하는 말로 바꾸면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 바로 죄와 죽음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완성시켜야한다는 강박에 떨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은 사람은 그 사랑에 충실하기에 더 이상 자기가 무엇을 이뤄야한다는 강박과 갈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자기 연민에 떨어지지 않고, 자기 과시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일상을 사랑의 선물로 받아들이지 짐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당연히 자유와 평화와 안식을 실질적으로 누립니다.

한 가지 비유를 말씀드려도 되겠지요. 여기 텃밭을 가꾸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가 텃밭으로부터 사랑받은 사람이라면 텃밭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사랑스러워 보일 겁니다. 잡초와 곤충과 지렁이, 새순과 낙엽 등등이 다 귀엽고 귀합니다. 장마로 인해서 깊이 파인 땅 모습도 사랑스럽습니다. 그는 귀찮다는 생각이 전혀 없이 텃밭을 돌보고 가꿉니다. 텃밭과 하나가 되는 겁니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만 좋아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귀찮아합니다. 잡초가 날 때마다 신경질을 냅니다. 그게 다 짐으로 느껴집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텃밭을 평가하느라 신경이 곤두섭니다. 텃밭을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나 사업장이나, 또는 가정으로 바꿔놓고 생각해도 됩니다. 목사의 입장으로 본다면 교회가 바로 텃밭과 같은 거지요. 사랑받은 사람은 거기서 벌어지는 모든 것으로 인해서, 불편한 것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을 기뻐하지만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조울증 환자처럼 자기 기분에 좌우됩니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항목 중에서 세 번째의 사랑받은 사람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랑받은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으로 인해서 구별되어 거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영혼이 충만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기자는 12b절에서 다섯 가지 옷을 언급하고 13절에서 누구에게 불만이 있어도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라고 권면한 뒤에 14절에서 다시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사랑은 기독교인의 삶을 완전하게 하는 띠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우리가 다 압니다. 바울은 고전 13장에서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가능한 생명의 능력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은 사람이라면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사랑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경험한 사람은 각각의 상황에서 자기가 어떻게 가족을 대하고, 교우들을 대해야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2018년 한해를 다 보내고 오늘 마지막 주일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각각 다를 겁니다. 좋은 일이 많은 분도 있을 거고, 어려운 일이 많았던 분도 있을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라고, 어려운 일은 무조건 피하는 방식으로 삽니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인생이 완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나님을 통해서만 생명이 완성된다고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그들과 다릅니다. 우리의 영적 실존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골로새서는 세 가지를 우리에게 말합니다. 저는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된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은 사람들입니다.

골로새서 3:12-17
https://youtu.be/PHvIVZlGVuE
http://afreecatv.com/nfermata

설교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