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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그리스도인의 이중 실존

 

그리스도인의 이중 실존

(요 17:9-19)


예수의 마지막 기도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드셨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도 그 자리에 함께 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이 끝난 뒤에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마지막 기도였습니다. 공관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기도드리시는 주님께서 흘리신 땀이 피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곧 이어서 예수님은 제사장들이 보낸 군인들에게 체포당하시고 밤새워 산헤드린 법정에서 심문을 당하신 후에 아침 일찍 총독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 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유월절 만찬과 체포 사이에 있었던 예수님의 기도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이 포함된 요한복음 17장입니다. 공관복음서는 그 기도의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보도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가능하면 그 십자가 죽음의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공관복음서이 전하는 기도의 내용은 간단한데 반해서 요한복음의 기도는 아주 깁니다. 이 17장의 기도문에 앞서 14장에서 16장까지 세 장에 이르는 분량의 고별사가 나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이 이제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 제자들에 대한 염려, 제자들을 위해서 성령 보혜사를 보내신다는 약속 등이 나옵니다. 그 중심 주제는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염려입니다. 17장의 기도문도 역시 제자들을 위한 내용이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기도를 드린 것일까요? 이런 질문에 바른 대답을 찾으려면 1세기 말의 기독교가 처한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그런 역사적 배경에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원 후 70년은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당한 해입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종파 사이에 세력이 재편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했던 사두개파는 힘을 잃었습니다. 로마에 무력 투쟁에 앞장섰던 열심당도 힘을 잃었습니다. 엣세네 파는 더 깊은 사막으로 피했습니다. 오직 바리새파만 남았습니다. 복음서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이런 역사적 배경에 놓여 있습니다. 바리새파는 회당과 율법을 중심으로 활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지만 회당과 율법은 건재했습니다. 이를 중심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더 강력하게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율법 근본주의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 방식으로만 유대 민족이 생존할 수 있다는 생각이 확산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회당에서 몰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던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그 대상이었습니다.

원시 기독교는 바리새파의 근본주의 운동이 본격화하기 이전까지는 유대교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사도행전이 보도하고 있는 원시 기독교의 초기 활동에도 그런 흔적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교의 기도 시간에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에 정기적으로 드나들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교 측에서도 이들을 나사렛 파로 인정했습니다. 이런 관계는 70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 바리새파 운동이 본격화하면서 깨졌습니다. 이제 원시 기독교는 양자택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바리새파가 요구하는 정도로 율법을 준수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과 결별할 것인지를 말입니다. 율법을 따르게 되면 복음의 본질이 훼손될 것이며, 그들과 결별하면 정치 경제적인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 불이익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바리새파가 득세한 예루살렘에서 기독교 공동체를 유지하기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한다면 이슬람 국가인 이란에서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과 비슷합니다. 다른 하나는 로마 제국이 유대교에 베풀어주는 종교적 관용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로마 제국이 정치적으로는 억압적인 정책을 펼쳤지만 종교와 문화의 차원에서는 너그러웠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에도 상당할 정도로 자율권을 허락했습니다. 원시 기독교가 바리새파와 적대적인 관계로 들어간다면 유대교가 누리는 종교적 자유를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기독교는 유대교와의 관계를 끊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종교로 출발을 한 것입니다. 그 결과로 그들이 감당해야 할 시련은 혹독했습니다. 시련은 수 세기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순교의 역사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습니다. 


세상 초월

요한복음 기자는 그 상황을 이렇게 말합니다. 요 17:14a를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던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미움을 당했습니다. 이런 시련은 16장에서 이미 구체적으로 거론되었습니다.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니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 물론 기쁨을 말하고 있으나 그 이전에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승리를 담보하고 있으나 환란을 당할 것입니다. 그런 환란은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구체적인 것이었습니다.

요즘 신앙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우리는 복음서의 이런 진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남의 이야기같이 들립니다. 일제로부터 신사참배를 요구 당하던 일제 강점기의 우리 선조 그리스도인들이나 북한 체제 아래에 사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된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오늘의 우리가 더 심각한 신앙의 위기에 빠져 있는지 모릅니다.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져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면 초기 기독교가 경험한 신앙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하자면 기독교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억지로 신앙의 박해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간혹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은 박해를 통해서 성장한다고 생각하고 무조건 투쟁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가족과 살면서 신앙생활을 독선적으로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가족과 합의하지도 않은 채 지나칠 정도로 많은 교회당 건축헌금을 내거나 각종 헌금을 냅니다. 신앙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가족 사이의 신뢰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신앙으로 인한 박해라고 생각하는 건 큰 착각입니다. 이들이 고수하는 것은 신앙의 형식에 불과합니다. 신앙의 형식으로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앙 형식은 초기 기독교와 오늘 우리 기독교와 똑같을 필요는 없습니다. 서로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신앙의 본질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박해를 받았다는 그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 정체성이 바로 박해를 불러온 근본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놓여있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요 17:14절을 다시 기억해보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이 구절이 16절에서 똑같이 반복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초월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그것이 확보되지 않으면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을 성속 이원론으로 받아들이면, 그건 오해입니다. 교회는 선하고 세상은 악하다는 선악 이원론도 아닙니다. 영은 거룩하고 몸은 악하다는 영육 이원론도 아닙니다. 지난 날 이런 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피안적인 것과만 연결시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모순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기에 좋았다고 했는데, 그 세상을 우리가 어떻게 악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물론 악한 일들은 많습니다. 그렇지만 세상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들도 악할 때가 많고, 교회도 악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것을 기준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초월해서 거룩한 척, 세상에 속하지 않은 척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위선이거나 어리석음,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세상 초월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14절과 16절의 문장을 자세하게 보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 앞에 전제되는 게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16절을 정확하게 읽겠습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여기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주님의 정체성이 핵심입니다. 그분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믿는 우리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님이 ‘영광’을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요 17:10절에서 제자들로 말미암아 주님이 영광을 받으셨다고 했으며, 24절에서도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영광을 제자들도 보기를 원한다고 했고, 11절에서는 예수님이 세상에 더 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17:1절은 하나님이 아들 예수를 ‘영화’롭게 하시어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2절에서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줄 수 있는 권세를 하나님이 아들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좀 복잡한 설명입니다만 그 모든 설명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의 중심에는 ‘부활’이 놓여 있습니다. 부활로 주님은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그는 하늘로 올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일치되는 사건입니다. 그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궁극적 생명의 세계로 올림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바로 그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이제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분 덕분으로 우리도 이 세상이 제공하지 못하는 참된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이 주는 것은 결국 죽음으로 끝나지만 부활 생명은 그것과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의 무상하고 덧없는 생명을 초월하는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공동체와 더불어 우리는 바로 이 사실에 우리의 영혼을 걸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실존입니다.

세상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왜 세상의 미움을 불러오는 걸까요? 그들을 박해하는 이들이 누군지를 확인하면 대답이 나옵니다. 율법을 강요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걸림돌이었습니다. 율법은 사람의 종교적 업적에 무게를 둔다면 부활은 그것을 무효화하기 때문입니다. 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로마 권력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귀찮은 일이었습니다.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황제를 결코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영적인 실존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 속으로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또 하나의 다른 실존이 있습니다. 그 실존은 세상 속에 있습니다. 18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1절에도 이런 기도의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이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 세상에 남아 있던 제자들의 실존이었습니다. 그 세상에서 그들은 미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살아야 할 세상의 원리는 적자생존이며, 물질적이며, 소유 지향적이며, 탐욕적입니다. 모든 것이 악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거나 땀을 흘리면 목이 갈한 거와 비슷합니다. 예수님도 세상에서 외로움을 경험하셨는데 우리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세상의 원리에 철저하게 지배받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깊다 하더라도 이런 세상의 원리를 간단히 넘어서 구름을 타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어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고향 마을 바위산에서 목숨을 버렸습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보는 시각에 따라서 서로 다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노 전 대통령이 괜찮은 대통령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역 분열을 이용하는 정치를 극복해보려고 치열하게 투쟁한 정치인이었습니다. 다른 건 접어 두고 대통령 임기를 마친 뒤에 고향에 내려온 최초의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는 고향인 봉하 마을에서 지난 일 년 동안 생태 농사짓기에 열중했습니다. 남은 인생을 그렇게 살아가 주는 것만으로도 한국 정치의 역사에 큰 공헌을 할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그가 포괄적 뇌물수수죄로 검찰로부터 몇 달 동안 거의 먼지 털이 식에 가까운 수사를 받았습니다. 결국 이 와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게 한국 정치 현실이며, 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가 예수 부활의 생명을 모른다면 무조건 이 현실에 적응만 잘 하면 충분합니다. 건전한 시민으로 살아가면 되겠지요. 적당하게 예의를 갖추고, 가능한 출세하고, 주변으로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되겠지요. 그게 이 세상에서 누려야할 최선의 삶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부활생명이라는 초월 영성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초월하면서 동시에 세상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제가 그 대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생명의 영인 성령으로부터 대답을 들어야 합니다. 성령의 대답을 듣는다는 말이 너무 막연하게 들리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며, 부활의 영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생명 안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입니다. 그 생명의 신비가 우리 영혼을 향해서 말을 걸 겁니다. 또한 우리가 버텨내야 할 이 세상의 삶을 정확하게 직관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사랑하신 세상이며, 예수님이 몸을 버리신 세상입니다. 성령이 세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 안에서 그 너머의 생명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심이 여러분과 저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2009.5.17)

요한복음 17: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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