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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그리스도 논쟁을 넘어 (마 22:34-46)

그리스도 논쟁을 넘어

22:34-46, 창조절 여덟째 (종교개혁 497주년) 주일, 20141026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오늘 설교 본문인 마 22장에 이어지는 23장에는 상당히 과격하고 파격적인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사회적으로 멸시받던 사람들까지 따뜻한 마음으로 대하시던 예수님이 어떤 사람들을 옆에서 듣기에 민망한 정도로 강하게 비난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 대상입니다. 23:13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가 있을 것이라는 표현이 23장에 자그마치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한번쯤은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이렇게 반복해서 혹독하게 비판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비판에는 그럴만한 근거가 있을까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의 지성인들이며,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총독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이들이 이스라엘의 권위와 정통성을 독점한 사람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들은 이스라엘 민중들의 존경을 받을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일찌감치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정체성을 잃고 말았을 겁니다. 그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예수님이 그들을 그렇게 격한 어조로 비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표면적인 이유도 있고, 속에 숨겨진 이유도 있습니다. 먼저 표면적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예루살렘 입성으로부터 시작되는 마지막 일주일입니다. 그 이야기가 마 21장부터 뒤로 이어집니다. 예루살렘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층 인사들과 상당한 정도로 마찰을 빚었습니다. 몇 가지만 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성전청결(21:12-17), 2) 권위에 대한 논쟁, 두 아들의 비유(21:23-32), 3) 포도원 농부의 비유(21:33-46), 4)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칠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대답(22:15-22), 5) 부활에 대한 논란(22:23-33). 이런 일련의 이야기에 등장해서 예수님에게 시비를 걸거나 심지어 체포하려고 했던 이들은 모두 유대교 지도자들입니다.

 

이어서 오늘 설교 본문에 두 가지 이야기가(22:34-40) 보충됩니다. 하나는 한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이 율법사는 서기관을 가리킵니다. 당시 서기관은 대개 바리새인 중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일반적인 내용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며,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것도 역시 똑같이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이 율법사가 어떻게 보면 뻔한 질문을 제기한 이유는 바로 앞에서 예수님이 부활논쟁에서 사두개인들을 굴복시켰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약점을 찾아보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한 마디라도 책잡힐 말을 하면 즉시 공격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마 22:41-46절에 나오는데,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던진 질문과 그들의 대답입니다. 줄거리는 간단하지만 그 뜻은 복잡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시 110:1절을 인용하면서 반론을 펼치십니다. 다윗이 이미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21, 22장에 걸쳐서 예수님과 유대교 고위층과의 충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 끝에 22:46절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유대교 지도급 인사들을 예수님이 언어의 논리를 통해서 완전히 제압한 것처럼 마태복음 기자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권위 앞에서 기가 죽어서 입을 다물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압도당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만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무턱대고 시비만을 일삼는 파렴치한 이들도 아닙니다. 나름의 탄탄한 논리로 예수님과 대립한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주장을 자신들의 신학적 논리에 근거해서 일관되게 펼친 겁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논리는 무엇일까요? 그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중에 오늘 설교 본문과 연관된 것만 두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우선 예수님은 율법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 법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인데도 길을 가다가 시장기가 들어 밀 이삭을 따서 손으로 비벼서 먹었습니다. 일하지 말라는 안식일 법을 어긴 겁니다. 예수님은 손이 장애인 한 사람을 안식일인데도 고치면서,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는 거지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율법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고 율법의 근본정신을 따르려고 한 것이지만, 일단 드러난 것만으로 본다면 율법을 상대화한 것은 맞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 첫 번째 이야기에서 율법사가 예수님을 향해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물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2)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가문이 별로 좋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1:43-51절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빌립은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그리스도를 만났는데, 그가 나사렛 예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이렇게 반문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예수님은 고향에서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가문이 아주 평범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 고위층 인사들은 나사렛 출신으로 목수의 아들인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두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다윗 자손 운운은 바로 이런 사실을 배경으로 합니다. 다윗 왕조 출신이 아닌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무조건 잘못 되었다고 매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리스도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리스도 대한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그것에 대한 전통도 있었고, 신학도 있었습니다. 그런 전통과 신학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신학에 나사렛 예수는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받아들이고 싶어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단논쟁을 하듯이 예수님을 논리적으로, 즉 신학적으로 허물어뜨리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여러 가지 말로 예수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해결이 되지 않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종교재판을 열어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몰아갔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사회선동죄를 적용해서 십자가 처형을 선고하도록 고발하고, 또 민중들을 선동해서 압력을 가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논쟁에서 승리자는 본문 46절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이 아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유대교 고위층이었습니다. 세상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일이 많습니다. 숫자가 많으면 이깁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이깁니다. 진리가 늘 승리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유대교 지도자들이 승리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무소리 못하고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기자는 46절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날부터 더 이상 예수님에게 감히 묻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기에는 마태복음 공동체가 처한 고유한 상황이 놓여 있습니다. 이게 예수님이 마 23장에서 그들을 과격한 어조로 비판한 숨겨진 이유입니다.

 

마태복음은 기원후 70년 이후 유대-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한 인물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게 신학적인 정설입니다. 70년은 유대 독립전쟁이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제압당한 해입니다. 예루살렘이 초토화되었습니다. 성전도 박살이 났습니다. 이런 대재난 이후 유대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했습니다. 율법과 그것의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율법을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는 집단을 축출해내기 시작했습니다. 첫 대상이 바로 유대-기독교인들입니다. 유대교는 유대-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율법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따르고 율법을 실천하라고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기독교는 이제 생존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기독교의 한 저술가가 마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그의 입장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좋게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적정한 선에서의 타협이 불가능할 때는 이제 생존을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투쟁해야만 했습니다.

 

2천 년 전 마태복음 공동체가 처했던 그런 특별한 상황이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저는 앞에서 몇 번에 걸쳐 강조한 구절인 마 22:46절 말씀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이 말씀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실제로 굴복 당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설적인 표현이라고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자꾸 말에 말을 이어갑니다. 사족을 자꾸 붙입니다. 공허한 이론을 전개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상대방을 공격합니다. 중언부언하는 방식으로 시비 거는 사람들을 우리는 말로 제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대답하지 못하고 묻지도 못하는 일은 하나님의 통치가 일어날 때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함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렸지만,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 부활 사건 앞에서는 예수가 율법을 중요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거나 가문이 좋지 않다는 시비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습니다. 모든 말들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넋두리이고 모든 신학이론은 교언영색에 불과합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바로 그 맥락을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고유한 방식으로 증명하신 부활 사건 앞에서 저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22:46절은 또 하나의 차원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마태는 기원후 70년의 대재난이 유대교만이 아니라 기독교를 향한 경고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교를 대표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전통에 막혀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율법과 신학은 진리를 향해 열려 있는 게 아니라 폐쇄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잘못은 남의 일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의 일이기도 했습니다. 온갖 이론과 주장과 전통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도 벌어질 조짐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주장을 절대화하고, 서로 뜯어 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린도교회도 사분오열 되었습니다. 성찬을 나누면서도 배부른 자와 배고픈 자들이 분열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교만하고, 어떤 이들은 자책감에 빠졌습니다.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이런 일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6장에 나오는 일곱 집사의 선택 이야기를 보십시오. 과부 구제 문제로 인해서 히브리파와 헬라파 기독교인들이 서로 다투었습니다. 마태는 이런 교회의 형편을 돌아보면서 자기주장을 앞세우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입을 다무는 방식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교회에서 아무리 잘못된 일이 일어나도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은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 시시비비를 따져야 합니다. 신학적인 명철한 판단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리 신학적으로, 또는 신앙적으로 높은 수준에 올라섰다고 하더라도 이러저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학을 이용해서 자신을 높이려고 합니다. 목회라는 미명 아래 목사가 자신의 목회적 업적을 쌓으려고 합니다. 대통령도 나라를 위한다는 이름으로 공명심에 휩싸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고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옳은 것을 주장해야 하지만 그런 주장에 이미 사심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 것을 뚫어보는 사람은 가능한 입을 다물게 됩니다. 바르트는 <복음주의 신학입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학은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고는 생명을 얻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경험이 아니고는 바르게 될 수도 없고 유용하게 될 수도 없다.” 이런 말은 신학만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 인생살이 전반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면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면 우리의 삶은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마태복음 기자가 말하듯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나이가 들면서 말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점점 더 많이 하게 됩니다.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것도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말이 많다는 것은 여전히 절대적인 생명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전히 전업 목사로 살고 있으니 진퇴양난입니다. 앞으로 상당한 기간 동안 말도 해야 하고, 특히 글은 더 많이 써야 할 겁니다. 설교자를 그만 둘 때까지 뭔가를 말을 해야 한다는 이 짐을 앞으로 어떻게 더 지고가야 할지 두렵기도 합니다. 누구를 닦달하거나 따져 묻는 방식이 아니라 내가 경험한 절대 생명,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현현, 하나님의 통치를 함께 나눈다는 생각에 기초해서 최소한으로 말하고, 최소한으로 글을 써야만 큰 잘못은 면할 수 있겠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설교 제목을 기억하시나요? ‘그리스도 논쟁을 넘어입니다. 그리스도 논쟁은 구원 문제이며, 생명 문제입니다. 이 주제는 우리 인생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논쟁으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취했던 태도처럼 시비를 붙으려는 방식으로는, 그것이 아무리 명석한 논리라고 하더라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구원과 생명 문제는 논쟁이 아니라 경험입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커피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도 커피 마니아도 크게 늘어난 것 같습니다. 커피 맛을 아는 사람은 그것으로 논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말과 이론으로가 아니라 맛에 대한 경험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경험을 서로 나누면서 신앙과 인생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을 서로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논쟁을 넘어 그리스도 경험의 차원으로 매일 한걸음씩 앞으로 나갑시다.

마태복음 22:34-46
https://youtu.be/N01_mVFMR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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