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이 임하리라!
(눅 21:25-36)
오늘 설교의 본문으로 삼은 눅 21:25-36절은 세 단락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첫째, 25-28절은 인자(사람의 아들)가 올 것이라는 묵시적 선언입니다. 둘째, 29-33절은 그것의 징조가 분명하다는 사실을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설명한 것입니다. 셋째, 34-36절은 그 때를 준비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각각의 단락이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다른 내용을 말하고 있는 같지만 ‘마지막 때’가 온다는 점에서는 모두 동일합니다. 그 마지막 때에 대한 것을 첫 단락은 ‘인자’ 개념으로, 둘째 단락은 ‘하나님 나라’로, 셋째 단락은 ‘그 날’이라는 단어로 묘사합니다. 마지막 때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2천 년 전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있는 누가복음 기자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인자’는 마지막 때에 세상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올 전능자를 가리킵니다. 곧 메시아입니다. 그 마지막 때는 곧 새로운 시작의 때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그 마지막 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이가 곧 인자, 즉 사람의 아들입니다. 인자 이야기는 구약에 종종 등장합니다. 에스겔서 2장 이하에 인자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겔 2:1, 이외 3,6,8절 참조) 다니엘서에도 나옵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단 7:13) 그 인자의 권세는 소멸되지 않고 영원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구약의 인자 개념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눅 21:28) 이런 인자 사상에서 핵심은 ‘마지막 때’와 ‘심판’입니다. 이 세상에 마지막 때가 이르게 될 터인데, 그 때 인자가 이 세상을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와 심판
마지막에 대해서 누가복음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눅 21:25) 마지막 때에 해와 달과 하늘의 모든 별들이 흔들린다고 합니다. 바다가 요동치고 큰 파도가 몰아칩니다. 이 때 모든 민족들이 극심한 혼란에 빠집니다. 26절에서는 하늘의 권능이 흔들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계 6:13,14) 이런 구절들은 지구를 포함한 우주 전체가 해체된다는 뜻입니다.
과연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까요? 지난 인류 역사에 인류의 종말이나 우주의 최후를 예언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프랑스의 의사이자 신비주의철학자인 노스트라다무스(1503-1566)의 예언이 가장 유명한 것 같습니다. 그는 나중에 교황이 될 사람을 정확하게 짚었으며, 프랑스 왕 앙리 2세가 마상경기의 사고로 죽을 것을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예언이 적중한 탓인지 1999년 7월에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온다는 그의 예언도 크게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인류와 지구의 최후를 주제로 하는 영화도 많습니다. 최근에는 <2012>이라는 영화가 인기를 끈다고 합니다. 고대 마야문명 시절부터 2012년이 인류 멸망의 해라는 예언이 있었다고 하는데, 과학자들은 오랜 연구 끝에 그것이 확실하다는 판단을 내립니다. 지진, 화산폭발, 해일 등으로 모든 인류가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인류의 후손을 남기기 위해서 우주선을 만든다고 합니다.
우주가 총체적으로 파괴되는 때가 올까요? 우주까지는 가지 말고 지구만 생각합시다. 그 중에서도 인류만 생각해 봅시다. 인류가 이 지구에 더 이상 살 수 없는 그런 순간이 올까요? 이게 허무맹랑하거나 영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 지구는 우주의 한 귀퉁이에 떠 있는 태양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지구는 계속 움직입니다. 그게 몸으로 느껴지지는 않겠지요. 우리가 오감으로 느껴야만 확실한 건 아닙니다. 태양계 안에는 수많은 행성과 혹성과 유성과 혜성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일정한 궤도에 따라서 움직이기도 하고 제멋대로 움직이기도 합니다. 만약 지금 지름 1킬로미터 되는 혜성이 지구에 부딪친다면 모든 생명은 끝장이 납니다. 개미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개미도 결국은 사라질 겁니다. 또 빙하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인류는 지구에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인류가 문명의 꽃을 피우고 있는 지금은 1만 년 전에 빙하기가 끝나고 새롭게 시작될 빙하기 사이인 간빙기에 해당됩니다. 이런 큰 자연재난만이 아니라 인간의 소비 문명에 의해서 지구의 생태적 균형이 급격하게 깨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인자가 올 마지막에 대한 성서의 증언이 바로 위에서 설명한 것과 똑같은 종말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겉으로만 보면 아주 비슷합니다. 우주의 해체를 말하니까요.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성서는 기본적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로 봅니다. 하나님은 선하고 정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그의 창조 행위도 역시 선하고 정의롭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고 아름답다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노아 시대에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서 물로 심판을 내리셨지만 하나님은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앞으로 이런 재앙이 없을 것이라고 노아와 약속했습니다.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창 9:15) 성서와 기독교 신앙에 따르면 이 세상은 허무하게 해체되는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딛고 있는 땅은 탄탄합니다. 비록 홍수와 지진과 해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토대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본문은 왜 일월성신이 뒤틀리고 바다와 땅이 흔들린다고 말하는 걸까요? 그것이 결국 세상의 예언자들이 말하는 인류 멸망과 똑같은 게 아닐까요? 성서가 말하는 종말은 해체와 파괴가 아니라 오히려 세움과 들어올림입니다. 그것은 죽임이 아니라 살림입니다. 그것은 중단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입니다. 그런 세계를 누가복음은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온다고 표현했습니다.(눅 21:27) 그리고 그 때는 곧 ‘속량’의 때입니다.(눅 21:28) 그렇습니다. 인자가 오는 때는 구원의 때입니다. 생명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바로 위에서 인용한 두 구절이 무엇을 말하는지 보십시오. 거기에 기독교가 희망하고 기다리는 미래가 담겨 있습니다. 인자는 능력과 영광을 가진 분입니다. 그가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이는 곧 능력과 영광을 가진 인자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능력과 영광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21세기의 놀라운 과학도 우리를 이 세상에서 조금 더 편리하게 살도록 도와줄 수는 있지만 능력과 영광은 없습니다. 인간과 과학은 바로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합니다. 아주 무능력합니다. 이 말이 이상한가요? 이상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과학의 능력은 지금 이런 세상 안에서만 발휘되지 인자로 인해서 완성될 세상에서는 무기력합니다. 무슨 말인가? 인자로 인해서 완성될 세상은 지금의 세상과 전혀 다릅니다. 조금 다른 게 아니라 완전히 다릅니다.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총체적으로 다릅니다. 양적으로 다른 게 아니라 질적으로 다릅니다. 세상을 개량하는 게 아니라 전복시킵니다.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그게 어느 정도인지를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외계인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질적으로 다른 세상이라고 해서 해괴한 세상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게 좋겠군요. 여기 코스모스 씨앗이 있다고 합시다. 굵기가 1,2미리, 길이가 1센티 정도 되는 가늘고 길쭉한 모양입니다. 그게 봄에 땅에 심겨졌습니다. 조금 지나면 거기서 화사한 코스모스 꽃이 핍니다. 씨앗만 놓고 본다면 꽃은 상상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세계입니다. 씨앗과 꽃을 따로 놓고 본다면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그러나 씨앗과 꽃은 신비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씨앗과 비슷합니다. 씨앗이 때가 되면 꽃을 피우듯이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꽃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그걸 이루실 분이 바로 능력과 영광으로 오실 인자이십니다. 인자에게만 그런 능력이 있으며, 그런 세상이 바로 그분의 영광입니다.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냥 그대로 믿을 수도 있겠지만, 뭔가 속 시원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인자가 세우실 세상이 아무리 새롭다고 하더라도 그건 지금 우리와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라서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보다 지금 당장 여기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더 나아가서 여기서 이웃들과 평화롭게 사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틀린 생각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이 자칫하면 이원론적이고 초월적인 종말론에 빠져서 현실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역사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자주 일어났습니다. 1992년 다미선교회 사건은 단적인 예입니다. 거기에 속했던 사람들은 1992년 10월28일에 세상의 종말이 오고, 자신들만 휴거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직장과 학교도 그만 두고 매일 종교적인 집회에만 몰두했습니다. 이런 신앙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현실의 역사에 발을 굳건히 딛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 이뤄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있는 이 세상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불완전합니다. 창조가 아직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는 참된 안식이 불가능합니다. 오죽했으면 묵시적 문서들이 죽음을 영원한 안식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보십시오. 우리가 여기서 경험하는 것들은 모두 지나갑니다. 여러분의 젊음을 보세요.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우리가 소유했던 것들도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이 빠져나가듯이 모두 빠져나갑니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그 어떤 것으로도 생명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우리 운명의 종착역이 죽음이라는 사실은 바로 이에 대한 단적인 증거입니다. 우리의 이웃 종교인 불교가 해탈을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의 모든 집착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야만 열반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 열반은 기독교 용어로 구원, 또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많은 점에서 우리와 다르지만 그들도 지금의 세상과 삶이 이것 자체로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만은 우리와 다를 게 없습니다.
깨어 있으라
불완전한 이 세상이 완전하게 질적으로 변형되는 그 하나님의 때가 구체적으로 언제일까요? 그 때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도 모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압니다. 그러나 그 때의 징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비유로 설명합니다.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는 것처럼 마지막 때의 징조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사이비 종말론이 창궐할 때 그들은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666이나 144,000이라는 숫자를 세계사의 큰 사건과 연결해서 설명하곤 했습니다. 유럽 연합(EU)이나 상품의 바코드를 실례로 들었습니다. 자연재해를 예로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주장들은 모두 공허한 것들입니다. 사람들에게 공연한 두려움을 조장함으로 종교적 열정을 불러내려는 행태들입니다. 그런 것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마지막 때가 “덫과 같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두 말씀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들릴 겁니다. 한편으로는 마지막 때의 징조를 알아볼 수 있다고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걸 예상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모순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징조가 보일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전혀 보이지 않을 겁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누군가요? 본문이 구체적으로 지적합니다.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진 사람입니다.(눅 21:34) 세상의 일에 모든 영혼이 치우쳐 있는 사람들입니다. 삶을 향한 의지와 열정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성취, 자기만족에 몰두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치켜세웁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결국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만듭니다.
마지막 때의 징조를 보는 사람은 누군가요? 오늘 본문에 따르면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눅 21:36)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며 깨어 있다는 건 생명의 중심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힘인 성령과 민감하게 공명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지막 때의 징조를 볼 수 있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이런 사람에게는 그 마지막이 내일이든지, 10년 후이든지, 10억년 후이든지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지막 순간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인식하고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교회력의 시작인 2010년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을 기억하며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유는 예수님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인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마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심판주로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이 바로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을 구분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지난 2천년동안 기다렸지만 아직도 오지 않을 걸 보니 그의 약속이 확실하지 않다는 불안, 의심을 하지 마십시오. 2천년은 하룻밤과 같습니다. 그분이 오시어 생명이 확 드러나면 그 시간의 신비도 모두 밝혀질 것입니다. 마지막 그 때를 공연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때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받는 순간입니다.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구원의 그 날이 속히 올 것입니다. 이미 왔습니다. 2천 년 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대림절 첫 주일, 2009.11.29.)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