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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그 온전함에 관하여 (욥 1 : 1 ~ 5)

2024년 9월 22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MMy-Q9kuerk?si=MfXZfXcQ48z2YD3b

▣ 들어가는 말 

- 이것이 네가 사는 세상이다!

타네하시 코츠의 『세상과 나 사이』라는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2014년 8월 9일. 미주리주 퍼거슨에서 열여덟 살 흑인 소년 마이클 브라운이 한 편의점에서 담배 몇 갑을 훔친 뒤 신고를 받고 출동한 백인 경찰관과 실랑이 벌이다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비무장 소년에게 열두 발을 발사한 경찰에 대한 항의 시위가 보름간 이어졌는데, 이후 이 사건은 퍼거슨 사태로 불리게 되지요.

“마침 그때가 마이클 브라운을 죽인 사람들이 풀려날 거라는 소식을 네가 듣게 된 바로 그 주였지. 자신들이 쥔 불가침의 권력을 무시무시하게 선언하기라도 하듯 그의 죽은 몸뚱이를 길거리에 팽개쳐 두었던 그 사람들은 결코 처벌받지 않을 터였다. 나는 애초에 어느 한 명이라도 처벌될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어. 하지는 너는 어렸고 아직 믿고 있었지. 그날 밤 너는 밤 11시까지 자지 않고 기소 발표가 나기를 기다리다가, 뉴스에서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다는 보도가 나오자 이렇게 말했어. ‘그만 들어갈게요.’ 네가 방으로 들어간 뒤, 나는 네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5분 후에 나는 네 방에 들어갔지만 너를 안아 주지 않았어. 너를 위로하지도 않았어. 너를 위로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주지도 않았어. 괜찮아질 거라고는 절대 믿지 않았으니까. 대신에 내가 너에게 한 말은 네 할머니 할아버지가 늘 나에게 하셨던 바로 그 말씀이었어. ‘이것이 너의 나라다. 이것이 네가 사는 세상이다. 이것이 너의 몸이다. 너는 이 모든 것 안에서 살아 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검은 몸을 하고 꿈속을 헤매는 나라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은 나에겐 평생의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 질문을 좇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그 질문의 답이라는 걸 깨달았다.”

미국의 흑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글입니다. 2015년 출간된 이 책은 출간 1년 만에 100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고, 2015년 전미도서상, 주요 서점/매체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인종차별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유색인종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겉보기에 멀쩡한 이 세계는 얼마나 야만적이고 폭력적인지… 우리가 사는 세계와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뼈아픈 상처를 남기고 또 상처를 받고, 신념이나 종교나 관습이나 종교 등의 왜곡되고 편향된 생각과 행동으로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극을 생산하고 있을까요.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지요. 이런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좇으며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신앙이라는 또 다른 편협된 아집으로 누군가를 고통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무런 편견과 차별 없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진정으로 자유를 누리며 세계와 삶을 사랑하며 사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요. 우리는 영원히 이러한 질문의 답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질문을 놓지 않고 좇는 것이야말로 그 질문의 답이라 생각이 되네요.

▣ 신들의 세계가 저물다!

- 신들은 누구인가?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 가운데 한 사람인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헤라클레스』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영웅인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의 아들이지만, 여신 헤라 때문에 미쳐버립니다. 신이 불어넣은 광기에 빠져 부인과 자식들을 살해하게 됩니다. 헤라클레스는 희곡의 끝에 가서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에게 그렇게 묻습니다. “누가 그런 신에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인들이 세상과 삶의 문제를 신화를 빌어 해석하고 이해했으나, 그 신들에 대한 회의와 의심이 싹트게 된 것이지요. ‘이런 신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물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에우리피데스는 『트로이아의 여인들』에서 전쟁에서 패배한 트로이아의 왕 프리아모스의 부인 헤카베는 남편을 잃고 미지의 신에게 기도합니다. “오, 땅을 지탱하시고 땅에 의해 지탱을 받는 분이시여, 당신이 누구시든, 우리의 앎을 넘어서는 힘이든, 제우스든, 자연의 엄격한 법칙이든, 인간의 지성이든, 어쨌든 당신에게 나는 기도합니다. 당신이 소리 없이 움직이면서 인간의 모든 일을 정의의 방향으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신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고 있지만, 동시에 신인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인간, 생각하는 인간

이렇게 신화와 신들에 대한 의심과 회의가 커갈 무렵,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소피스트들이 등장하지요. 페리클레스의 친구이기도 했던 프로타고라스는 제자들에게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라고 가르칩니다. 전해 들은 말이나 간접적인 정보를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모든 진리를 자신의 판단과 경험에 비추어 시험해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다.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존재하는 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대로.”라는 위대한 명제를 남겼지요. 소피스트들은 불안이 깊어지는 시대에 체계적인 의심을 가르칩니다. 신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힘을 믿으라는 것이지요. 소피스트들은 인간이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운명은 신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인 된 인간, 자유로운 인간을 선언한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이 자기 말과 행동에 전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을까요…

- 이성의 정체

기원전 430년에 역병이 돌아 과밀한 도시 아테네가 생지옥으로 변합니다. 전체 인구의 25%에 해당하는 약 2만 명이 목숨을 잃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독실한 신자들이 불신자들과 함께 고통을 겪는 것을 지켜보면서 공포와 비통에 사로잡혀 신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지요. 그리고 더불어 아테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위대한 지도자 페리클레스에 대한 신뢰도 무너지고 결국, 페리클레스는 자리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몇 달 뒤 다시 권좌에 복귀하지만, 기원전 429년 가을에 세상을 뜨고 맙니다.

페리클레스가 죽고 나서 몇 달 뒤 소포클레스는 다시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오이디푸스 왕』을 공연합니다. 연극의 배경이 되는 도시는 테베입니다. 도시에 역병이 창궐합니다.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라이오스 왕이 살해되었는데 복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오이디푸스는 역병의 원인을 찾는 조사를 합니다. 그 결과, 자신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를 죽였고, 그뿐만 아니라 알지 못하는 채로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오이디푸스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평판이 높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오디아’, 즉 ‘나는 안다’에서 왔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스스로 생각했던 자신의 모습과 정반대 인물이 되고 말았지요. 그는 무지했으며, 그것이 치명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그가 마주한 진실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한 일을 알고는 스스로 눈을 뽑아버리지요. 오이디푸스는 그 유명한 ‘지혜’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진실에는 눈이 멀었던 것이지요. 백성들과 신하들에게 성스러운 존재로 존경받았지만, 오히려 범죄자가 되고 맙니다. 죽음과 질병의 ‘미아즈마’를 도시에 가져온 장본인입니다.

오이디푸스는 평생 바르게 행동하려고 노력했으며, 늘 최선의 조언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괴물이 되고 말았으며, 자기 도시를 오염시켰고, 당시에는 의미를 몰랐던 행동 때문에 가망 없이 더럽혀지고 말았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유죄인 동시에 무죄였으며, 행위자인 동시에 피해자였습니다. 오이디푸스는 확실성, 명료함, 남들이 말하는 이른바 통찰이란 것을 버린 뒤에야 인간 조건의 어두운 모호함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 이성은 과연 믿을 만한가?

기원전 431년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 때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가 공연됩니다. 이아손과 결혼하고 그가 황금 양털을 찾는 것을 돕지만, 남편에게 잔인하게 외면당한 콜키스 여자의 이야기이지요. 메데이아는 복수로 이아손의 새 부인, 그 부인의 아버지, 마지막으로 이아손과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입니다. 아들들을 죽이려는 자신의 혐오스러운 계획에 저항하는 강력한 모성 본능과 싸우며, 메데이아는 그렇게 하지 않고는 이아손을 진정으로 벌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인간을 신화로부터 해방하는 이성은 오히려 생을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도구가 되어 갑니다. 메데이아는 너무 똑똑하기 때문에 가장 효과적인 복수 방법을 찾아내지 않을 수 없고,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것을 실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고통에 대한 성경의 대답

- 고통에 대한 세계의 이해 = 인과응보

지독한 고난을 겪고 있는 욥에게 세 친구가 찾아옵니다. 그들은 욥을 위로하고 충고하지요. 핵심은 이렇습니다.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4:7. 엘리바스).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8:4. 빌닷).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11:14. 소발).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22:5. 엘리바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25:4. 빌닷). 사회 문화적 관습인지, 양심인지 모르겠지만,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너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죄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우리 삶이 이렇게 일그러지고 고통스러운 것은 죄 때문이랍니다. 내 모습이 이 모양 이 꼴인 이유는 결국 내가 지은 죄 때문이요. 내가 아니라면, 부모가 지은 죄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조상이 지은 죄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혹은 이 사회와 공동체가 고통과 불행을 겪는 이유 역시 누군가의 잘못과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욥 친구들의 목소리는 시도 때도 없이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네 잘못이야.’ ‘네 탓이야.’ 이러한 인과응보의 논리에서 자유 할 수 있을까요?

- 욥의 저항

이러한 친구들의 비난과 질책에 욥은 끊임없이 거부합니다.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10:7) “나는 온전하다마는…”(9:21) “나는 결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내가 죽기 전에는 나의 온전함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27:5) 자신은 결코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온전하다고 주장합니다. 한편으론 그의 당당한 주장이 부럽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 오만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이 말은 너무나 당연하게 보이지 않나요. 세상에 감히 누가 신 앞에서 내가 의롭다고 온전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 온전하고 정직하여

욥기의 주제는 “온전함”에 관한 것입니다. 1: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기의 여는 말입니다. 성경은 욥을 통해서 ‘온전함’이 무엇인지를 말하려 하는 것 같습니다. 1:8 “온전하고 정직하여” 2:3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2:9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4:6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 27:5 “온전함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31:6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 욥은 끊임없이 자신의 온전함을 변호하고, 또 자신이 평생 추구해 온 길이 온전함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전함은 죄를 짓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 누구도 신 앞에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 역시 한낱 인간,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1:5 “성결하게 하되… 번제를 드렸으니…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은 끊임없이 자신의 죄를 신께 의탁합니다. 자신의 삶을 살펴보고 자신의 잘못을 신께 맡깁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온전함의 의미인 것 같습니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42:7) 분명 욥의 말과 행동, 삶이 완전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친구들에게 욥의 말이 옳다고 선언합니다. 그의 삶이 온전하다고 인정합니다.

 

▣ 나가는 말

- 신화를 넘어 이성으로, 이성을 넘어…

위대한 그리스인들은 아테네의 영광이 사그라지고 현실의 고통과 비극 속에서 그들이 의지했던 신들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허물어져 가는 경험을 합니다. 아울러 그런 신화를 벗어나 생각하는 인간, 위대한 인간의 이성을 발견해내지만, 그 이성 역시 삶의 고난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리도 위대한 인간의 통찰과 이성, 철학으로도 삶의 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수 없고 오히려 그 이성의 한계, 초라함만 뼈저리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스인들의 통찰은 고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성과 합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고통과 고뇌를 그저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때에야 비로소 평안을 찾는 것일까요. 결국, 삶은 이해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일까요. 그러기에 삶은 비극이며, 고통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부조리한 인간의 초상을 견디며 사는 것이지요. 마치 굴러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바위를 산 정상으로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코린토스의 왕 시지푸스처럼 말이지요.

- 그 온전함에 관하여…

욥기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 선언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상적 인간. 이상적 삶을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보기에, 세계가 보기에 세상은 너무나 부조리하며, 인간은 온통 추하고 더러운 죄인 된 존재이며, 그러기에 인간의 삶은 고통과 비극으로 가득한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악에서 떠난 자라” 선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신을 경외하는 자의 삶, 신을 경외하는 세계는 너무나 아름답고 고귀하며 완전하다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이에 대해 욥의 친구들은, 세계는, 심지어 우리 자신마저 세상은 악하다고, 우리 죄 때문에 삶은 이리도 파괴되었다고, 세상에는 희망이 없다고, 우리는 추하디추한 죄인일 뿐이라고, 그러니 이런 세계에서 정의니, 평화니, 사랑이니, 희망이니, 섬김이니, 나눔이니… 그딴 것은 허상일 뿐이라 말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욥기의 마지막 부분에서(38장) 여호와께서 등장하셔서, 끝없이 이어지는 온전하냐, 그렇지 않으냐의 논쟁에 대해 답합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38:2) 하시며,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38:4) 창조에 관한 내용으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죄인이냐, 아니냐의 문제에 대답이 빗나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대답이야말로 놀라운 통찰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과율을 벗어나라. 선하면 복을 받고 악하면 벌을 받는다는 굴레에서 벗어나라.” 말씀 같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혀 늘 죄책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라는 선언 같습니다. “창조에 선과 악이 있었느냐? 창조에 인과율이 있었느냐? 내가 세상을 아름답게 지은 것이 아니냐? 내가 너희를 아름답다 하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아들이라 하지 않느냐? 내가 너를 온전하다 하는데, 감히 누가 너를 죄인이라 하느냐? 내가 세상을 아름답다 하는데, 누가 그렇지 않다 부인하느냐?” 결국, 욥의 온전함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신의 창조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너는, 세계는, 삶은 선과 악을 넘어선 아름다움과 고귀함과 조화와 어울림… 예술적 경지의 세계다. 내가 너를 빗을 때, 세상을 지을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세계를 원하고 바라신 것이 아니냐. 그러니 너는 나를 믿고 너희의 삶이 초보적이고 유아적 수준(인과응보)에서 벗어나 예술적 경지, 아름다움의 경지에 다다라야 하지 않겠느냐? 인과응보의 논리에 빠져 삶을 더욱 파괴하지 말고, 그것을 신께로 가는 통로로 삼아라. 신의 사랑을 깨닫는, 신의 품에 안기는 기회로 삼아라. 너희 삶이 태초에 신께서 지으셨던 “아름다움”의 경지, 예술의 경지로 나아가도록 하라. 너를 무한히 사랑하고 너에게 한없는 지지와 성원과 은혜를 베푸시는 신을 믿어라. 그리고 당당히 완전의 길로 나아가라. 온전함을 믿고 그 온전함의 삶을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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