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5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0764Ouw_lPI?si=HrT4AfdchJdsDcRc
▣ 들어가는 말
-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꽤 오래전에 읽은 책입니다. 티베트 고원에 위치한 ‘라다크’라는 지역에서 16년을 보낸 작가가 그곳 사람들의 삶에 대해 기록한 글이지요. “미국의 경우 한 아동이 1년 동안 텔레비전을 통해 접하게 되는 광고 방송의 수가 평균 4만 회에 이른다고 한다. 심층적으로 파고드는 그 광고들은 어린이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싶거나 눈에 띄고 싶거나 인정받고 싶다면 우리가 만든 운동화와 청바지와 장난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에 대해 아이들이 치러야 하는 대가는 자기부정, 심리적 붕괴, 폭력 성향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대단히 심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대화로 인해 개성의 파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역의 정치 경제적 연계가 붕괴됨에 따라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의 본질에서 벗어나 익명성의 그늘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경향을 보인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대신 무엇을 가지고 있는 지에 의해 평가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입고 있는 옷과 다른 소유물의 뒤에 숨어 들어갔다.”
이 책은 현대인들에게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발전과 문명이라는 것이 오히려, 얼마나 인간성과 삶을 파괴하는지 경적을 울렸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시골 마을 공동체의 삶에서 누구도 홀로 굶어 죽을 것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모두의 아이들이었고 안전했고 모두에게 돌봄을 받았습니다. 한 집의 큰일도 마을이 함께 했지요. 과거가 모두 좋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문명화, 진보, 발전 등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있음을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 『맹자』 고자장
제가 자주 인용하며 좋아하는 구절을 다시 소개합니다. “인유계견방 즉지구지”(人有鷄犬放 則知求之) - 사람이 집에서 기르던 개나 닭을 잃어버리면 그것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유방심 이부지구”(有放心 而不知求) - 그런데 마음을 잃어버리면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모른다. “학문지도무타 구기방심이이의”(學問之道無他 求其放心而已矣) - 학문의 길은 다른 게 아니다. 그 달아난 본래의 자기 마음을 찾는 것뿐이다.
신앙은 자기 마음을 찾는 것, 신 앞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 참된 인간의 삶인 ‘신 앞에서의 삶’을 회복하는 것이 전부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각자의 사연과 이야기를 가지고 나름의 진리, 진정한 신앙을 찾아 지금 이 자리까지 와 있습니다. 분명 우리는 옛날보다 훨씬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누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정작 정말 가져야 할 것은 가지지 못하고 잃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 잃어버린 한 마리 양 찾기
- 라이언 일병 구하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전사자 통보 업무를 진행하던 중 네 형제가 모두 참전한 라이언 집안에서 세 형제가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셜 장군은 막내아들인 제임스 라이언을 반드시 찾아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밀러 대위는 7명의 대원을 데리고 라이언 일병을 찾아 나서지요. 부대원들이 “도대체 이런 이상한 계산이 있느냐?” 불평하며 투덜대자, 밀러 대위는 “라이언은 착한 사람일 거다. 우리가 구할 가치가 있을 만큼”이라고 답합니다. 작전을 수행하며 수 없는 고통과 위기, 죽어가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부대원들은 ‘이것은 과연 여덟 명의 목숨을 걸 만한 일인가…’ 끊임없이 되뇌며 고뇌합니다. 그들은 마침내 라이언을 찾아내지만, 마지막 전투에서 밀러 대위를 포함한 모든 대원이 전사하고 말지요. 죽어가는 밀러 대위는 라이언에게 “나는 네가 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기를 바란다. 이 모습들을 감사히 받아라.” 말합니다. 이는 “당신은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희생 위에 살고 있다” “그만큼 가치 있는 삶을 살아라” “죄책감에 빠지지 말고 그들이 행한 일을 감사히 받아들여라”라는 뜻일 것입니다. 이것이 영화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노인이 된 라이언은 밀러 대위와 대원들의 무덤을 찾아와 울먹입니다. 그 장면에서 영화는 우리에게 심각한 질문을 던집니다. “수많은 전쟁 끝에 살아남은 당신은 과연 그 희생의 대가로 살아남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는가?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 바쳐진 전우들의 거룩한 희생을 과연 그대는 감사하게 받으며 살아왔는가?”
이 영화를 보면서 놓칠 수 없는 물음은 “한 사람을 위해서 훨씬 더 많은 이들이 희생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입니다. 수많은 병사를 희생하면서까지 한 사람을 꼭 구출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왜 그래야 하는가? 밀러 대위는 “라이언은 착한 사람일 거다. 우리가 구할 가치가 있을 만큼”이라 했지만, 그것은 말이 안 되는 비교이지요. 한 사람의 선함의 가치가 여덟 사람의 생명 가치보다 클 수 있을까요.
- 하나를 찾아 나서는 목자
그런데 오늘 성경의 본문은 영화와 똑같은 모습, 아니 훨씬 더 나아간 모습을 보여줍니다. 비유에서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판에 내버려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가는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지요. 예수는 “너희 중에…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물으시며, 그런 행동이 지극히 당연하지 않은가 되묻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얼핏 그럴 수 있겠다고 여겼으나 저는 오히려 99를 두고 1을 선택하는 것이 어떻게 당연한 거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나요.
99:1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저는 솔직히 한 마리 양을 잃어버린 것이 속상하겠지만, 아흔아홉을 내버려 두고 한 마리를 찾으러 나서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99에 비하면 1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매우 작은 것이니 말입니다.
-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은 누구인가?
그런데 어떻게 이런 선택이 가능할까요? 잃어버린 한 마리는 대체 누구일까요? 무리에서 떨어진 자, 어울리지 못하는 자, 낙오자, 실패자, 루저… 왜 낙오했을까요? 아마 가장 연약하고 아픈, 소위 정상적이고 건강하지 못한 녀석일 것입니다. 장애인이건, 건강에 이상이 있건, 나이가 너무 많건, 심하게 연약하게 태어났건… 늘 배제되고 제외되고 외면받는 존재였을 테지요. 어떤가요? 그들은 버리고 가야 할까요? 외면해야 할까요?
1~3절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비유의 대상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종교적으로 열정이 있고, 헌금도 많이 내고, 사회적 신분도 높고, 도덕적으로 매우 건전한 자신들을 외면하고 비굴하고 추한, 하나님의 율법을 한 번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자들, 가난하고 지저분하고 천박한 자들인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하는 예수의 모습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는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내버려 두고 미약하기 짝이 없는 세리와 죄인들을 맞이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께로 몰려드는 데 심기가 대단히 불편할 수밖에요. ‘어떻게 나를 이렇게 대우하지?’ ‘내가 저런 천박한 것들보다 못하다는 거야?’
어떠신가요? 우리는 어디에 속할까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인가요? 아흔아홉 마리의 건강한 양에 속할까요?
- 나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여기서 ‘일백’이라는 수는 전체성, 완전성을 상징하는 수입니다. 아흔아홉은 완성이 깨어진 수가 되는 것이지요. 이 세계의 질서는 이기고 승리하는 이를 위한 세계입니다. 낙오하고 패배한 자는 배제되고 잊힙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구석으로 치워집니다. 사실 없는 것이 나은, 세상에 짐만 되는 존재이지요.
그러나 성경의 세계, 하나님의 나라는 배제하고 제외하면서 승리자들만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있어서 마침내 ‘일백’이 완성되는 세계입니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외면당하는 그 하나를 찾아 나서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 나라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잃어버렸던, 빠져버렸던 그 하나가 채워질 때, 찾아질 때, 신의 나라가 완성될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비유 다음에 이어지는 잃은 아들의 비유에서도 꼭 같은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온전한 가족의 완성을 깨뜨리는 것은 작은아들이 아니라, 오히려 전혀 문제가 없는 모범적이라 믿었던 큰아들이었지요. 잃어버린 것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마음을 깨닫지 못하는 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큰아들은 가족 공동체의 축제를 거부합니다. 공동체의 완성이 아니라 자신만을 위한 가족, 자기만 주인공이 되는 세계를 꿈꾸는 것이지요. 아버지가 몸소 나와 달래지만 그는 분노를 멈추지 않습니다. ‘아버지’라는 호칭 대신 “보십시오.”(Look! 우리말 성경에는 없다)라는 모욕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경외심이나 친근감은 없습니다. 더욱이 그는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노예와 주인의 관계로 축소하면서 아버지의 부당함을 공격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15:29) 동생의 죄를 과장하면서,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15:30) 아버지를 무시하고 가족의 신뢰와 애정의 관계 전부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 고통스러운 진실!
- 진실을 보는가
완고한 모범적이고 순종적인 큰아들을 보면서, 성경의 말씀을 목숨처럼 여기며 지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보면서, 아흔아홉을 두고 하나를 향해 가는 것이, 지극히 마땅했던 예수와 하나를 버리고 아흔아홉을 선택하는 것이, 옳고 마땅하다 여기는 나의 모습을 봅니다. 나는… 1을 향해 가는 목자가 이상하게 보이는 나는… 대체 나는 누구일까요?
- 용서하지 못하는 자베르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는 빵을 훔친 죄로 감옥에서 19년 중노동을 선고받은 장발장이 등장합니다. 그는 감옥에서 점점 더 사나운 죄수가 되지요. 출소한 후에 당시 죄수들은 신분증을 가지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누구도 이 위험한 전과자를 받아주려 하지 않지요. 궂은 날씨에 묵을 곳을 찾아 나흘이나 시골길을 헤매던 그에게 마침내 친절한 신부가 자비를 베풀어 줍니다.
그날 밤 장발장은 찬장을 뒤져 은잔을 훔쳐 달아나고 이튿날 아침 경찰 세 명이 장발장을 끌고 신부에게로 옵니다. 아마 장발장은 평생을 감옥에서 썩어야 할 운명이었을 테지요. 그러나 신부의 반응은 “다시 오셨군요. 참 다행입니다. 제가 은잔뿐만 아니라, 촛대까지 드렸던 것을 잊으신 모양이죠? 이것도 은이라서 족히 200프랑은 나갈 겁니다. 깜빡 잊고 놓고 가셨나요?” 경찰이 떠나자 신부는 떨고 있는 장발장에게 촛대까지 주며 말합니다. “그 돈을 정직한 사람이 되는 일에 쓰시기로 저와 약속한 것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신부의 행동에 장발장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던 그의 영혼은 치유되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삶을 살게 되지요. 그러나 장발장을 수상히 여기고 못마땅해하던 냉철한 자베르 형사는 20년간을 뒤쫓아 다니지요. 정의밖에 몰랐던 그는 어느 날 오히려 위기의 순간 장발장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게 되고, 그러한 은혜를 경험한 후에 자베르 형사는 자신의 마음속에는 그러한 용서가 없음을 깨닫고, 자괴감으로 세느강 다리에서 몸을 던지고 말지요.
자베르의 죽음은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도 용서하지 못한 자의 파멸을 보여줍니다. 동생을 용서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형은 어떤 신앙을 가진 사람인가요? 세상의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교회는 어떤 신앙인가요? 아버지는 용서하는데, 하나님은 인간을 용서하는데, 인간은 인간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네요.
길을 잃고 떨고 있는 한 마리 양을 짊어지고 돌아오는 목자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자신들의 목숨을 희생해야 했지만 라이언 일병을 구한 그 병사들의 마지막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걸인과 같은 모습으로라도 돌아와 주어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던 아버지의 마음은요.… 바로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닐까요. 하나님 나라 아닐까요.
우리는 어떤 모습인가요. 우리 교회는, 우리 신앙은 정말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중일까요.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