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30일 예배 영상 https://www.youtube.com/live/NmmRcUV7HGQ?si=gMztHIoguz13bXGo
▣ 들어가는 말
- 기다림이 사라진 시대
우리는 이 시대를 종종 ‘즉시성의 시대(instant age)’라 부릅니다. 버스가 언제 오는지 초 단위로 확인하고, 정보는 검색 즉시 우리 손안에 들어오며, 택배는 밤에 주문하여 새벽이면 도착하는 세상입니다. 심지어 AI의 출현으로 더 이상 학습이 필요치 않게 여겨지는 놀라운 세상이지요. 이 시대의 속도는 우리에게 놀라운 편리함을 주었지만, 동시에 한 가지 인간적인 능력을 빼앗아 갔습니다. 바로 ‘기다림’이라는 능력입니다. 기다림은 단순한 시간의 소비가 아닙니다. 기다림은 존재의 방식이며, 삶을 바라보는 태도이며, 무엇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기다림은 불편함입니다. 기다림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라 비효율로 보이며, 기다림을 견디는 능력은 ‘낭비’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기다림을 잃으면, 사실 우리는 존재의 깊이를 잃습니다. 불확실성, 예측 불가능함, 정답 없는 시간… 우리는 이런 시간을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기다리지 않으려 하고, 기다림을 제거하려 하고, 기다림이 필요한 상황을 회피하려 합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터미널』은 바로 이 기다림의 미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동유럽의 작은 국가 ‘크라코지아’에서 미국 JFK 공항으로 도착한 한 남자, 빅터 나보르스키(톰 행크스)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공항에 도착한 바로 그 시각, 그의 조국에서 갑작스러운 쿠데타가 일어나 정권이 붕괴하고 국가 체제가 멈춰버립니다. 바로 그 순간, 미국 입국 비자도 효력을 잃어버리게 되지요. 미국으로 들어갈 수 없고, 조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입국장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그는 말 그대로 공항이라는 “무국적의 공간”에 갇힌 존재가 됩니다. 그의 삶은 갑자기 일시 정지되고, 그는 어쩔 수 없이 기다림의 시간과 공간을 살게 됩니다.
JFK 공항 터미널은 ‘삶의 중간 지대(in-between)’를 상징합니다. “떠났지만 아직 도착하지 못한 곳”, “모든 것이 멈추었지만 여전히 삶은 계속되는 곳”, “국적을 잃은 이가 잠시 머물지만 영원히 머무를 수도 없는 곳”. 철학적/신학적으로 말하면,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실존의 상징입니다. 대림절이 가진 시간적 구조와도 완전히 일치하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빅터가 공항이라는 거대한 ‘멈춤’의 공간에서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작은 공동체를 만들고, 사람을 도우며, 언어를 배우고, 사랑을 경험하고, 결국 자신이 왜 그곳에 와 있는지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시간은 멈췄지만, 그의 존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다림 속에서 그는 더 깊은 존재가 되어갑니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빅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공항이라는 ‘중간 공간’은 사실 우리의 삶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떠났지만 도착하지 않은 시간, 희망을 붙들고 있지만 아직 성취되지 않은 시간, 하나님을 믿지만, 아직 완전히 확신하지 못한 시간. 이것이 바로 대림절의 시간입니다.
이미 오신 예수, 그러나 여전히 오고 계시는 예수, 그 사이에 어디쯤 서 있는 기다림의 시간. 『터미널』에서 빅터가 공항을 떠나지 못하듯, 우리 역시 이 세계를 당장 뛰쳐나갈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기다림의 존재”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다림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형성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빅터가 공항에서 ‘머무름’을 통해 더 깊은 인간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기다림 속에서 더 깊어져 가야 합니다. 대림절은 이 기다림의 시간을 절망이 아닌 형성의 시간, 정체가 아닌 성숙의 시간, 공허가 아닌 은혜의 공간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우리에게 기다림의 시간을 허락하시는가?”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나는 여호와를 기다리며…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히 기다리나이다.”(시 130:5–6) 기다림이 사라진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다시 기다림의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 존재의 구조
- “아직-아님”의 존재
서양철학은 기다림을 단순한 시간적 지연이나 감정의 상태가 아닌, 존재론(存在論)으로 접근합니다. “기다리는 인간”이 아니라 “기다림으로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Dasein)”라 부르고,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아직 도착해 가는 존재”라고 규정합니다. 인간은 늘 미완의 존재,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항상 미래를 향해 열려 있고, 미래는 언제나 우리를 향해 다가옵니다. 따라서 인간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존재, 기다림 속에서만 자기 존재를 형성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스스로 앞서 있다.”(하이데거) 기다림은 선택이 아니라 존재의 구조입니다. 우리가 기다리지 못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잊고 있다는 뜻입니다.
- 기다림은 믿음의 실존적 구조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붙드는 것이다.” 믿음은 완성된 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약속을 현재 속에서 기다리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기다림은 믿음의 부수적 행동이 아니라, 믿음의 실존 자체입니다. 믿음은 항상 기다림을 전제로 합니다. 믿을 수 있는 대상은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은 믿음의 가장 내밀한 표현이다.”(키르케고르) 따라서 서양 철학적 관점에서 기다림은 존재의 방식이며, 믿음의 방식이며, 인간의 실존 방식입니다.
▣ 때를 아는 지혜
- 때를 아는 것
동양에서 기다림은 존재의 구조보다 자연의 흐름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방식으로 설명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때(時)’입니다. 장자의 때에 대한 사상을 정리하면, 이런 구절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시미지이구지, 부득야”(時未至而求之,不得也) ‘때가 이르지 않았는데, 억지로 구하면, 얻지 못한다.’ “시이과이구지, 역실지”(時已過而求之,亦失之) ‘때가 이미 지나고 나서 구하면 또한 잃게 된다.’ 즉, 때가 되기 이전에 구하면 얻지 못하고, 때가 지난 이후에 구하면 늦는다는 말입니다.
장자는 ‘때’를 아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지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카이로스(하나님의 때)’가 중요한 것처럼, 장자는 천지의 질서 속에서 주어지는 자연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장자의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때가 올 때까지 억지로 하지 않는 지혜입니다. 아직 여물지 않은 열매를 억지로 따면 썩어 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아직 불어오지 않은 바람을 억지로 붙잡으려 하면 허공을 움켜잡게 됩니다. 장자에게 기다림은 억지로 하지 않고, 자연의 질서와 하나 되는 삶입니다. ‘만물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르고(順物自然-순물자연), 사사로움을 버리라(無容私-무용사)’라는 것입니다.
- 기다림
동양사상의 가장 중요한 책이라 할 수 있는 ‘사서삼경’(논어, 맹자, 중용, 대학, 시경, 서경, 주역) 중 『주역』은 주나라 때 인간의 삶을 예측하기 위해 만든 우주의 이치를 적어놓은 공식집입니다. 흔히 『주역』을 점술서로 보기만, 철학서로 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국기 중앙에 태극이 있습니다. 태극은 한자로 “클 태(太), 극진할 극(極)”, 즉 우주의 가장 근원적인 하나를 뜻합니다. 이것은 ‘무(無)’도 아니고, ‘유(有)’도 아닌, 모든 것이 일어나기 이전의 근원적 실재, 우주의 근본 운행의 원리입니다. 이 태극에서 양(陽)이 뻗으면 건·리, 음(陰)이 뻗으면 곤·감이 생깁니다. 건·곤·감·리는 우주의 네 힘을 나타냅니다. 하늘의 창조, 땅의 포용, 물의 깊음, 불의 밝음의 자연의 움직임입니다. 즉, 태극과 사괘는 우주의 생성–운행–조화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런 태극기의 상징이 바로 『주역』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주역의 다섯 번째 괘는 ‘需(수)’입니다. 하늘(건) 위에 감(구름, 물)이 있는 모습입니다. 하늘 위에 구름이 있으니, 곧 비가 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수괘는 “비를 기다린다”라는 의미인데, “준비하는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수동이 아니라, 비가 올 때 씨앗이 움트도록 밭을 준비해 놓는 능동적 행위입니다. 이것은 대림절의 기다림과 너무나 닮아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실 때”를 억지로 앞당기거나 조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을 준비하는 일은 지금 할 수 있습니다. 동양철학에서 기다림은 흐름과 조화, 비움과 순응, 때를 아는 지혜입니다.
▣ 인간의 존재적 숙명
- 『고도를 기다리며』 : 존재는 기다림 속에서 드러난다!
문학은 기다림을 가장 인간적으로, 가장 실존적으로 포착합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두 인물,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끝없이 고도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정작 고도가 누구인지 아무 설명도 없습니다. 그리고 고도는 매일 약속을 어기고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기다림 속에서만 그들의 존재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고도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기다린다.” 그들은 그 기다림 자체로 존재의 의미를 붙들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선언합니다. ‘인간은 기다리는 존재이다.’ 기다림이 없으면 인간 존재가 무너집니다. 사실 그들의 고도를 기다리는 모습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신앙의 모습과도 닮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고, 하나님의 방식과 시간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기다림을 멈추지 않습니다. 어쩌면 신앙은 “하나님은 언제 오는가?”보다, “기다림 속에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를 묻는 길인지도 모릅니다. 문학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기다림이란 인간이 포기할 수 없는 존재의 운명이며, 동시에 희망의 방식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도, 하나님, 구원을 기다리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삶의 모든 것은 기다림이다. 모든 것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시인의 시인이라 불리는 릴케의 말입니다. 인간 존재는 앞으로 도래할 것에 열려 있는 존재라고 봅니다. 릴케에게 기다림은 고통이 아니라 영혼의 확장입니다. 기다림 속에서 인간은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지고, 더 성숙해집니다. (여전히 찬란한 그날을 꿈꾸십시오~^^) 문학은 말합니다. 기다림은 고통이 아니라 성숙의 시간, 어둠이 아니라 새벽을 잉태하는 시간이라고 말입니다.
▣ 믿음의 영성
성경은 기다림을 신앙의 부차적 행동으로 보지 않습니다. 성경은 기다림을 믿음의 중심 구조로 봅니다. 시편 130편의 시인은 자기 영혼이 하나님을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시 130:6) 파수꾼은 어둠 속에서 아침을 기다립니다. 고대의 파수꾼은 도시 성벽 위에서 어둠을 지키며 밤을 보냈습니다. 아침은 반드시 오지만, 그 기다림은 두려움과 희망이 공존합니다. 실수하면 도시가 함락될 수도 있고, 어둠은 언제나 위협과 공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의 기다림은 절박함이었습니다. 이 기다림은 고통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영혼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기다림의 밤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영혼의 어둠 속에서 아침의 밝음을 기다립니다.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약 5:7) 농부의 기다림은 적극적 신뢰입니다. 갖다 놓고 보관하는 신앙이 아니라, 씨를 뿌리고 비를 바라보고 하나님이 주시는 때를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농부의 기다림은 고통이 아니라 시간과 생명의 프로세스를 신뢰하는 기다림입니다. 씨는 금방 자라지 않지만, 농부는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대림절의 시간은 바로 이 농부의 기다림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느리지만, 항상 정직하게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기다림의 역사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다림, 요셉의 기다림, 다윗의 기다림, 선지자들의 기다림, 700년의 메시아 대망, 그리고 마침내 오신 예수 그리스도. 성경의 결론은 명확합니다.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오신다.”
성경은 기다림을 두 단어로 요약합니다. “기대” + “인내” = 기다림(hopeful patience). 기다림은 체념이 아니라 기대하는 인내, 포기가 아니라 견디는 믿음, 허무가 아니라 미래를 붙드는 희망입니다.
▣ 나가는 말
우리는 기다림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급한 시대, 즉시성의 시대, 통제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기다림을 잃으면, 우리는 존재의 깊이, 관계의 깊이, 신앙의 깊이를 잃습니다. 동양철학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때를 아는 최고의 지혜가 기다림이다. 서양철학은 말합니다. 기다림은 인간 존재의 구조다. 문학은 말합니다. 기다림 속에서 인간이 인간다워진다.
성경은 말합니다. 기다림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그러므로 대림절의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기다림은 존재의 방식이다.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다.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된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듯, 농부가 늦은 비를 기다리듯, 기다림 속에서 우리 영혼이 깨어나고, 하나님의 때가 우리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대림절은 단순히 예수님의 오심을 기념하는 절기가 아닙니다. 대림절은 기다리는 존재의 회복입니다. 현대가 잃어버린 능력, 신앙의 가장 본질적 태도—기다림. 우리는 다시 배우고 싶습니다. 조급함 대신 인내를, 즉시성 대신 깊이를, 불안 대신 신뢰를. 우리는 다시 고백하고 싶습니다. “주님, 기다릴 줄 아는 사람으로 우리를 빚어주소서.”
대림절은 영혼을 준비시키는 시간, 빛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시간, 그리고 어둠 속에서 빛을 배워가는 시간입니다. 함께 이 고백을 드립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립니다.” 아멘.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