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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기다림의 끝에서… (눅 2 : 25 – 33)

2025년 12월 21일 예배 영상 https://www.youtube.com/live/U5s4Qpd9BM0?si=a6y5UzDD2L1LqFJO

▣ 들어가는 말

- 우리는 모두 기다림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대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인간은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성공을, 회복을, 관계를, 정의를, 변화의 순간을 기다립니다. 서양 철학은 인간을 ‘아직-아닌 것’을 향해 열려 있는 존재로 이해해 왔습니다.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도래를 향해 자신을 던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기다림은 인간 실존의 구조가 됩니다. 동양 철학은 기다림을 또 다른 언어로 말합니다. 기다림은 조급함도, 방기함도 아닌 우주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삶의 태도라고 말합니다. 억지로 앞서지 않고, 그러나 뒤로 물러서지도 않는 삶. ‘순천자 흥, 역천자 망’ 하늘의 이치에 따르는 자는 흥하고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 무위의 지혜입니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인간의 기다림의 실존을 말해줍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기다림을 살아낼 것인가?” 마냥 기다린다고 해서 인간이 저절로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다림, 그 자체는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기다림을 어떻게 살아내느냐가 인간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성서는, 이 모든 사유를 훨씬 뛰어넘는 다른 차원의 문을 엽니다. ‘기다림 속에서…, 인간은 신을 만난다!’ 조금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완전히 넘어서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 다른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성서가 말하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 『에덴의 동쪽』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존 스타인벡은 미국 문학사에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설교하지 않는 예언자’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은 성서의 구조를 짙게 품고 있습니다. 성서의 이야기를 중심 주제로 삼으면서도 윤리나 도덕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인간과 삶을 깊이 들여다보며 뿌리 깊은 악과 불합리를 고발합니다. 그러나 어설픈 회개를 강요하지 않고, 정답을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구원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구원의 질문을 끝까지 남겨놓습니다.

그의 대표작 『에덴의 동쪽』(1952)은 스스로 “내가 평생 쓰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담은 책”이라 말했던 작품입니다. 본인의 가족사를 투영한 작품이기도 하지요. 이 작품은 스타인벡의 윤리관, 인간관, 신학적 사유 등이 밀도 있게 응축된 작품입니다. 한글 번역본으로 1,2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이 소설은 형제간의 갈등, 부모와 자식의 관계, 사랑과 배신, 폭력과 용서, 선과 악의 문제 등을 탁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만인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세상에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인간 영혼을 상징하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소설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모든 사람의 이야기, 모든 인간 영혼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이 소설은 성경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결국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신학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문제시하고 있는 내용은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라는 구절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중에서도 동사 ‘다스릴지니라’에 해당하는 “팀쉘”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팀쉘은 기본적으로 ‘다스리다’ ‘지배하다’ ‘통치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문제는 의미가 아니라, 양태입니다. 팀쉘은 히브리어 미완료형 동사인데, 미완료형은 하나로 고정되지 않고, 문맥에 따라 세 가지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다스릴 것이다.”(미래), “다스려라.”(명령/권고), “다스릴 수 있다.”(가능성/잠재성) 즉, 세 가지 번역이 모두 가능합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미래적인 번역은 주로 고대 번역과 전통적 신학에서 채택하고 있는데, 이는 인간은 결국 죄를 이길 운명에 있거나,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 것이라는 뉘앙스를 가집니다. 명령형 번역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율법적인 어조로, 도덕적, 윤리적 요구와 당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능성으로 번역하면, “다스릴 수(도) 있다”라는 인간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깁니다. 이 구조는 신명기의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30:15) 구조와 일치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능성을 주지만, 강요하지는 않는다는 성경의 반복되는 선언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소설 『에덴의 동쪽』 마지막 장면에서, 병상에 누운 늙은 아버지 아담은 자기 삶이 남긴 상처와 아들 칼의 방황을 더 이상 바로잡을 힘이 없습니다. 그는 설교하지 않습니다.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 아들을 바라보며 단 한 단어를 말합니다. “팀쉘” ‘너는 다스릴 수 있다.’ ‘너는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은 명령도 아니고, 보장도 아닙니다. 다만 가능성의 선언입니다. 자신의 삶은 결국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시므온도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늙었고, 더 이상 미래를 대신 살아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다림의 끝에서 세상에 하나를 남깁니다. 설명이나 명령이 아니라, 아기 하나를 안아 올리는 몸짓을 말이지요.

 

▣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

- 시므온: 기다림으로 늙어간 사람

신해철의 ‘민물장어의 꿈’-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뿐~’ 이런 가사로 시작됩니다. ‘부끄러운 게으른 자잘한 욕심들아, 얼마나 나일 먹어야 마음의 안식을 얻을까’ ‘하루 또 하루 무거워지는 고독의 무게를 참는 것은, 그보다 힘든, 그보다 슬픈 의미도 없이 잊혀지긴 싫은 두려움 때문이지만…’ 그는 크리스천이었고 이 노래의 가사를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이 성경의 구절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노랫말처럼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며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언제쯤 삶은 좀 쉬워질까. 언제쯤 안식을 얻을까. 하고 말이지요.^^

오늘 본문 속 시므온은 노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나이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방식으로 시간을 살아냈는가입니다. 어떤 시간의 무게를 통과해 왔는가입니다. 그는 무언가를 성취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무엇을 이루려 하지 않았고, 역사를 앞당기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세상을 바꾼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업적을 남긴 영웅도, 역사를 바꾼 지도자도 아닙니다. 다만 성경은 그를 이렇게 부릅니다.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 그의 기다림은 미래를 점유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시간을 감내하는 존재 방식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기다림이 ‘무언가를 얻기 위해 견디는 시간’이라면, 시므온의 기다림은 ‘이미 주어진 시간 안에 자신을 맡기는 태도’였습니다. 그는 기다림 속에서 늙어갔고, 늙어가면서 더 많은 것을 붙잡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많이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기다림을 삶의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늙어감’의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합니다. 카잔차키스는 『영혼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이 말은 허무가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 인간의 성숙을 말합니다. 성숙한 인간, 자유로운 인간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시므온의 기다림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의 기다림은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비워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늙어감, 나이 들어감은 점점 더 자유로워진 사람이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스스로 작아지는 것뿐이니 말이지요.

 

- 기다림의 끝에서 만난 ‘아기’

시므온이 기다림의 끝에서 마침내 만난 메시아는 권력의 형상도, 완성된 성인의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기였습니다. 울고, 떨고, 보호받아야만 살아남는 존재. 아직 아무것도 완성하지 못한 연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이 장면은 대림절의 가장 큰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왜 하나님은 아기로 오셨는가? 왜 하나님은 메시아를 이런 모습으로 보내셨는가? 아기는 연약합니다. 아직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 존재입니다. 만약 메시아가 완성된 모습으로 왔다면, 인간은 그저 구경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로 오신 순간, 인간은 책임의 주체가 됩니다. 요셉은 피난을 선택해야 했고, 마리아는 침묵 속에서 아이를 길러야 했으며, 시므온은 그 아기를 안아야 했습니다. 아기는 보호받지 못하면 죽습니다. 즉, 구원은 방치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 세계에 들어옵니다. 구원은 이 세계 안에 연약한 가능성의 형태로 들어왔습니다. 이는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불신하지 않으신다. 이 세계가 여전히 빛을 품을 수 있다고 믿으신다. 언제나 어둠은 깊지만, 그 어둠이 모든 가능성을 삼켜버리지는 못합니다. 이 세계는 분명 절망과 어둠으로 가득한 세계입니다. 그러나 희망과 빛의 가능성으로 가득 찬 세계이기도 합니다.

스타인벡은 『에덴의 동쪽』에서 인간과 세계를 이렇게 바라봅니다. “이 세계에는 아직 가능성이 있다. 인간은 언제나 다시 선택할 수 있다.” 히브리어로 ‘팀셀(Timshel)’—‘너는 선택할 수 있다’. 아기로 오신 메시아는 바로 이 선언처럼 보입니다. 이 세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어둠은 여전히 빛을 품을 수 있다. 그것은 이 세계에 대한 가능성의 표현, 신뢰의 표현입니다. 이 어둠의 세계는 아직 빛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완성된 구원을 강요하지 않고, 연약한 씨앗을 맡길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구원은 강요되지 않습니다. 완성된 형태로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아기로 오신 메시아는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빛이 이미 세상에 왔지만, 이 빛을 어떻게 빛나게 할지는 너희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믿고 있는 것 아닐까요.

 

- 신을 품에 안다!

시므온은 신을 이해하지 않고, 안습니다. 시므온의 고백은 인상적이고도 분명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그가 본 것은 천지를 울리는 번개도, 환상 속의 계시도 아닙니다. 개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그는 신학을 붙잡지 않았고, 진리를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그저 아기를 안습니다. 이것이 성서의 놀라운 급진성입니다. 철학은 신을 사유의 대상으로 붙잡으려 하지만, 시므온은 신을 팔로 안을 수 있는 생명으로 만납니다. 그는 신을 설명하지 않았고, 신을 증명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카잔차키스는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은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의 고통을 구경하지 않는다. 신은 인간의 손을 필요로 한다.” 시므온은 그 손이 되었습니다. 그는 신을 이해한 사람이 아니라, 신을 맡아줄 수 있을 품을 가질 수 있게 나이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이 말은 삶에 대한 포기가 아닙니다. 체념이 아니라, 기다림이 완성된 인간의 자유입니다. 더 살고 싶다는 욕망도, 더 남기고 싶다는 집착도 없이, 자신의 자리를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 스타인벡은 인간의 성숙을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붙잡는 법이 아니라, 내려놓는 법을 배울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 시므온은 자신의 삶도, 기다림도, 사명도 조용히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신을 ‘이해한’ 사람이 아니라, 신을 ‘만날 수 있는 기다림’으로 살아간 사람, 나이 들어간 사람입니다.

 

- 아기로 온 구원: 미완의 빛을 맡긴 하나님

아기로 오신 메시아는 완성된 구원이 아니라 자라나야 할 구원입니다. 씨앗처럼, 누룩처럼, 연약하지만 가능성으로 충만한 빛입니다. 하나님은 전능으로 세상을 덮지 않습니다. 이 세계가 여전히 빛을 품을 수 있다고 신뢰하십니다. 그래서 성탄은 기적의 종결이 아니라, 책임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단독으로 구원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손안에서 자라납니다.

메시아가 ‘아기’로 왔다는 것은, 전능의 방식에 대한 거부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메시아의 형식, 모습은 대개 이렇습니다. 이미 완성된 능력을 갖추고, 즉각적으로 이 불의한 세계에 정의를 실현하며, 압도적인 힘으로 세상을 단번에 뒤집는 힘을 가진 존재. 그러나 성서는 이 모든 기대를 의도적으로 배반합니다. 메시아는 완성된 성인이 아니라, 울고, 자라고, 보호받아야 하는 아기로 옵니다. 이는 단순한 겸손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 이해에 대한 전복입니다. 하나님은 ‘즉시적 개입’이 아니라 시간을 견디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이지요.

아울러 세계가 신을 품을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이 세계가 신을 품을 수 있다”라는 고백은, 이 세계가 아직 폐기되지 않았다는 선언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공간이 아니라 완전히 버려진 장소가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의 현존이 머물 수 있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언어로 말하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중요한 것은, 어둠이 빛을 삼켜버리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아기로 오신 메시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어둠은 여전히 빛을 품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 나가는 말

- 안을 것인가? 살해할 것인가?

아기로 오신 메시아는 이미 완성된 구원이 아니라 자라나야 할 구원입니다. 그래서 성탄은 기적의 종결이 아니라, 책임의 시작입니다. 빛은 이미 왔지만, 그 빛은 여전히 연약합니다. 씨앗처럼, 누룩처럼, 돌봄과 인내 속에서 자라야 할 빛입니다. 시므온은 그 빛을 세상에 넘겨주며 떠납니다. 그는 구원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그는 구원을 다음 세대에게 맡깁니다.

하나님은 자기 안에 있는 악으로 고뇌하는 인간 가인에게, 그리고 아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하기만 한 아기 예수를 안은 시므온에게, 오늘도 여전히 삶이 무엇인지, 좋은 사람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아파하는 우리에게도 완성된 답을 주지 않습니다. 아기로 오신 메시아는 이렇게 말하는 존재입니다. “너는 선택할 수 있다.” “네 안에 있는 악을 다스릴 수도 있고, 악에게 무너질 수도 있다” “희미한 가능성밖에 없는 이 어린 아기가 완전한 메시아로 성장할 것을 믿을 수도 있고, 헤롯처럼 그 가능성을 살해할 수도 있다.” 그 말, 그 물음에 시므온은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봅니다.” 고백하며 아기를 껴안습니다.

대림절은 완성된 세상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닙니다. 대림절은 맡겨진 빛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를 묻는 시간입니다.

 

- 우리에게 맡겨진 아기 예수

시므온은 완성된 해답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능성 하나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오늘 대림절 네 번째 주일,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마음의 안식, 이스라엘의 위로, 구원…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기다리는 동안, 과연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스스로 작아지고 있는가?

씨앗은 스스로를 증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절한 돌봄 속에서 숲이 됩니다. 예수의 비유가 이를 반복합니다. 겨자씨 비유, 누룩 비유, 씨 뿌리는 사람 비유 등. 아기로 오신 메시아는 하나님 자신이 씨앗이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불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계를 신뢰하기에, 연약한 방식으로 자신을 맡깁니다.

이 지점에서 시므온은 결정적 인물이 됩니다. 그는 기다림의 끝에서 영광의 왕이 아니라 아기를 알아봅니다. 이것은 단순한 경건이 아닙니다. 시므온은 이 세계가 아직 하나님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두 팔로 증언한 사람입니다. 그는 아기를 안고 말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구원은 개념도, 제도도, 힘도 아니라 우리가 품에 안아야 할 생명입니다. 가꾸고 돌보아야 할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완성된 빛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완성되어야 할 빛으로 오셨습니다. 성탄은 기적의 종결이 아니라, 책임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대림절의 기다림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우리는 완성된 세상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어 가야 할 빛을 돌보는 사람으로 부름 받았다. 성탄은 “하나님이 하셨다”라는 이야기 이전에 “인간에게 맡겨졌다”라는 이야기입니다. 팀쉘! 너는 선택할 수 있다!

 

 

우리를 향해 오시는 주님,

주님을 기다립니다.

기다림 속에서 익어가고 성숙하고 작아지게 하소서.

아기 예수를 기꺼이 품에 안게 하소서.

연약한 아기의 얼굴에서 주님의 구원을 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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