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이중성
렘 29:4-14
예레미야의 역사적 자리
우리는 구약을 통해서 예언자들을 만날 때마다 당혹스러운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전기 예언서는 주로 예언자들의 활동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런대로 따라갈 만 하지만 후기 예언서는 그들의 독특한 예언을 보도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는 것 자체가 힘듭니다. 이런 예언은 단지 신앙의 규범이나 교양을 상식적인 차원에서 다루는 게 아니라 예언자의 고유한 영적 체험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영적 체험이라는 것은 단지 일반적인 게 아니라 그 시대의 구체적인 상황과 맞물려 있습니다. 이 구체적인 사건을 앞에 놓고 예언자의 영적 체험에 따라서 다르게 예언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예언이 옳은가 하는 문제도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 문제를 오늘 우리의 상황과 비교해서 생각해볼까요? 요즘 국가보안법 문제로 인해서 한국 교회가 두 쪽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한기총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목사들은 국가보안법 철폐를 반대하고, 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교회와 목사들은 찬성하고 있습니다. 아마 많은 교회에서 목사들이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할 것입니다. 일반 신자들도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양측의 목사들이 성서와 기독교 신학에 근거해서 찬반양론으로 갈라져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공격받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간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을 내렸습니다. 한쪽에서는 아주 낙관적인 해석을 내렸습니다. 그들 중에서 대표적으로 하나니야 예언자는 2년 안에 포로 생활이 끝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28:3). 예레미야는 그들을 거짓예언자(9절)이라고 비판하면서 70년을 다 채운 후에야 돌아올 것이라는 매우 비관적인 예언을 선포했습니다(10절). 예레미야가 거짓예언자라고 비판한 예언자들의 설교가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아마 그들도 나름대로 최선을 기울려 예언했을 것입니다. 비록 미래가 어둡다고 하더라도 당장 희망을 주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괜찮다는 설교를 했겠지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최소한의 기준도 되지 않는 설교가 있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괜찮은 설교에는 설교자의 진정성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설교의 방향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설교를 흡사 코미디같이 하는 장 아무개 목사님도 자신이 여러 형편을 알지만 그런 방식으로라도 복음을 선포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어떤 설교가 옳은 것인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당시에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간 사람들은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 했을까요? 청중들은 당연히 자기들에게 달콤하게 들리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마련입니다. 예레미야의 비관적인 예언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는 외로웠습니다. 그가 눈물이 많았다는 것은 자기 민족의 운명을 내다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자신의 예언이 전달되고 있지 않다는 현실을 직시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예레미야는 용기를 잃지 않고 예언 활동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았겠지만 역사는 2년 안에 포로생활이 끝날 거라고 예언한 사람들이 아니라 70년이 필요할 거라는 예레미야를 선택했습니다. 진리는 이렇게 역사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예언자는 이렇게 미래로부터 비추는 역사의 빛을 철저하게 의식하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아직은 감추어져 있지만 결국 우리에게 나타나게 될 그 미래의 빛을 앞당겨서 체험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식은 우리에게 간단히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전반적으로 현안에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자기의 주장이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작용하는 상태에서는 미래를 내다보기 힘듭니다.
생존을 위하여
역사를 통해서 참된 야훼의 말씀으로 인정받기는 했지만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예레미야의 예언은 보기에 따라서 너무나 평범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사로잡혀 간 사람들에게 이렇게 설교합니다. “너희는 거기에서 집을 짓고 살아라. 과수원을 새로 마련하고 과일을 따 먹으며 살아라. 장가들어 아들딸을 낳고 며느리와 사위를 삼아 손자 손녀를 보아라. 인구가 줄어서는 안 된다. 불어나야 한다.”(5,6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흡사 결혼식장에서 신랑 신부에게 건네주는 주례사 같이 들립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편지 형식으로 선포된 이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들은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입니다. 1절 말씀이 그 정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사로잡아 간 장로들을 비롯하여 자세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들에게 예언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편지를 띄운 일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던 그들의 심정이 얼마나 절실했을는지 우리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꿈을 안고 선진 문명의 세계로 유학을 떠나거나 아니면 이민을 떠난 것이 아니라 강압적으로 끌려간 그들은 오로지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을 것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의 선민의식은 철저하게 못해 배타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든지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의 제국들에 의해서 수없이 공격당하고 나라가 해체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대인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기원후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 거의 2천년 동안 그들은 땅도 없고 정부도 없이 전 세계로 흩어져서 살았습니다. 그들을 우리는 디아스포라라고 부릅니다. 2천년 가까이 그들을 하나의 나라로 묶어줄 아무런 토대 없이 살았지만 여전히 유대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현상입니다. 어떤 학자는 이런 현상이야말로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러 저리 채이면서도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전혀 흩트리지 않을 정도로 정신세계가 또렷한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스러웠던 시대가 허물어지고 결국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들이 겪었을 정신적인 굴욕감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이런 형편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사람은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는 용기를 잃지 마라. 하나님이 도우신다. 우리의 포로 생활은 곧 끝날 것이다. 희망을 잃지 마라. 아마 제가 그런 입장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설교를 하지 않았을까요? 예레미야를 제외한 거의 모든 예언자들도 역시 이런 용기와 희망을 설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엉뚱한 말을 합니다. 당신들이 포로로 잡혀간 그곳 바빌론에서 집 짓고, 과수원 만들고, 장가시집 가서 아들딸 낳고 잘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들은 그 사람들은 모욕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간절히 기다리라고 하지 않고 그냥 그곳에 눌러 앉아서 잘 살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왜 이런 예언을 선포했을까요? 예레미야가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을 까닭이 없으며, 허물어져가는 자기 민족의 운명 앞에서 통곡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기분으로만 본다면 젤롯당처럼 무력투쟁을 통해서라도 바빌론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현실을 정확하게 뚫어보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조급하다고 하더라도 바빌론의 제국주의적 정책이 끝나지 않는 한 유다가 바빌론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유다는 해방을 이끌어낼 만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못했습니다.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일을 무조건 추진하는 것만이 참된 야훼 신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한 예레미야는 그런 헛된 희망을 버리고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설교했습니다.
여기서 예레미야가 내다보는 현실이라는 것은 아주 간단히 현실과 타협을 뜻하는 게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 사안의 경중을 헤아려 가장 근원적인 일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포로로 잡혀간 이 사람들에게 가장 근원적인, 가장 본질적인 일은 ‘생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남는 것 자체가 바로 그들에게 가장 우선적인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위기가 아니라 평상시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본질을 명백하게 다스려나가야 하지만 절체절명의 위기에는 생존에 진력해야만 합니다. 만약 그들이 바빌론과 싸우겠다는 만용을 부리다가 멸망하고 만다면 그것은 그렇게 지혜로운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하나님
예레미야가 이렇게 ‘생존’에 높은 가치를 두는 이유는 단지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에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아시리아 제국이 신흥 제국 바빌론으로 주도권을 빼앗긴 다음에 이 바빌론과 이집트 사이에서 외교력을 통해서 유다의 생존을 찾아보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은 잘못된 선택으로 유다가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이 세상에 많다는 사실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 영역이 바로 하나님의 의지가 활동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의지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습니다. 우리가 모두 수고를 기울여 무언가 그럴듯한 것을 생산해내도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힘에 의해서 그런 것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말입니다. 결국 이런 역사의 흐름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의 계획보다 하나님의 의지에 영적인 눈높이를 맞추어 사는 게 최선입니다.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삶이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여도 실제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의 성격이 이중적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는 일종의 숙명주의에 빠지는 삶이 그것입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역사적 사명을 방기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에게서 많이 발견할 수 있는 이런 숙명주의는 하나님의 능력에 자기를 맡긴다기보다는 책임 회피이며, 더 나아가서 모든 삶의 순간마다 성찰하고 결단해야 할 우리의 수고를 모면하기 위한 일종의 편이주의입니다. 다른 하나는 참된 ‘기다림의 신앙’이 그것입니다. 11월 마지막 주일에 맞게 될 금년도 대강절이 의미하고 있는 그런 기다림의 신앙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신앙은 결코 숙명주의가 아니라 대강절적 기다림입니다.
대강절적 기다림의 신앙과 숙명주의적 신앙이 기다림과 소극성이라는 점에서 비슷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 기다림과 소극성의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말입니다. 대강절적 기다림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조건 기다리는 게 아니라 깨어있는 영성으로 그 조짐을 살핍니다. 시편 시자의 표현대로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듯이 그 때, 바로 카이로스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이런 사람은 이 시대를 분별하려고 노력하고, 자기를 늘 말씀 안에서 성찰하고, 그 영성을 심화합니다. 그러나 숙명주의자들은 그 때에 대한 간절함이 없기 때문에 자기 삶의 확대만을 위하여 늘 한 눈을 팝니다. 그러나 대강절적 기다림은 단순히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때가 앞당겨지도록 최선을 다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에 있듯이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긴장감을 갖고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대강절적 기다림의 신비를 놓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계 선교를 이루어야 할 것처럼, 이룰 수 있기라도 할 것처럼 너무 앞서 나가고 있습니다. 흡사 한국사회가 잘 사는 것만을 목표로 해서 줄달음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렇게 모든 에너지를 밖으로 쏟아내다가 우리의 영성이 고갈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읽은 것처럼 예레미야는 포로생활의 고단함이 2년 내에 해결될 것이라는 거짓예언에 속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다리라고 설교합니다. 이것은 숙명주의가 아니라 영적 긴장감이 그 안에 들어있는 참된 신앙적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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