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믿음
(눅 18:1-8), 10월17일, 성령강림절 후 21째 주일
재판장과 과부 이야기
오늘 설교 본문인 눅 18:1-8절에 나오는 이야기는 누가 읽어도 아무런 혼란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주제가 분명해보입니다. 주제는 첫 구절에 나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에 얽힌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과부가 재판관을 찾아가서 원한을 풀어달라고 조르다가 결국은 해결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재판장, 곧 판사와 과부는 사회적 신분에서 천지차이가 납니다. 판사는 명예와 권력을 손에 쥔 사람인 반면에 과부는 고아와 마찬가지로 당시 사회에서 가장 힘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이 판사를 가리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 판사가 이방인이었다는 뜻입니다. 아마 로마에서 파송한 고위관리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을 무시한다는 말은 뇌물을 받거나 권력자의 눈치를 보면서 법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과부는 유대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본문이 그걸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지만 이방인 여자였다면 그걸 밝혔을 겁니다. 성서에 나오는 과부는 거의 가난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 과부라고 한다면 송사문제를 들고 이방인 판사에게 가기 전에 먼저 유대 랍비나 원로들에게 가야만 했습니다. 가서 허탕을 쳤겠지요. 유대인 과부가 오죽했으면 이방인이면서 평판이 좋지 못한 판사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겠습니까?
판사는 과부의 요청을 처음 받았을 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에게는 이 과부의 일이 신경쓸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청을 들어주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것이고, 과부의 원한을 해결해준다 해도 돈 나올 데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바쁘기도 해겠지요. 이 판사는 이런저런 핑계로 과부와 같은 이들의 요구를 못들은 체 하는 우리를 대표합니다. 절대고립무원의 상태였던 과부가 끝장을 보자는 심정으로 자꾸 찾아오자 판사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하나님도 두렵지 않고 사람도 무시했지만 이 과부가 번거롭게 하는 것만은 참기 힘들었다고 합니다.(눅 18:5)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해석하십니다. 불의한 재판장도 생각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고 이르십니다. 재판장이 과부의 끈질긴 호소를 외면할 수 없었듯이 하나님도 택하신 자들의 호소를 들으신다고 하셨다. 7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이런 구절은 소위 ‘강청기도’의 본문으로 사용됩니다. 뜨뜻미지근한 태도가 아니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태도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눅 11:1-13절에도 나옵니다. 1-4절은 주기도이고, 5-8절은 한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요청을 들어준다는 이야기입니다. 9절에 그 유명한 경구가 나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1-13절은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통해서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모든 구절이 기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런 가르침에 따라서 한국 신자들은 기도를 열정적으로 합니다. 마치 수능시험을 앞둔 학생들처럼 밤새워 기도합니다. 기도 모임도 많고, 기도 훈련도 있고, 각종 기도 프로그램도 제시됩니다. 기도의 응답이 바로 신앙의 척도처럼 받아들여집니다. 더 나가서 기도가 ‘열려라 참깨!’와 같은 주문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일종의 기도 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기도 만능주의와 기도 냉소주의
이와는 반대로 기도를 냉소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장 극단적인 생각은 기도를 심리적인 자기 암시라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에도 일리가 있긴 합니다. 유사 심리치료 훈련에서는 “나는 할 수 있다.”는 구호를 반복해서 외치게 합니다. 그것이 자신감을 키워준다고 합니다. 요즘은 이런 걸 따라가는 교회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기도현상을 이유로 기도를 무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취할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온건한 입장의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를 댑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기도는 무슨 기도냐, 하는 식입니다. 그냥 열심히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느냐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기도를 하고 싶어도 기도가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티브이 드라마나 슈퍼스타 K2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관심이 있는 것을 많이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원한을 푼 과부에 대한 오늘 설교의 성경 본문이 불편하게 생각됩니다.
기도 만능주의와 기도 냉소주의가 한국교회에서 충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중간의 한 지점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이쪽으로 치우쳤다가 다른 한때는 저쪽으로 치우치기도 합니다.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기 힘들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대개의 신자들은 기도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인정하면서도 일상에서 별로 절박한 일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절박한 용무가 발생하면 기도하겠지요. 그런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사라지면 다시 기도 없는 삶으로 돌아갑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이 일정한 시간에 기도를 한다거나 기도 모임에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여건이 된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습니다만 더 중요한 것은 기도의 영성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자기 형편에 맞게 기도를 하게 됩니다. 기도의 영성은 하나님께 자기의 삶을 실제로 맡기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기도의 영성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내면적인 능력입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삶을 온전히 맡기는 사람이 바로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기도를 많이 한다는 자랑 아닌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자기의 욕망을 실현해나가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에서 끊임없이 성찰하는 영적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실현하려는 기도는 자기 연민의 배출입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의 전형입니다. 참된 기도의 영성은 하나님의 뜻이 임하기를 바라는 데에 무게가 있습니다. 성서와 주기도가 말하는 기도의 본질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재판장을 졸랐다는 과부 이야기를 다시 보십시오.
먼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기도한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은 기도라기보다는 철부지의 떼쓰기와 다를 게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과부가 이방인 재판장을 끈질기게 찾아가서 조른 건 분명합니다. 재판장이 그녀의 행동이 귀찮아서 원한을 풀어주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곤란합니다. 재판장은 공권력을 통해서 이 과부를 처리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요즘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억울한 일을 법이 해결해주나요? 그럴 때도 있지만 오히려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헛소리가 아닙니다. 특히 지금처럼 돈으로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는 사법 제도 아래서는 이런 현상이 더 강화되고 있습니다. 재판장과 과부 비유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는 뜻은 아닙니다. 현실적이지 않을 뿐입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지만 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런 특별한 경우의 일을 근거로 강청기도의 정당성을 조장할 수는 없습니다. 이 비유는 전혀 다른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인자가 올 때
마지막 8절 후반절은 전체 이야기와 약간 어긋나 보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그것보다는 차라리 8절 전반절인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고 끝나는 게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인자가 올 때라는 구절을 통해서 과부 이야기의 핵심을 전합니다. 인자는 세상의 마지막 때 심판자로 오실 이를 가리키는 묵시문학 용어입니다. 인자는 마지막 때 세상에서 참된 정의를 세우고 새로운 세상을 일으킵니다. 그 세상은 이 세상과 완전히 다릅니다. 판사가 법을 법대로 지켜서 만들 수 있는 세상과도 다릅니다. 예수님이 처음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가 바로 인자가 세울 새로운 세상입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이런 세상에 대한 믿음을 보기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가 안고 있는 영적 긴장감이 있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앙적 화두는 인자이신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이 곧 재림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구성원들이 살아 있을 때 재림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초기 그리스도교가 사유재산을 포기하는 공동체처럼 묘사된 구절도 있습니다. 1992년에 우리나라에서 크게 파장을 일으킨 ‘다미선교회’ 사건처럼 예수님이 실제로 곧 재림하신다면 학교에 갈 필요도 없고, 자기 집을 소유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재림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뭐가 잘못된 것인가 하는 질문이 쏟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로 인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그런 상황을 배경에 놓고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를 전한 겁니다.
이런 사실을 배경에 놓고 본다면 이 비유가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해집니다. 우선 이것이 어떤 것을 지시하는 비유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십시오. 과부의 원한은 예수의 재림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기다림입니다. 과부는 원한을 풀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우습게 생각하는 재판장을 겁 없이, 또 무모하게 계속해서 찾아갔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재림은 존재근거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모든 것이 해체됩니다. 재림은 곧 그리스도인들에게 과부의 원한과 똑같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8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무슨 말인가요? “내가 속히 오리라.”와 똑같은 표현입니다.(계 22:12 참조) 재림은 현실에서 지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속히 올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현실과 약속 사이에 갭이 있습니다. 갭을 넘어서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에서만, 그것으로만 초기 그리스도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 어디에도 호소할 곳이 없었던 과부의 심정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에서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재림의 지연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영적 긴장을 오늘 우리도 똑같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혹시 그런 경험이 없으신가요?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신앙을 모르면서도 신앙생활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런 게 훨씬 편리합니다. 보십시오. 인자의 때와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간절한 기다림에 대한 과부 이야기를 강청기도로 둔갑시키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해결될 수 있는 요술방망이처럼 오해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종교적이고 세속적인 요구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걸 좋아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영적 문제의식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재림의 지연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대개는 일상에 필요한 것을 채워가라는 세상의 요구와 타협합니다. 그게 그럴듯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의 경쟁력을 키우는 데 모든 삶의 에너지를 쏟습니다. 교회도 개별 교회의 성장에만 교회의 동력을 쏟습니다. 그렇게 모두 경쟁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부의 영적 절박성입니다. 이 세상의 완전한 변화를 향한 열망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인자의 재림이 지체되고 있지만, 그리고 세상이 새로워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우리는 인자가 바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이런 열망이 곧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에서만 우리는 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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