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세상살이
요 17:6-19, 부활절 일곱째 주일, 2018년 5월13일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8.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9.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3.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4.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오늘 우리가 제3독서로 함께 읽은 요 17:6-19절이 포함된 요 14-17장은 공관복음에 나오지 않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요 17장은 전체가 예수님의 기도라는 점에서 아주 특이합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은 기도 형식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신앙고백은 당시 요한 공동체가 처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모든 문서는 역사적 콘텍스트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지난 4월27일에 나온 남북정상회담 선언문도 2018년의 한반도와 세계 역사를 배경으로 합니다. 2천년 후에 한 역사가가 이 선언문을 정확하게 해석하려면 일본 식민통치와 2차 세계대전과 남북 분단과 6.25 전쟁 등등에 관한 역사적 상황을 놓치지 말아야합니다.
기독교 박해 시대
요한복음의 기록 연대는 대략 기원후 90-100 어간입니다. 당시는 유대교가 기독교인들을 유대교 회당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축출하기 시작한 때입니다.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30세에 로마 11대 황제가 된 도미티아누스(재위 81-96년)는 기독교 박해자로 유명합니다. 그의 뒤를 이은 트라야누스(재위 98-117년) 시대에도 박해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박해의 가장 큰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황제숭배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 제국 안에서 살아가던 기독교인들은 각종 불이익을 받았고, 심한 경우에는 순교도 당했습니다. 오늘 본문 요 17:14절은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온대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실제로 미운 짓을 하는 경우입니다. 이단 척결이나 마녀 사냥처럼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그렇게 보이는 일들이 적지 않게 벌어졌습니다. 요즘 한국기독교는 ‘개독교’라는 멸칭으로 불리곤 합니다. 어디 가서 기독교인이라는 말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분위기는 좋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가 왜 그렇게 폄하되는지를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한국교회 입장에서 한 마디 변호한다면 미움을 받거나 무시당할만한 일들은 한국교회의 일부 현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변호는 일부 현상이기를 바라는 제 마음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교회가 미움을 받는 또 하나의 다른 경우는 교회가 세상의 요구를 순순히 따르지 않을 때 벌어집니다. 이게 요한복음이 말하는 경우입니다. 이를 본문은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다시 정확하게 그 구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세상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간 사람도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먹을 것을 공급받아야 하고, 전기와 수도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돈벌이를 하고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우선 제국의 통치 원리와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제국의 통치 원리는 비교적 간단명료합니다. 제국의 가치를 절대화하는 방식으로 작동됩니다. 제국의 가치는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등등에서 나타납니다. 언어에서도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로마 시대에 높은 관료나 학자가 되려면 라틴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21세기는 영어가 그런 역할을 합니다. 자본은 전 세계에서 절대적인 가치로 작동됩니다. 옛날에도 돈이 중요하긴 했지만 요즘처럼 무소불위의 힘은 아니었습니다. 이에 반해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는 우리 손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주도되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 몇 가지는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사랑, 정의, 평화, 관용 등등입니다. 이런 개념들로 하나님 나라를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아들에게 닥칠 수 있는 운명으로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나중에 십자가가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국의 통치 원리와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는 동일한 차원에서 대립적인 게 아닙니다. 같은 차원에서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제국을 도구로 사용하신다고 말하는 게 정확한 이야기입니다. 기독교인은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 거부하고 있는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약점을 잡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로마 황제가 새겨진 동전 데나리온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막 12:17). 로마가 세금 징수권을 행사하고 있던 당시에 세금 문제는 핫이슈였습니다. 과격한 유대인들은 세금 거부 운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예수님이 세금을 바쳐야한다고 대답하면 유대인들의 정서를 거스르는 것이고,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순히 이런 함정을 빠져나가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로마 제국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정확하게 제시한 것입니다.
세금을 바쳐야 하는 가장 우선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질서가 중요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세상이 아무리 비열하고 비인간적으로 작동된다고 하더라도 세상 정치와 경제 질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의미의 성육신 신앙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간혹 세상을 부정하는 주장이 나오기는 했습니다. 리차드 니이버는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이런 주장을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Christ against culture)로 규정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전체적으로 보면 세상을 부정하는 목소리는 소수였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세상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혼자 고독하게 기도하는 시간보다는 시장과 광장과 사람들 사이에서 머무는 시간이 예수님에게 많았습니다. 바울은 정치권력을 부정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롬 13:1). 황제숭배를 용인한다는 뜻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도 세상의 질서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무정부 상태는 모든 이들의 파멸을 가져옵니다. 북한 김정은 정권이 우리가 보기에 이상한 점이 많지만 북한이 무질서에 떨어지는 것보다는 김정은 정권이 유지되는 게 낫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즘의 동북아 정세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처럼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김정은 정권이 유지되는 게 좋습니다. 교회와 정치 문제는 경우에 따라서 달라서 객관적으로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방점은 두 번째에 찍혀 있습니다. 가이사의 관심은 단순히 세금을 많이 거둬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별 것 아닙니다. 별 것 아닌 것은 그들에게 주면 됩니다. 하나님의 것은 단순히 돈이 아니라 영혼입니다. 즉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푼돈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것은 돈으로 계산해낼 수 없는 액수의 생명 사건입니다. 로마 황제는 돈으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실천해야 할 사람이지 생명을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돈이 필요하니 기독교인들도 세금을 내는 게 마땅합니다.
우리의 질문은 다음입니다. 악한 황제에게도 세금을 바쳐야 할까요, 아니면 거부해야할까요? 이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는 우리의 모든 세상살이에 해당됩니다. 믿음을 훼손시키는 세속 직장생활을 계속 유지하는 게 나은지 그만 두는 게 나은지를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기독교인이 백화점 관리직으로 들어갔다고 합시다. 그는 백화점 주인이 입점 주인들에게 요구하는 불합리하고 일방적인 조건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런 조건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관철해야 합니다. 그럴 때마다 이 사람은 직장을 때려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은 이런 방식으로 작동됩니다. 요즘 흔한 표현으로 ‘갑질’에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형 병원에 고용된 의사들도 그런 비슷한 일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합니다. 저는 평생 교회 밥만 먹고 산 사람이라서 일반 신자들이 세상살이에서 얼마나 힘들어하는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제 아내와 두 딸들을 통해서 조금은 짐작할 뿐입니다. 더 곤란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이 많을 겁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 삶에서는 그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걸 제가 해결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판단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성경 본문이 제시하는 신앙적인 관점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모든 경우에 해당되지는 않겠지만 문제를 풀어나갈 실마리는 될 것입니다.
악에서 구하소서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요한복음 공동체가 처한 상황은 몹시 어려웠습니다. 도미티안 황제는 로마 황제들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황제였습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람도 도미티안을 적그리스도로 묘사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세상을 등지고 광야로 숨어버리든지 아니면 기독교인이 아닌 체 하거나, 실제로 신앙을 포기해야합니다. 순교를 당하던 시절에 배교를 강요당한 기독교인들이 많았습니다. 순교한 사람은 무조건 높이 평가되고 배교한 사람은 무조건 무시당하면 곤란합니다. 배교가 옳은 것은 아니되 거기까지 이르게 된 과정은 순교 못지않게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최선은 악에 물들지 않고 자기 삶과 신앙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은 이를 가리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기를 위함이니이다.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기 위함이 아니다.’는 말은 당시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있었던 두 가지 잘못된 생각을 따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는 예수 재림과 휴거에 대한 열망입니다. 복잡다단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는 그게 모든 문제 해결의 가장 빠른 길로 보일 수 있지만 요한은 바른 길이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지주의자들처럼 영적이고 신비적인 지혜를 통해서 역사를 초월한다는 생각입니다. 요한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방식으로 세상과 역사를 초월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냈다.’(18절)는 말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세상에서 박해받는 제자들이 세상의 악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주기도’의 마지막 단락을 연상시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거대한 악에 맞서 싸워서 악을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구체적인 자리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투쟁할 수는 있고, 세상의 개혁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방식으로 우리가 악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방식으로 악은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소극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최선은 악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에 빠지지 않음으로써 결국 악의 힘이 줄어듭니다. 예컨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참정권을 바르게 행사하면 악한 정치 세력이 힘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악에 빠지지 않게 하실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초기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지켜주신다는 것일까요? 도미티안 황제가 빨리 죽게 하는 방식일까요? 기독교인들을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로마 고위직들이 많이 생기는 방식일까요? 그런 것들은 주변적입니다. 설령 그런 도움으로 어려움이 해결되어도 그런 어려움은 다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공동체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손길을 경험했고, 희망했습니다. 진리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17절과 19절에서 반복되었습니다. 19절입니다.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여기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놀다가 패싸움이 벌어졌다고 합시다. 아니면 이웃 동네 조폭이 와서 시비를 거는 바람에 싸움이 벌어졌다고 합시다. 이런 싸움이 크게 벌어지면 전쟁이 됩니다. 전쟁의 악순환이 인류 역사입니다. 이런 악순환에 떨어지는 것이 바로 악에 빠지는 것입니다. 악에서 벗어나는 길은 패싸움의 자리를 피하는 것입니다. 비겁해 보이십니까? 패싸움의 자리를 피한다는 것은 삶의 차원을 완전히 다르게 본다는 뜻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거룩함’(하기오스)입니다.
요한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거룩함의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게 바로 본문이 반복에서 표현한 ‘진리로 거룩함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옛사람은 이미 죽었고, 그와 더불어 이미 새사람으로 살아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이전투구의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른이 되면 동네 아이들 패싸움에 관심이 없는 거와 같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자신만 신앙적으로 우아하게 살면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해 있기에 싸울 때 싸워야 하고, 참을 때는 참아야 합니다. 그런 판단은 각자가 내려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조폭이 거들먹거리는 세상살이이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진리로 거룩하게 되었다고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기에는 세상살이가 너무 혹독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각자가 감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다음의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혹독한 세상살이에 가능한 매몰되지 말고 진리로 거룩하게 되었다는 엄청난 사실을 실제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존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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