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창조절 열둘째 주일, 2022년 11월20일
바울은 2차 선교 활동 중에 지금의 튀르키예에서 배를 타고 그리스 북쪽 지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 지역의 대표적인 도시 빌립보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그곳을 떠난 다음에도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바울의 선교 활동을 재정적으로 후원한 교회로 유명합니다. 빌립보서는 기쁨의 편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기쁨이 강조됩니다. 2:17~18절에서는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라고 했고, 2:28~29절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으며, 3:1절에서는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라고 썼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4:4절에는 조금 더 특징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우리가 자주 들은 구절입니다. 자주 들었다고 해서 실제로 그 말씀 안으로 들어가는 건 아닙니다. 우선 저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했으니까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삶의 조건에 따라서 들쑥날쑥하지 않습니다. 인생이 잘 풀리면 기뻐하고, 안 풀리면 기뻐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기분에 좌우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깔린 존재론적 근거가 바로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일상이 기쁨으로 충만한 겁니다. 이게 실제로 가능할까요?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선 기쁨과 재미를 구분해서 봐야 합니다. 현대인은 주로 재미에 치중하면서 삽니다. 가족끼리도 재미가 있어야 하고, 교회 생활도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설교도 재미가 있어야 회중이 귀를 기울입니다. 생일을 맞은 가까운 사람에게 상품권이나 꽃다발을 선물로 주면 재미있는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런 소소한 재미가 없으면 사람 관계가 가까워질 수 없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회식을 유독 즐기는 것 같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세상살이가 그만큼 척박하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요즘 ‘힐링’을 주제로 하는 대중 강연이 인기를 끕니다. 가족과 친구와 사회에서 소통이 안 되고, 뭔가 억압된다는 느낌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방향을 제시해주는 강연입니다. 법명만 대면 알만한 승려도 있고, 티브이에 자주 나오는 심리학 박사도 있고, 성악을 전공했다가 이제는 강연자로 활동하는 어떤 분도 있습니다. 모두 그 계열에서 일가를 이룬 분들입니다. 그분들의 강연은 일단 재미가 있고, 그 내용도 충실한 편입니다. 여러 층의 인간관계에 대한 그분들의 분석과 조언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세상살이에서 소소한 재미와 흥미를 만들어가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상품권과 꽃다발을 제때 주고받는 방법을 그런 강연에서 배우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자기처럼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힐링을 경험합니다. 우리에게 모두 필요한 일들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회복할 방법을 알면, 즉 상품권과 꽃다발을 주고받으면서 삶의 재미를 느낄 줄 알면 그 사람의 영혼이 기쁨으로 충만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아내나 남편이나 부모나 자식이나 친구에게서 아무리 극진한 관심을 받아도 그것만으로 영혼의 만족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의 ‘노하우’는 삶을 약간 덜 지루하게 할 뿐이지 바울이 말하는 기쁨 안으로 들어가게 하지는 못합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절망의 끝에 숨어있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책에서 현대인의 삶을 가리켜 삶의 권태와 공허함에서 오는 ‘흥미 위주의 교제’(Spaβgesellschaft)라고 짚었습니다.
그것은 유럽과 북미 선진국 사람들의 소위 ‘흥미 위주의 교제’에 잘 나타난다. 즉 ‘나는 흥미를 맛보고 싶다.’라고 사람들은 말하면서 죽을 때까지 흥청망청하는데, 이는 그들의 삶이 무미건조하고 공허하기 때문이다. 남는 것은 죽음의 대기실에서 벌어지는 환담과 오락이다. … 문화적인 허무주의와 대량살상에 대한 허무주의적인 무감각이 20세기를 지배하였다. 과거의 커다란 규모에서도 그러했고, 오늘날의 작은 규모에서도 그러하다. “거리에서 벌어지는 범죄들만이 아니라, 이들에 대한 우리의 무감각이 본래의 악이다.”라고 뉴욕에 있는 한 친구는 대낮에 일어난 강도 습격 사건을 보고 나서 내게 말하였다. (131쪽. 부분적으로 고쳐 적었음.)
오해는 마십시오. 가족이나 친구에게 상품권과 꽃다발을 줄 필요가 없다거나 따뜻한 말 한마디 전하지 않고 무심히 지나치면서 살아도 괜찮다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 그런 재미있는 방식으로 따뜻한 정을 느끼고 사는 건 정말 필요합니다. 허무한 세상살이에서 그런 재미마저 없으면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여러분 모두 재미있게 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재미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재미로는 우리의 영혼이 만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안에서’(ἐν Κυρίῳ)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 퀴리오스는 영어로 ‘Lord’입니다. 주로 하나님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베드로는 ‘변화산’ 이야기에서 예수님을 ‘퀴리오스’라고 불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예수께 자신을 온전히 계시하셨다고 믿었기에 하나님께 붙였던 호칭인 퀴리오스를 예수께도 붙인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기쁨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탄생 이야기 중에서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가 이르는 말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기쁨 충만한 삶을 살아가십니까? 나이가 들면서 주 안에서의 기쁨이 더 풍성해집니까? 그래서 다른 삶의 조건들은 부족해도 크게 아쉽지 않다는 생각이 더 분명해지시나요? 그게 아니라 ‘주 안에서’는 점점 더 희미해지고 세상살이의 ‘노하우’만 더 늘어갑니까?
이 대목에서 바울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라고 언급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기뻐하라는 문장과 병렬로 나오는 문장입니다. 관용(너그러움)은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삶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쁨은 그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삶의 능력이고, 관용은 밖으로 드러나는 삶의 능력입니다. 전자는 존재이고, 후자는 행위입니다. 전자는 나무이고, 후자는 열매입니다. 내면에 기쁨이 있어야 너그러울 수 있고 친절할 수 있습니다. 기쁨이 없는 관용은 위선에 떨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여 대한민국에 사는 현대인들은 다른 이들을 너그럽게 대하지 못합니다. 인색합니다. 어딘가 화가 난 사람들처럼 삽니다. 인간은 천사가 아니라 실제 혈육으로 살기에 화를 낼 때도 있고, 다른 이들과 싸울 때도 있습니다. 나중에 후회할 실수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인색함과 분노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도 될 수준이 아닙니다. 뿌리가 깊습니다. 성경 표현을 빌리면, 악한 귀신에 들린 겁니다. 그 악한 귀신의 정체는 무한경쟁과 물질 만능주의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바알숭배를 그렇게 강한 톤으로 비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현대판 바알숭배인 자본주의 안에서는 사람의 영혼이 병들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도 손해 안 보겠다는 불안감으로 인해서 관용과 너그러움과 친절함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즉 귀신들림 현상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길이 없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주 안에서’의 기쁨 충만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일종의 존재론적 기쁨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비유적으로, 만추의 충만함을 아는 사람에게 아쉬운 게 무엇이겠습니까? 이게 너무 도식적인 설명일까요? 이게 실제로 가능한가요?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할 이유를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예수 재림을 의미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재림이 곧 일어난다고 예상했습니다. 묵시적 종말이 가까웠다고 생각한 겁니다. 행 2:43절 이하를 따르면 예루살렘 교인들은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서 나눠주었고 모이기에 힘썼다고 합니다. 예수 재림이 곧 있을 예정이니까 사유재산을 고수하지 않은 겁니다. 여기서 예수 재림을 우리가 아는 그런 시간표로 계산하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여러분에게 죽음이 가까이 왔다고 느끼십니까, 아직은 여유가 있다고 느끼십니까? 칠십 살인 사람과 서른 살인 사람에게 죽음의 시간은 다르게 느껴질 겁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차원에서 보면, 예를 들어서 5만 년 후의 관점으로 보면 두 사람 모두 같은 시간대에 사는 겁니다. 예수 재림이 가깝다는 말은 예수 재림으로 인해서 일어날 생명 완성을 지금 여기서 궁극적인 현실(reality)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게 과연 말이 될까요? 단지 신학적인 언어유희에 불과할까요? 여러분의 삶에서 무엇을 가장 궁극적인 현실로 경험하십니까? 세상살이가 너무 조급해서 이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으신가요?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필요도 없을 겁니다. 하나님이야말로 가장 궁극적인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라는 바울의 진술을 실질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재림은 생명 완성을 의미합니다. 주께서 가까이 오신다는 말은 생명 완성의 순간이 가까워졌다는 뜻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미’ 우리는 생명을 얻은 겁니다. 구원받은 겁니다. 그 생명 완성과 구원이 실증적으로, 즉 손에 잡히게 결정되지 않았기에 ‘가까이’ 이르렀다고 표현할 뿐이지 그 능력에 들어간 사람은 실제로는 ‘이미’ 받은 것입니다. ‘가까이’라는 말과 ‘이미’라는 말은 하나입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왔다는 뜻입니다. 다만 그쪽을 향해서 우리가 삶의 방향을 돌이키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회개하라고, 그쪽을 향해서 삶의 방향을 바꾸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생명을, 즉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먹고 배설하고 아이 낳고 돈 벌고 취미생활을 하는 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넉넉하고 자유롭게, 가능한 한 ‘럭셔리’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 일인 독재 국가에 사는 북한 사람들이나 가난한 네팔 사람들은 제대로 사는 게 아니겠지요. 그런데 오늘 우리는 생명을 생명답게 살고 있을까요? 정말 평화롭게 삽니까? 우리의 영혼이 평화롭습니까?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하십니까? 멋지게 살아보려고 애를 쓰기는 하지만 영혼이 충만하다는 느낌은 별로 강하지 않습니다. 계속 공허한 가운데 살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면서 늙어서 죽을 겁니다. 그런 인생으로 여러분은 ‘살아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신가요? 인생이 별거 있나, 그런 정도로 만족하고 살아야지,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정말 생명 충만한 삶이 있는데도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인생을 보내면서 어쩔 수 없지, 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인생입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성경이 말하는 기쁨 충만한 인생을 모른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솝 우화에 나오듯이 높은 데 있어서 포도를 먹을 수 없게 되자 ‘저 포도는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 하는 여우처럼 자기 인생을 합리화하면서 사는 건 혹시 아닌가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살아있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순간은 사랑을 경험할 때입니다. 손주를 보면 그렇게 기쁘다고 합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모든 어린아이를 손주로 여길 수 있다면 가장 행복한 사람일지 모릅니다. 예술가들은 그림을 완성했을 때, 작가들은 소설이나 시를 완성했을 때 기쁨을 경험합니다. 그들의 경험은 대체할 수 없는 사랑(에로스)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아무리 고유하고 가치가 있어도 절대적이지 않고,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할 때만, 또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할 때만 우리는 참된 의미에서 기쁨의 세계로, 즉 살아있음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참된 의미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만이 선하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안다면 기쁨이 충만하여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고 관용을 보일 겁니다. 그 사랑의 능력을 바울은 고전 13장에서 노래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여기에 묘사된 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여러분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여러분이 죽는 순간에도 여러분과 함께하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임마누엘’(하나님이 함께하심)이십니다.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까지의 설교 내용에 동의는 하겠지만 실제 삶에서 실감하기는 어려울지 모릅니다. 세상살이가 얼마나 복잡한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기쁨 충만해질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복잡한 인생 문제가 단숨에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고민할 때도 있고, 쓸데없는 일로 고집을 피울 때도 있을 겁니다. 자기 삶이 뒤죽박죽되는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본문 6절에 나오는 바울의 가르침은 따라갈 수 있을 겁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골치 아픈 일이 있어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즉 평상심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수행적 삶입니다. 사람들과의 시시비비,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하는 걱정들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럴 때 어떤 일이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나는지를 바울은 7절에서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평화가 마음(heart)과 생각(mind)을 지키신다는 말은 세상의 일로 우리의 삶이 요동치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마음과 생각을 우리 자신이 ‘마인드컨트롤’로 다스리겠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평화롭게 하시는 겁니다. 9절에서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라고 다시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경험한 사람의 삶은 당연히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믿어지나요?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전혀 감이 오지 않습니까?
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쓰는 중입니다. 그에게 걱정할만한 일도 적지 않았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기에 ‘항상 기뻐하라.’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비유적으로 애벌레에서 나비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애벌레의 삶이 왜 이렇게 구차한가, 하고 불평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음’의 존재론적 기쁨을 충만하게 경험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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