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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깨어 있으라!

 

깨어 있으라!

2008.11.23.(마 25:1-13)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결혼 잔치로 비유하셨습니다. 마 25: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는 열 처녀에게 일어난 어떤 사건과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이 처녀들은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올 때 노래와 춤으로 맞이하는 이들인데, 신앙적인 차원에서는 교회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예수님은 신랑이고 교회나 신자들은 신부니까요. 이들 열 명의 처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그것이 마 25:2절 이하에 결혼 잔칫집의 풍경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

고대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은 지금 우리와 상당히 다릅니다.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와야 합니다. 돌아오는 시간이 대개 밤입니다. 그때부터 신랑 집에서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신랑이 언제 돌아올지 대충 짐작을 할 수는 있지만 뜻하는 않은 일들로 늦춰질 때도 없지 않았습니다. 제 시간에 맞춰오지 못할 경우에 신랑 집에서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준비한 음식이 제 맛을 내지 못할 수도 있고, 멀리서 온 하객들이 지루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신랑 일행을 노래와 춤으로 맞이해야 할 처녀들이 가장 힘들겠지요.

본문에 따르면 신랑 일행의 도착이 늦어졌습니다. 약간 늦어진 게 아니라 많이 늦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열 명의 처녀들은 모두 졸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결혼잔칫집의 흥을 돋우기 위해서 노래와 춤을 여러 날 동안 준비했고, 결혼식 날 당일에는 아침 일찍 몸단장하고 공연을 위해서 리허설을 하는 등, 몸이 이루 말할 것도 없이 피곤했을 테니 말입니다.

갑자기 신랑 일행이 마을 입구 가까이 도착했다는 소리가 났습니다. 졸고 있던 열 명의 처녀들은 모두 동네 입구로 빨리 달려 나가 노래와 춤으로 신랑 일행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불을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불이 없으면 그런 잔치에 참여할 자격을 아예 상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름을 준비한 친구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주면 안 되니?” 하고 사정을 했습니다. 친구들은 안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제 삼자가 보기에는 친구 사이에 너무 냉정한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런 거절은 두 가지 점에서 합리적인 겁니다. 첫째, 나눠 쓰면 둘 다 결국 부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중요한 건 비록 다섯 명이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잔치가 끝날 때까지 불을 밝히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입니다. 둘째, 기름을 가게에 가서 사라는 것입니다. 잔치가 열리는 시골에서는 한밤중에라도 기름을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미련한 다섯의 처녀들이 부리나케 기름을 구입하러 마을에 들어간 사이에 신랑이 드디어 잔칫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곧 잔칫집 문이 닫혔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결혼 축제가 시작될 순간입니다. 미리 기름을 준비 했던 처녀들은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을에서 기름을 구입해 헐레벌떡 잔칫집으로 돌아온 다섯의 처녀들은 닫힌 문 앞에서 망연자실했습니다. 11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주인으로부터 이런 대답이 들렸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완전히 외면당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두 번이나 거절을 당했습니다. 한번은 친구들에게서, 다른 한번은 결혼집 주인에게서 말입니다. 친구와 주인은 모두 이 처녀들과 가장 가까운 이들입니다. 친구들은 노래를 함께 부르고 춤을 같이 춰야 할 이들이었으며, 주인은 이들이 노래와 춤으로 그의 결혼식을 빛내주어야 할 이였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거절을 당한 이 처녀들의 운명을 생각하면, 불쌍하기 그지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친구들과 주인이 원망스럽습니다. 정말 친구라고 한다면 비록 함께 어려움에 빠지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는 게 도리가 아닐는지요. 발을 동동 구르는 친구들을 남겨두고 자기들만 잔칫집에 들어간 다섯의 슬기로운 친구들도 속으로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을 겁니다. 주인도 그렇습니다. 자기 결혼식을 빛내주려고 왔던 다섯 처녀들이 기름을 구입하느라 조금 늦게 왔다고 해서 문을 닫아건다는 건 너무 몰인정한 처사가 아닐는지요. 이왕 늦은 결혼 피로연이니 조금만 늦추면 모두 그 축제에 참여할 수 있는데, 그걸 거절하다니 참으로 괘씸한 처사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느 모로 보든지 사람들의 일반적이고 건전한 가치관과는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왜 이런 비유를 전하고 있을까요?


재림의 지연

이 비유 이야기에서 모든 일들이 흐트러진 근본 원인은 신랑이 늦게 도착했다는 사실입니다. 신랑은 물론 예수님이십니다. 그의 재림이 예상 외로 늦어졌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본문을 천국의 비유로 말하지만 실제로는 재림의 비유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의 재림은 동일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재림의 지연이라는 사태 앞에서 마태복음 공동체는 신앙적으로 크게 흔들렸습니다. 이런 사태 앞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의 반응은 크게 볼 때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이전보다 더 집요하게 열광적인 신앙으로 몰입하는 것입니다. 지난 1992년 다미선교회 사건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서 일상의 삶을 접는 것입니다. 실제로 직업이나 학업 등을 포기하기도 하고, 또는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일상에 걸쳐있기는 하지만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이런 신앙은 정통적인 교회에서도 자주 일어납니다. 세속의 일을 낮춰보고 교회 일에만 매달리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재림 신앙에 대한 냉소주의입니다. 재림은 무슨 재림, 그건 물 건너갔어, 그런 신앙은 이 세상의 삶에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을 잠시 위로하기 위한 유혹일 뿐이야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매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사도신경에서 “저리로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하고 신앙고백을 드리지만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신자들도 많습니다.

본문의 열 처녀 비유 이야기는 이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와 같았습니다. 나중에 기름을 준비했지만 이미 잔칫집 문이 닫히고 말았습니다. 문을 열어달라고 주인에게 호소했지만 주인은 냉정하게 거절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 안면을 몰수당한 이들이 얼마나 부끄러웠을는지는 상상이 가고도 남습니다. 마태복음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내렸습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13절)

이 결론이 흥미롭습니다. 두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깨어 있으라.”와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한다.”입니다. 두 문장은 서로 연결됩니다. 신랑이 올 날과 시간을, 즉 주님이 재림할 날과 시간을 모르니까 늘 깨어서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느닷없이 임하는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5절에 따르면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들만 졸고 있었던 게 아니라 잔치에 들어간 슬기로운 처녀들도 졸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슬기로워도,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졸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들의 차이는 미리 기름을 준비했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기름을 준비한 것이 바로 깨어 있다는 뜻이겠지요.

여기서 기름이 무슨 뜻이냐 하는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알레고리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기름은 믿음이다, 헌금이다, 교회 봉사다, 기도다 하고 말입니다. 열심히 충성, 봉사해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자고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신자들의 믿음이 좋아지기만 하면, 즉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이라 해도 좋다면, 이런 방식의 설명을 뭐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건 잘못입니다. 그것은 마치 수박의 속살은 놓치고 껍질만 먹는 것과 비슷합니다.

기름을 준비한다는 것에 다른 것을 첨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대로 그것은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건 너무 쉬운 대답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그 대답을 놓칠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깨어 있다는 게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슬기로운 처녀나 미련한 처녀나 모두 실제로는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어야만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 있을 수 있고, 거꾸로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만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조금 복잡하게 들리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때, 파루시아

“그 날과 그 때”를 모른다는 사실이 이 이야기에서 핵심입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그 재림은 심판을 가리킵니다. 심판은 알곡과 가라지를, 진리와 거짓을, 생명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사건입니다. 그때 이 세상은 완성됩니다. 그 완성된 세상을 가리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님의 운명에서 경험했으며, 그의 재림을 통해서 완성된다고 믿었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때를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일반적으로만 본다면 그 때를 모르면 신앙이 느슨해집니다. 시험 일자가 정해지지 않을 때 수험생들의 긴장이 흐트러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전반적인 신앙 상태가 이런 쪽으로 기울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오늘 본문만이 아니라 이미 24장부터 이런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24:3절 이하에는 재난의 징조에 대해서, 15절 이하에서는 마지막 때의 환난에 대해서, 29절 이하에는 인자에 대해서, 32절 이하에서는 마지막 때의 심판에서 대해서 반복해서 기록했습니다. 마 24:4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오늘 본문 마 25:13절과 똑같습니다.    

그 때를 모른다는 말씀은 깨어 있지 못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깨어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깨어 있지 못함에 대한 경고일 뿐만 아니라 깨어 있음에 대한 위로입니다. 사람들은 그 때를 알아야만 영적 각성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별로 정확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세상의 생명이 완성되는 때를 모른다는 사실을 직관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순간이 바로 그 생명의 순간으로 작용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시간으로 경험됩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생생하게 경험하고 그것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임재이며, 하나님의 현재입니다. 파루시아입니다. 그 때를 모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희망이 느슨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절박해집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은 바로 그런 영적 절박성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 날과 그 때를 모른다는 말은 시간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 공간의 차원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현실이 될 때 우리는 여전히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취미생활도 하면서 살아갈까요? 지구가 자전하고 우주가 팽창이나 수축을 하고, 중력이 계속 작동되는 세계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강이 저렇게 흐르고 나무가 저렇게 낙엽을 떨어뜨리고 아침 안개가 계속 피어날지 우리는 모릅니다.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린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완전히 압도하는 하나님의 생명 사건을 가리킵니다.

탐정소설을 읽는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삼류 소설은 이미 결말이 뻔합니다. 과정도 천편일률입니다. 그러나 거장들의 탐정소설들은 논리적인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다가 독자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결말이 납니다. 그림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습니다. 창조적으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나 시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을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새롭지 않으면 그것은 예술도 아니고 문학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술의 극치이며, 문학의 극치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생명의 신비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얼마나 기대할만 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일어날지 모른다는 사실은 우리를 신앙적으로 나태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역동적으로 만드는 그분의 은총입니다. 그 사실에서만 우리는 잠정적이고 허무한 세상에서 영적 긴장감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사실에서만 오늘 우리 삶의 현실들이 궁극적 의미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이 현실들이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생명으로 변화된다는 사실에 민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변화의 기대감에 충만하게 사로잡히는 것이 바로 영성, 즉 영적 각성입니다. 본문의 표현대로 깨어 있음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영적 각성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자기가 경험하고 있는 것들을 확대하는 데에만 정신을 쏟습니다. 판넨베르크는 호렙산 모세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 “불타는 떨기”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에 대한 명백한 인식 없이 다른 많은 신들을 섬김으로써 이 세상의 선입견과 우리 자신의 흥밋거리에만 연루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세에게 일어났던 것 같이 가시나무덤불의 빛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명 완성의 때를 모른다고 해서 초조해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단한 인생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감당하고 인내하고 버텨내야 합니다. 그 삶 안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 돌입해 있습니다. 바로 문 앞에 당도해 있습니다. 바로 내일이라 하더라도 이 세상이 완전히 하나님의 절대적인 생명으로 변할 수 있다는 그 놀라운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깨어 있으십시오.

마태복음 2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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