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견디는 자
마 24:1-14, 창조절 9주일, 2014년 11월2일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오늘 예배에 참석한 교우들 중에서 실제로 전쟁을 경험한 분들은 거의 없을 겁니다. 저도 6.25 남북전쟁이 끝난 해인 1953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초등학교 시절에 겪은 전쟁의 후유증을 어느 정도는 알아도 전쟁 자체는 전해 들었을 뿐이지 그게 얼마나 끔찍한지 실제로는 잘 모릅니다. 전쟁에서는 생존만이 절대 선입니다. 휴머니즘이나 인정사정을 찾기 힘들 겁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삭막해집니다. 헛소문이 횡행합니다. 배신을 밥 먹듯이 합니다. 전쟁이나 전쟁과 비슷한 상황이 지속되면 인간의 인간다움은 메말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세상은 지옥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바로 그런 전쟁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가 경험한 전쟁은 유대전쟁입니다. 유대인들은 당시 로마제국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 정부는 원래 관용정책을 기본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제국의 지위를 상당한 기간에 걸쳐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지역도 처음에는 그런대로 원만한 통치가 가능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세금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폭리를 취했고,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을 로마 황제가 임명했으며, 어떤 황제는 자기의 신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설치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쌓이면서 유대인들의 불만은 고조되었고, 특별히 무력투쟁을 목표로 하는 열심당의 세력이 확장되다가 결국 66년에 무력 충돌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유대 열심당 사람들은 로마군과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수년간 공방이 계속되다가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서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제사장 제도와 산헤드린 종교의회도 해산되었습니다. 포로들 중에서 17세 이상 된 이들은 노예로 전락했고, 그 이하의 어린이들은 로마 병사들에게 전리품으로 분배되었습니다. 많은 수의 유대인들은 흩어져서 디아스포라가 되었습니다. 이 전쟁 이후 로마의 정책은 강압적인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일만 명 이상의 로마 군이 주둔하게 되었고, 유대인들이 내던 예루살렘 성전세는 로마의 이방 신전을 위한 세금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마 24장은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갔다가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크게 다투고 예루살렘을 빠져나왔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위용에 감탄했습니다. 제자들은 대다수가 갈릴리 촌사람들이었습니다. 영천 원당리에 살던 사람이 서울에 가서 제2 롯데월드를 보고 놀라듯이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 건물을 보고 놀란 겁니다. 예수님은 2절에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뒤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이 있고 40년 쯤 후에 예루살렘 성전은 초토화되었습니다. 유대전쟁의 후유증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그대로 미쳤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중심으로 재편된 유대교 당국자들은 기독교인들에게 율법을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카오스로 변했습니다. 내우외환의 어려운 상황 앞에서 교인들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묵시적 재난
당시 사람들은 유대전쟁을 묵시적 재난으로 생각했습니다. 묵시적 재난은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 이후에 생각했던 묵시문학, 또는 묵시사상이 가리키고 있는 세계 종말적 현상입니다. 묵시사상은 이 세상을 완전히 부패한 것으로 봅니다. 그 어떤 방식으로도 교정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악은 너무 크고 막강해서 우리가 맞설 수 없습니다. 이런 세상을 심판할 자가 바로 인자입니다. 인자는 세상의 모든 악을 완전히 괴멸시키고 하나님의 완전한 세상을 세울 자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대재난이 발생합니다. 그 재난은 우주론적인 차원에서 벌어집니다. 요한계시록에 표현된 대로 하늘이 종이 두루마리처럼 말리고, 바닷물이 뒤집어집니다. 온갖 고난과 고통과 적개심과 배신이 세상을 뒤덮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런 일들을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몇 가지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칭 그리스도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5절). 난리와 난리에 대한 소문이 횡행합니다(6절). 민족이 민족을 공격하고, 나라가 나라를 칩니다. 여러 곳에서 기근과 지진이 일어납니다(7절). 9절에 따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래와 같은 박해를 받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이런 일은 당시에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도 끊임없이 큰 박해를 받았습니다. 포악한 로마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집단적인 이지메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기독교인들은 종말이 왔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몇몇 재난 현상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기독교인들의 정신을 더 강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부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손을 쓰기가 힘듭니다. 10절에 따르면 당시 교인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 서로 배반하고 서로 미워할 것’(공동번역)입니다. 실제로 이런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함께 신앙생활 하던 이들이 배교하거나 교회를 떠났습니다. 믿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배척하고 적대적으로 대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거짓 선지자들이 교회에서도 나왔습니다. 모든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고 신앙도 찾아보기 힘들어진 것입니다. 불법이 만연해서 사람들의 사랑은 식어버렸습니다. 어떻습니까? 참으로 끔찍한 상황입니다. 단 하루도 버텨내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저런 대재난은 유대전쟁 직후, 그리고 상당한 기간에 걸쳐 기독교가 당면한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오늘 우리의 형편도 다를 게 없습니다. 1) 자칭 그리스도라 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는 일은 요즘도 일어납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 즉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오늘 누가 인류를 구원할 것처럼 말하고 다니는지요. 이미 여러분이 다 겪은 것이지만 자본주의입니다. 돈이 인간을 구원할 것처럼 우리를 미혹합니다. 은행과 대형 매장은 현대인들에게 신전과 같습니다. 돈과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구원에 이를 것처럼 생각합니다. 2) 난리, 전쟁, 기근과 지진 등, 크고 작은 재난은 요즘도 일어납니다. 고등학생들로부터 시작해서 대학생들과 군인들과 일반인들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은 우리에게 일상입니다. 돈이 없어서, 또는 따돌림을 당해서, 또는 학습 부담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모두 대재난입니다. 3) 요즘의 기독교인들도 박해를 받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물론 편집증에 사로잡힌 로마 황제가 통치하던 시절과는 박해의 방식과 강도는 다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다를 게 없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온전히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 시대가 그것을 용납할까요? 어떻게 해서라도 높은 수준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삶을 생각하는 기독교인만 이 엄중한 사실을 실제로 공감하지 못하거나 외면할 겁니다. 4) 교회 내부의 분란 현상 역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배척하고 충돌하고 미워합니다. 교양인들이 모인 교회도 이런 분란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게 우리의 숙명입니다.
견딤의 영성
마태복음 공동체가 처한 상황은 정말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는 마치 오래전 유인원들이 빙하기 앞에서 겪었을 패닉(공황)에 가깝습니다. 마태공동체는 이런 상황을 잘 극복했을까요? 아니면 풍비박산이 되었을까요? 그것을 우리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는 이런 혹독한 현실 앞에 놓인 교우들에게 마태가 제시한 신앙적 충고를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 충고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유효한 것입니다. 예상 외로 그 충고는 단순합니다. 13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기독교 신앙이 대재난을 견디는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를 견딤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견딘다는 것은 현실을 정확하게 들여다 볼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현실을 모르는 어린아이나 지적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또한 원하지 않는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이런 현실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지 않거나 맞서지 않는 사람들은 삶을 건성으로만 대하는 겁니다.
칼 바르트는 <복음주의 신학입문>에서 신학,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성 있게 대하는 신앙적 태도를 위협하는 요소에 대해서 세 가지로 언급합니다. 고독, 의심, 시험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현실을 직면하려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요소들입니다. 예수님도 마지막 순간인 십자가에 달렸을 때 이 모든 것을 그대로 경험하셨습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는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외쳤습니다. 신학의 위협을 뚫고 나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바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학이 고독, 의심, 시험에 의하여 위협받을 때 우리의 해결책은 ‘참고 견디라.’는 것이다.” 그의 말은 오늘 마태가 주는 충고와 맥을 같이 합니다. 피곤하고 골치 아픈 현실을 피하지 말고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피하지 말고 직면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견딤의 능력, 하늘나라의 복음
오해는 마십시오. 아무런 근거와 이유도 없이 무조건, 무턱대고 참고 견디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삶이 파괴됩니다. 그런 게 반복되면 병이 됩니다. 대재난의 현실을, 즉 비굴한 이 현실을 버텨낼 수 있는 어떤 힘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마지막’에 대한 영적 통찰력입니다. 본문이 ‘끝까지’ 견디라고 표현한 문장의 그 끝을 가리킵니다. 마태는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인 14절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전합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이 하늘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모든 백성에게 밝히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끝이 올 것이다.
13절의 ‘끝까지’라는 말은 14절의 하늘나라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때까지를 가리킵니다. 그때는 세상의 마지막 때입니다. 이런 견디는 힘은 당연히 하늘나라 복음에 대한 이해에서 옵니다. 하늘나라의 복음을 아는 사람의 마음은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과 같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늘나라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마지막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 복음을 생각하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만이 끝까지 견딜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 복음이 무엇일까요? 두 단어가 결합되어 있는 개념입니다. 하나는 하늘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킵니다.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생명 사건입니다. 생명의 완성이며, 절대 생명입니다. 그런 말은 너무 관념적이어서 우리에게 와 닿지 않는다거나, 그래서 지금 여기서 이렇게 재미있게, 그리고 가능한 착하게 사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와 닿지 않는다고 해서 성서의 세계를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원소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원소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하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는 경구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즉 인간에게 참된 생명의 길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이 사실이 복음입니다. 하늘나라의 복음은 곧 하나님이 행하신 생명과 구원에 대한 소식을 가리킵니다. 그것보다 우리에게 더 좋은 소식은 없습니다. 이에 대한 증거를 대라고 말하고 싶으신가요? 하늘나라의 복음은 과학실험실에서 실험하는 방식으로 증거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앞에서 인용한 노자의 경구를 다시 보십시오. 도가도비상도에 증거를 댈 수 있을까요? 증거를 찾기 전에 그걸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할 뿐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를 포함해서 지난 2천년 역사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았던 이들과 오늘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의 복음을 우리 인생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희망이 있기에 묵시적 대재난과 다를 게 없는 이 세상에서 ‘끝까지 견디는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한걸음 더 나가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라는 명령이며, 또한 거기에 순종하겠다는 결단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선교 공동체입니다.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함으로써만 존재 의미가 유지되는 공동체입니다. 사람들을 무조건 교회에 데리고 와서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살아내는 게 일차적인 복음 전파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간다면 옆 사람들에게 굳이 예수를 믿으라거나, 교회에 나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삶의 능력이 전파됩니다.
이처럼 하늘나라의 복음을 경험하거나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우리는 하늘나라의 복음에 대한 경험을 나눌 수 있습니다. 척박한 세상을 견뎌낼 수 있도록 서로가 영적으로 격려가 됩니다. 이렇게 건강한 교회 공동체로 자리를 잡게 되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늘나라의 복음 전파를 위해서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리고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기쁨으로 필요 적절한 일을 구분하며 실천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영혼의 촉수가 반응하는 일을 하게 되기에 그런 쪽으로 눈이 저절로 열리게 됩니다. 이런 신앙적인 삶을 서로 공유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유대전쟁이라는 대재난 앞에서 당혹스러워하던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마태복음 기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빌려서 전해준 충고를 들었습니다. ‘끝까지 견디시오.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이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크고 작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대재난의 위협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것을 사뿐히 뛰어넘어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현실을 그대로 직면하십시오. 마지막에 행하실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희망의 빛 안에서 그 모든 현실을 견디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예수님이 약속하신대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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