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명의 떡이다.”
요 6:35, 41~51, 성령강림후 11째 주일, 2021년 8월8일
신약성경의 공관복음이 예수님의 공생애를 있는 사실 그대로 서술한다면 요한복음은 그 사실 전달에 그치지 않고 해석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는 요한복음의 이런 특징이 가장 적나라하게 나옵니다. 공관복음에도 나오는 오병이어 사건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생선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5천 명 이상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달리 그 사건을 보도한 다음에 이를 주제로 예수님과 유대인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길게 설명합니다. 그 논쟁이 요 6장 전체에 걸쳐서 나옵니다.
오병이어 사건이 벌어진 다음 날 유대 민중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가버나움으로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참된 하나님 신앙이 아니라 오병이어 사건에 대한 호기심으로 당신을 찾은 것이라면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영생의 양식을 당신이 주겠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도록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표적이 중요했습니다. 옛날 출애굽 이후 광야 40년 과정에서 먹었던 만나가 바로 그런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 6:35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니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나는 생명의 떡이다.”(Ἐγώ εἰμι ὁ ἄρτος τῆς ζωῆς.)-에고 에이미 호 아르토스 테스 조에스-라는 문장은 48절에도 똑같이 나옵니다. 요한복음다운 신앙고백입니다. 유대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매력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66절에 따르면 일반 백성만이 아니라 제자 중에서도 여럿이 실망해서 예수님 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그들 조상이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고난의 행군을 벌일 때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만나처럼 기적적인 일들을 예수님에게 기대했었습니다. 오병이어에서 그 단초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당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더 나아가 49절에는 이런 말씀도 나옵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 55절에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라고 했으며, 63절에서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유대 백성들과 제자들이 실망하고 돌아갈 만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이 실제로 우리에게 생명의 떡인가요? 약간 변형된 51(a)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1) 이 문장도 요한복음의 특징인 ‘에고 에이미’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하늘에서 내려온 … 떡”이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하늘 어디서 왔다는 것인지요. 하늘에는 흑암 에너지와 흑암 물질만 가득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늘은 이런 우주 공간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 시대의 그들에게 우주 공간은 생명의 비밀이 충만한 곳입니다. 하늘은 생명이 은폐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주기도’에도 나오는 ‘하늘’은 우리에게 가려진 생명의 심연을 가리키는 메타포입니다.
생명의 비밀, 또는 은폐된 생명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에 대한 흔적을 우리는 일상에서 어느 정도 경험합니다. 요즘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 대폭발로 미생물에 관한 일반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래서 옛날에는 악령의 작용이라고 말했던 미생물 현상으로 인해서 인간의 삶이 무너진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 생명의 신비에 눈을 뜨게 만듭니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심연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인간 문명이 미생물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만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생물이 여전히 훨씬 더 많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생명의 모든 역학관계를 우리는 파악하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큽니다. 지구 표면에 가득한 곰팡이와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생명 메커니즘의 깊이는 아득합니다. 영원한 비밀입니다. 하나님이 숨겨 있듯이 생명의 총체는 우리에게 숨겨 있습니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인간관계를 통해서도 삽니다. 생명 경험은 인간관계를 통해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부모 없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여기 결혼한 분들도 있고 아닌 분들도 있습니다. 결혼한 분들만 놓고 본다면 파트너를 만났다는 사실도 비밀스러운 일입니다. 친구 관계도 그렇고, 교우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구샘터교회 교우들이 한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비입니다. 20년 전 여러분의 자리로 돌아간다면 20년 후인 지금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인생살이에서 어떤 사람은 만나고, 또 어떤 사람은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득합니다. 영원한 비밀입니다. 이런 인간관계도 하나님처럼 우리에게는 숨겨진 비밀입니다.
이런 말을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나비효과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닙니다. 그걸 느끼는 사람은 생명의 비밀, 또는 생명의 은폐성을 충분히 이해하실 겁니다. 조금 더 일상적인 예를 하나만 더 들겠습니다. 우리는 행복의 조건이 계량화된 세상을 삽니다. 연봉이 5천만 원은 되어야 하고, 대학 졸업장은 있어야 하고, 30평짜리 아파트는 한 채 있어야 합니다. 이런 행복의 조건이 우리를 실제로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 압니다. 행복한 조건이 없는 사람인데도 질적으로 높은 수준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생명이 근본적으로 비밀 충만한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은 우리가 다룰 수 있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과 기독교 신학은 생명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그 생명의 원천이 곧 성경이 말하는 하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만이 아니라 우리도 모두 하늘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잘 모르거나 어렴풋이만 아는 반면에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사실을 영혼 충만하게 인식하고 경험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에게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우리가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는 사실 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사실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2) 51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입니다. 이 표현은 “생명의 떡”이라는 표현과 의미가 같습니다. KJV 성경은 “living bread”라고 번역했습니다. 살아 있다거나 생명이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우리는 어느 정도는 압니다. 우선 죽었다는 말의 반대를 생각하면 됩니다. 죽으면 숨이 끊어지고, 심장이 멈추고, 뇌파가 나오지 않습니다. 요즘은 의학이 발전해서 생명 유지 수단도 있긴 합니다. 뇌사 상태로 몇 년을 더 지낼 수는 있습니다만 그게 정말 옳은 선택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죽으면 미생물이 몸의 장기부터 먹어치웁니다. 죽음과 반대되는 상태는 뇌가 작동하고 숨을 쉬고 심장이 뛰는 겁니다. 먹고 마실 수 있고, 몸에서 대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살아 있는 떡”이라는 표현은 이런 생리적 현상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건 분명합니다. 이런 생리적 현상은 아무리 잘 유지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표현은 영적인 차원, 또는 궁극적인 차원입니다. 앞에서 하늘은 생명의 비밀, 그 은폐에 대한 메타포를 가리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살아 있다’라는 말에도 해당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씨앗이 있습니다. 씨앗은 죽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씨앗에게 죽음은 곧 생명입니다. 개체로서는 죽음이지만 그 씨앗이 참여하는 그 곡식의 세계에서는 살아 있는 겁니다. 죽어 있다는 말과 살아 있다는 말을 완전히 새롭게 생각해야만 “살아 있는 떡”이라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완전히 새롭게 생각한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명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지금 당장은 모두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죽어도 사는 겁니다. 우리가 씨앗처럼 썩지만 썩음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말이 실감 나게 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죽음 너머의 생명을 실감하기 어렵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세상에서 배운 초라한 생명 개념에 묶여서 산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배고프지 말아야 합니다. 뭔가 늘 재미있어야 합니다. 고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이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우리의 한계이기도 하고, 현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소소한 인생에 매달리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도 아니고, 바울도 아니고, 순교도 감당할 수 있는 신앙의 위인들도 아닙니다. 그게 현실이지만 삶의 방향만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테니스를 예로 들겠습니다. 이게 맞는 말인지 아닌지 여러분이 판단해보십시오. 골프로 바꿔 생각해도 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일들을 생각하면 됩니다. 테니스장에 나가면 편을 나누어 서로 시합을 합니다. 이기고 싶어 합니다. 자기 실력을 뽐내고 싶어 합니다. 공이 선에 물렸는지 아닌지, 하는 작은 문제로 옥신각신도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태도가 테니스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렇게 인정받아야만 그 사람의 테니스가 살아 있는 건 아닙니다. 테니스 라켓으로 볼을 치는 순간을 몸 전체로 느낄 때 살아 있는 겁니다. 그런 느낌에 집중하는 사람은 시합에서 이겼는지 졌는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있는 떡이라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일상을 생생하게, 그리고 전혀 새롭게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그게 하나님 경험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여름 무더위도 생생하게, 그리고 새롭게 느낍니다.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해지는 겁니다. 영국 문필가인 체스터턴(1874~1936)은 『하나님의 수수께끼가 사람의 해답보다 더 만족스럽다』(비아토르 출판)에서 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상 깊은 내용입니다. “기독교회는 내 영혼의 실질적인 선생이되, 이미 죽은 스승이 아니라 살아 있는 선생이다. … 교회가 살아 있다고 믿고, 그 교회와 교제하며 사는 사람은 내일도 아침 식탁에서 플라톤과 셰익스피어를 만나리라고 기대하며 사는 사람이다. 전에 깨닫지 못했던 진리를 깨닫게 되리라는 기대를 안고 매일을 사는 사람이다.” 그가 말하는 ‘교회’를 ‘예수’로 바꿔서 읽어보십시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일상을 생생하고 새롭게 경험합니다.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를 생명의 떡(호 아르토스 테스 조에스)이라고, 살아 있는 떡(호 아르토스 호 존)이라고 고백할 수 있으신가요?
3)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을 가리켜서 성경은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51절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영원히 산다는 말은 우리 귀에 솔깃하지만 믿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무한하게 연장될 수 없거니와 연장된다고 해서 구원이 완성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리학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시간은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앞에서 예를 든 테니스를 다시 예로 들어야겠습니다. 테니스 게임을 10시간, 100시간 이어서 즐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30분만 하더라도 테니스의 깊이를 경험하는 게 중요합니다. 라켓과 공이 부드럽고도 강하게 임팩트 되는 그 순간을 느끼는 게 중요하지 시합에 이기려는 욕심으로 라켓을 마구 휘두르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순간을 느끼는 것이 바로 테니스에서 영생하는 것입니다. 그걸 경험하면 테니스 놀이를 길게 하지 않아도 행복합니다.
요즘 노인 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이슈입니다. 건강하게 장수하면 좋겠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남에게 신세를 지면서 나이가 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요양원에 들어갈 수 있다면 다행이겠으나 그렇지 못한 분들도 많습니다. 하루하루가 고생입니다. 시한부가 아니니 호스피스 환자는 아니지만, 실제로는 일상생활을 원만하게 할 수 없는 분들이라서 상황은 비슷합니다. 이것은 그런 분들만이 아니라 현대인들 모두에게 닥칠 현실 문제입니다. 평균 수명은 계속 늘지만, 건강 수명은 그렇지 못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이 몇 년을 살아야만 만족할 수 있을까요? 과학의 힘을 빌려서 2백 년을 살면 만족할까요? 동물 장기나 인공 장기를 이식하는 방식으로 1천 년을 산다면 만족할까요?
다시 질문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무엇일까요? 설교자가 어떤 대답을 할지 이미 예상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영생은 생명의 길이가 아니라 생명의 깊이를 가리킵니다. 그 깊이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깊이가 무엇인지 느낌이 오지 않으시나요? 앞에서 예로 든 테니스 이야기만으로는 부족하니까, 본문에 나오는 말씀을 짚어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4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라는 말씀은 이미 39절과 40절에도 나오고, 오늘 본문 뒤인 54절에도 나옵니다. 영생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종말에 다시 산다는 뜻입니다. 종말론적인 신앙입니다. 그 종말은 생명의 깊이입니다. 너무 멀게 느껴져서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할 자신도 없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그 종말 생명으로 부활하신 분이기에 그를 믿는 자는 종말에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산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엄정하고 과학적인 사실에 기반한 것이 아니기에 확실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사건은 다 믿음에 속합니다. 인과율을 벗어난 양자역학의 시대에 우주의 시초가 무엇이며, 마지막이 무엇일지는 아무도 실증적인 방식으로 답을 얻지 못합니다. 희망하고 믿을 수 있을 뿐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히브리서를 기록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히 11:1) 예수님이 세상 마지막 날에, 그 마지막 날은 동시에 현재 이 순간이기도 한데, 우리를 살린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서 생명의 실상을 만날 것입니다. 예수님이 ‘호 아르테스 테스 조에스’, 즉 생명의 떡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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