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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 (요 20 : 24 ~ 31)

2024년 6월 2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0lpVRx-Ro0U&t=1811s

▣ 들어가는 말

- 의심하지 않는 삶

니체는 『아침놀』에서, “그리스도교는 그 원을 닫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 심지어 의심을 죄로 선포했다. … 우리는 그리스도교에서 믿음의 기초와 그 기원에 대한 모든 심사숙고가 죄로 치부되어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교에서 원하는 것은 맹목성과 도취 그리고 이성을 삼켜버린 파도에 대한 영원한 노래뿐이다.”라며 기독교를 공격합니다. 그리스도가 생명력을 잃은 것은 무엇보다도 ‘의심’을 죄로 치부해 신도들을 맹목적인 인간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너무나 아픈 지적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믿음을 강조하면서 이성과 객관적이고 합리적 질문과 생각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누구나 자연스럽게 품게 되는 성경에 대한 여러 의문과 의심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죄책감과 두려움이 들게 합니다.

“내가 매일매일 덕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시험해 볼 때,… 검증되지 않는 삶은 살 만한 보람이 없다.”(플라톤, 『변론』 중)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법정에서 한 변론 가운데 일부입니다. 그는 스스로 시험하지 않는, 의심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삶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하고 검증하면서 사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한나 아렌트 역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무엇보다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지요. 인간이 생각하기를 멈출 때, 의심하고 검증하기를 멈출 때 얼마나 추하고 끔찍한 괴물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그런데 니체의 지적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검증하지 않으며 오직 성경에 쓰여 있는 글자 그대로, 목사가 말하는 대로, 아무런 의심도 없이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그것이 진정한 믿음인 것으로 생각해왔습니다. 끔찍합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비웃는 추하고 끔찍한 모습이 된 것은 아닐까요. 대부분 신앙인도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게 된 것은 아닐까요.

성서가 말하고 있는 믿음은 생각 없는 맹목적일까요? 이성과 믿음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생각, 의심, 검증 등은 어떤 의미일까요? 믿음이 없는 불신의 행동일까요? 믿음과 의심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요한의 복음

- 사도 요한

논란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요한복음의 저자는 사도 요한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열두제자 가운데 가장 오래 생존했던 사도로,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밧모섬에 유배당했다가 에베소에 돌아와 사역했습니다. 밧모섬에서의 계시 경험을 기록한 것이 ‘요한계시록’이지요.

공관복음서에 비교해 요한복음은 상당히 철학적이고 신학적입니다. 요한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통용되던 아람어뿐 아니라 헬라어에도 능통했던 것으로 보이며, 헬라철학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로 요한복음을 시작한 것만 보더라도 대단히 철학적이며 신학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복음, 생명에 관하여 놀라운 계시적 이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성과 계시를 함께 갖춘 사람이라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 요한의 시대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가 모두 완성되고 난 후, 최소 20년이 지나 기록되었습니다. 기록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대략 A.D. 90년 정도입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도가 순교한 이후였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신앙과 복음의 진리가 심각하게 위협을 받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두 가지는 ‘예수는 누구신가’와 ‘복음(거듭남)’에 관한 것입니다.

그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의 기독교 박해에 관해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서 타종교, 타민족에 대해 온갖 악행과 박해를 저질러온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이전 기독교 역시 엄청난 고통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 로마의 기독교 10대 박해 : 1.네로(64~68), 2.도미티아누스(90~96), 3.트라야누스(98~117), 4.하드리아누스(117~138), 5.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6.셉티미우스 세베루스(202~211), 7.막시미누스(235~236), 8.데키우스(249~251), 9.발레리아누스(259~260), 10.디오클레티아누스(303~311)》

 

로마의 기독교 박해는 A.D. 64년 네로 황제 때 시작해 313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될 때까지 약 250년간 이어졌습니다. 로마인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믿으며 우상 숭배와 황제 숭배에 굴복하지 않는 기독교인을 눈엣가시로 여겨 배척했습니다. 황제들은 제국을 하나로 통합하고 신들의 보호 속에 번영시키겠다는 명분 아래 기독교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혹독히 탄압했지요.

일반적으로 로마 제국은 제국의 안정을 위해 속국, 즉 피정복민들의 정치나 종교에 비교적 온건한 관용정책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는 예외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제국의 안녕을 해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로마 신들에 대한 숭배 거부는 ‘신들이 가져다주는’ 제국의 평화와 번영을 위협하는 행위로 치부됐습니다.

원형경기장에서 야수에게 갈기갈기 찢기게 하거나 건초에 묶어 야외를 밝히는 ‘인간 촛대’로 삼기도 했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을 신으로 선포하고 숭배를 강요했는데, 기독교인들이 이를 따르지 않자, ‘기독교인들이 황제의 예배에 복종하지 않아 모든 신이 노했다.’라는 죄명을 씌워 탄압합니다. 재산을 몰수하고 맹수들과 결투를 시키기도 합니다. 바로 이 시기에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다가 계시를 받고 요한계시록을 집필하지요.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로마를 떠나 지하로 은둔했는데, 이때부터 박해를 피해 지하 무덤(카타콤)에서 예배드리는 일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한은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들의 신앙은 바람 앞에 촛불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로마의 박해는 갈수록 끔찍해졌고 수많은 사람이 신앙을 버립니다. 그리고 함께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도 모두 순교했습니다. 이제 노쇠한 자신만 남았습니다. 신앙을 가진 이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늙은 요한만을 바라봅니다. 제국 곳곳으로 흩어져 숨어 있는 신앙인들을 향해 무엇을 말해야 할까요. 이런 혹독한 상황을 주님을 무엇이라 말씀하실까요. 신앙을 지키는 일이 이리도 고통스러운 일이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요. 그 순간 요한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요?

 

 

▣ 나의 주, 나의 하나님!

- 기다림 없는 기다림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이 비어있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 빈 무덤을 확인합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후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리지요.

그때도 제자들은 아직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문을 닫아걸고 모여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 그저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예수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두려움에 떨려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던 것일 뿐입니다. 어쩌면 이런 장면은 로마의 박해를 피해 지하 공동묘지에 숨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요한 당시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르는 기다림입니다. 어쩌면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뭔가를 기다리고 있지만, 정작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기다림 말입니다.

 

-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찾아오셔서 부활하셨음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자리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셨다고, 만났다고 아무리 일러주어도 도마는 믿을 수 없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0:25)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기 전에는 결코,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의심 많은 도마’라며 그를 색안경을 끼고 보아왔습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도마의 의심, 물음은 지극히 정당한 것입니다. 오히려 믿어지지 않으면서 적당히 믿는 척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당합니다. 그의 정직은 보석과 같습니다. 수많은 교회와 신앙인이 보여주는 정직하지 않은 모습보다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은 비난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려하고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자신의 무지와 불신을 인정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진리를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진정으로 진리와 구원을 찾으려는 마음이 없기에 우리는 그냥 대충 얼버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진리를 찾으려는 열망이 있다면, 그것이 진심이라면, 결코 적당히 대충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지요.

문을 닫아걸고서 방안에서 숨을 죽이고 잔뜩 웅크리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끔찍한 박해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예수가 떠나고, 예수를 직접 경험하고 따르던 제자들마저 하나, 둘 사라지고… 마치 목자를 잃어버린 양 떼와 같이 이리저리 흩어지고 방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에 관해 듣기만 하고 직접 만나보지도 만지지도 못한 당시 그리스도인과 지금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설교를 듣고, 말씀을 읽고, 예배를 드려도 믿어지지 않고, 신앙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우리의 부끄러운 실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예수를 체험하고 만지려는 우리의 갈망을 대변하고 있기도 합니다.

 

-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8일이 지나고 다시 주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십니다. 왜 8일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을까요? 아마도 ‘어둠의 밤’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충분한 의심의 시간, 고뇌와 방황의 시간이 무르익어야 했을까요. 제자들을 재차 찾아오신 것은, 의심하는 도마를 위해서입니다. 부활의 예수를 경험한다는 것. 신을 경험하고 그것을 근본으로 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객관적으로 체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 목회자의 선포, 열광적인 종교적인 분위기 등으로 적당히 경험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지요.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만이 인간은 신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도마를 향한 예수의 말입니다. 그 순간 도마의 눈이 열립니다. 예수를 봅니다. 진정으로 그분이 하나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20:28) 놀라운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고백이 아닙니다. 진정한 개인적 만남을 통해 그는 신을 경험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납니다.

 

- 무엇이 눈을 여는가?

놀랍고 재미있는 사실은 도마는 예수의 상처를 만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당연히 도마는 만져보고 믿었다고 생각해왔는데, 자세히 보니 그는 예수의 상처를 손으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직접 만져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라던 그는 정작 부활한 예수를 만나지만 손으로 확인하지 않습니다. 그는 부활한 예수의 말씀을 믿는 것이지, 상처를 만져보고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의 말씀에 복종함으로 위대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하나인 불트만 역시 도마가 예수를 믿은 것은, 직접 만지는 체험이 아니라 예수의 ‘선포의 말’에 의한 것이라 지적합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를 만나는, 진정으로 신을 만나고 경험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신경험은 개인적인 체험이나 합리적 추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0:29) 도마의 고백을 들은 예수의 말입니다. 조금 더 문맥에 맞춰 보충해서 표현해 보자면,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는구나. 그러나 나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도 (보고 믿는 자와 같이) 복되도다.”(20:29)라는 의미가 됩니다. 보아서 믿는 자들을 비난한 것이 아닙니다. 보고 믿는 자나, 보지 못하고 믿는 자나 똑같이 복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본고로 믿는 자”는 1세대의 신앙인들을 표현한 말입니다. 예수를 직접 보고, 만나고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직접 경험한 이들이지요. 얼마나 좋았을까요. 예수의 말과 행동을 그 현장에서 목격하고 기꺼이 예수를 따르게 된 사람들은요. 그러면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2세대 신앙인들, 즉 요한이 복음서를 쓸 당시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일 테지요. 당신들이 직접 예수를 본 적이 없고 그분의 가르침을 들은 적도 없지만, 그래서 지금의 지독한 박해의 상황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것이 어렵고 믿음 자체가 흔들리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너무나 복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종합해보면, 하나님 경험, 믿음은 ‘보았기 때문에’… 직접적 경험이나 뜨거운 영적 체험을 통해서나, ‘보지 않고’… 간접적으로 듣고 객관적인 이성적 판단을 통해서 하게 되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가는 방법이 아니라, “믿음 자체”가 복 있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은혜는 직접적이고 경험적인 접촉을 통해서만 오는 것이 아니며, 간접적이고 객관적인 합리적 이성을 통해서만 오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런 방법으로 예수를 믿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의 경험, 믿음은 오직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0:27)는 예수의 말을 통해 요한은 메시지의 핵심을 드러냅니다. 믿음은 방법론이 아닙니다. 믿음은 은혜입니다.

박해의 어려움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하고 있는 이들에게, 믿음이 흔들리고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갈등하고 있는 이들에게, 요한은 믿음은 직접적이나 간접적이나 어떤 ‘특정한 방법’을 통해서 생겨나고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직접 보고 그에게 열광했던 수많은 군중이 있었으나 그들 모두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을 듣고 마음이 뜨거웠던 수많은 이들이 있지만, 그들이 모두 믿음을 가지게 된 것도 아닙니다. 믿음을 가지게 된 방법이 아니라 지금 소유하고 있는 믿음이 얼마나 신비한 것인지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그곳에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 나가는 말

- 의심하라! 끊임없이 의심하라!

도마는 아람어로 ‘타우마’ 즉 ‘쌍둥이’라는 의미입니다. ‘타우마’의 원래 의미는 ‘내적으로 완전한/온전한’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도마는 예수와 쌍둥이로 불릴 만큼 각별한 사이였고, 예수 가르침의 의미를 가장 잘 파악하고 전달했던 제자라서 이런 이름으로 불렸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도마가 마치 예수님처럼 보였다는 말이지요.

도마복음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삶의 의미와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고 추구하는 자는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그 탐구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이 자신이 알고 지내온 것과는 전혀 달라 혼동에 빠질 것이다. 그 혼동의 과정을 통해 그는 새로운 것을 발견해 놀라운 경이로움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면 그 발견한 경이로움을 통해 모든 것을 다스리는 지배자가 될 것이다.”

진정으로 진리(삶의 의미, 자신)를 깨달을 때까지 의심하고 생각하고 탐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닫게 되면, 혼란스럽고 당황할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생각해왔던 기대해왔던 것과는 너무나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당황스러움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경이로움”일 것입니다. 신의 눈으로 본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고귀하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로 인해 진정한 주인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 의심은 믿음으로 가는 문

직접적인 체험과 경험도, 합리적 의심과 이성도 믿음의 뿌리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이끄는 문이 될 수는 있습니다. 보고 듣고 읽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체험과 경험도 온전치 못합니다. 오직 믿음만이 실재에 참여하게 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복음서를 기록한 것은 믿음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극심한 고난과 박해 속에서 흔들리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들을 바라보는 요한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로 용기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줄 수 있었을까요?

확실한 기적과 이적을 보여주면 좋겠지만, 그는 압니다. 그것이 믿음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요. 그러니 그들에게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성서는, 복음서는 결국 믿음을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읽어야 실제적 삶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존재의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너무나 멋진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요한의 당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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