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21:15-19, 부활절 제3주, 4월14일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의 제자들은 12명입니다. 이 사실은 막 3:13-19, 마 10:1-4, 눅 6:12-16절에 나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제자들을 거명할 때 반드시 베드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가 마지막으로 거론되는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베드로가 첫 번째로 거론되는 이유는 복음서에 베드로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제자로 나온다는 데에 있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베드로에게 사도의 수위권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마태복음의 이야기가 이런 주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대답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며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8,19절).
베드로를 제자들 중에서 우두머리라고 보는 건 그렇게 정확한 게 아닙니다. “내 교회를 세우리니...” 하는 마태복음의 진술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모든 교회가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복음서 기자는 베드로의 긍정적인 모습만이 부정적인 모습도 자주 언급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사탄아!” 하고 책망 받은 적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시고 재판받을 때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실제로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보다 낫다고 볼 수 없습니다. 베드로에 대한 복음서의 이야기는 자연인 베드로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제자 전체에 대한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과정에서 열두 제자들의 이야기를 정리한 것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
오늘 설교 본문인 요 21:15-19절도 그런 이야기 중의 하나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의 대답입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내 양을 먹이라.” 이런 질문과 대답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이 세 번이나 반복해서 사랑하느냐고 물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신적인 차원의 사랑이라는 뜻의 ‘아가페’라는 단어로 물어봤는데, 베드로는 친구 사이의 사랑이라는 뜻의 ‘필로스’라는 단어로 대답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세 번이나 반복되는 질문에 베드로는 나중에 눈치를 채고 ‘아가페’로 대답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런 설명은 오해입니다. 헬라어 성경을 정확하게 보면 예수님은 아가페를 두 번, 필로스를 한번 사용해서 물었고, 베드로는 세 번 다 필로스로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아가페와 필로스의 구별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물론 아가페, 필로스, 에로스라는 단어를 구별하긴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분리되는 건 아닙니다. 당시 헬라 사람들도 아가페와 필로스를 교차적으로 사용했고, 복음서 기자들도 여러 곳에서 동의어로 사용했습니다. 에로스를 일반적으로 이성 사이의 사랑이라고 해서 아가페나 필로스보다 낮추어보는 이들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이라는 책에 의하면 에로스가 없으면 문명도 없습니다. 예술적인 열정은 다 에로스입니다. 시인의 행위도 에로스입니다. 요한복음서 기자는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믿음을 아가페의 차원으로 올리려는 게 아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의 어떤 특별한 관계를 가리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관계는 제자만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에게 적용됩니다. 그 특별한 관계라는 게 무엇일까요?
우선 예수님이 왜 세 번이나 물으셨는지를 보십시오. 그냥 한 번만 물어도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베드로가 어린아이도 아닌데 세 번이나 반복했다는 건 좀 이상합니다.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수 있긴 하지만, 반복한다고 해서 강조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잔소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집에서 아내나 남편에게 “당신 나 사랑해?”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혹은 부모가 자식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물을 수 있습니다. 한번 대답을 듣고도 다시 두 번이나 더 물었다면 짜증이 날만합니다. 베드로는 세 번의 질문을 듣고 근심했다고 합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앞에서 짚었듯이 바로 얼마 전에 예수님과의 관계를 세 번이나 부인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을 하더라도 배교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는 경고가 아니겠습니까. 부부가 아무리 사랑한다고 다짐해도 배신할 가능성도 열려 있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약합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양심에 가책이 되어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하신 뒤에 또 똑같이 세 번에 걸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세 번의 경우가 조금씩 그 표현이 다르기는 합니다. 두 번째에서는 “내 양을 치라.”고 했고, 세 번째에서는 “내 양을 먹이라.”고 했습니다. 세 번의 의미는 다 똑같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에 머무는 게 아니라 실제로 주님의 양을 먹여야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양을 먹인다는 것은 기독교 공동체를 돌보는 일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목회입니다. 제자들은 목회의 사명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열두 사도들의 목회적 사명은 속사도들에게 이어졌고, 다시 교부들에게, 그리고 여러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어졌습니다. 그런 전통은 지금까지 지속됩니다. 이들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는 이들 없이 교회 활동이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목회는 두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개교회의 목회입니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바울의 편지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교회 지도자들은 개별 교회를 책임졌습니다. 예배를 인도하고,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교회가 사이비 이단에 의해서 혼란스러워졌을 때 바른 길로 이끄는 사람이 교회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아픈 사람을 찾아가서 기도하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을 충고하고, 서로 싸운 신자들을 화해시킵니다. 개별 교회의 신자들을 영적으로 돌보는 일이 목회입니다.
목회는 개별 교회의 문제에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에큐메니컬 차원의 일들도 많습니다. 기독교는 세계 공의회를 통해서 중요한 교리를 결정했습니다. 예를 들어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에 열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그것입니다. 거기서 예수의 본질이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호모 우시오스’라는 신학용어가 결정되었고, 그것에 기초해서 삼위일체론도 기독교의 정식 교리로 결정되었습니다.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는 우리가 지금 성경으로 사용하는 신약 27권이 정경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것이 다 목회입니다. 오는 10월30일부터 11월8일까지 부산에서 열리는 WCC 총회도 이런 역사적 공의회와 연결됩니다. 이런 모임을 통해서 교회는 역사와 대화하면서 온 세계에 자신의 정체성을 표명합니다. 이런 것도 모두 베드로를 향해서 주신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건 간단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목회를 잘 하려고 해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사도들이 직접 목회하던 초기 교회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사도의 권위가 늘 유지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사람들도 나왔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아직 모든 체계가 잡히기 전이기 때문에 서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어떻게라도 처리해나갈 수 있지만, 교회 밖에서 불어 닥치는 시련은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사도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로마 체제 아래서 기독교 신앙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여러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반 신자들보다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더 어려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 황제를 비롯해서 관료들은 일벌백계로 교회 지도자들을 다스려야만 다른 사람들의 복종을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고난의 길을 갔습니다.
그 사실이 오늘 본문에 반영되었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사랑과 양에 대한 이야기가 끝난 뒤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운명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베드로의 순교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뭘 말하려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의 목회자요 지도자로 사는 것만이 아니라 고난을, 심지어는 순교까지 각오하라는 뜻입니다. 그런 뜻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말씀이 곧 본문 마지막 구절에 언급된 “나를 따르라.”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과 고난을 감수하는 것은 똑같은 의미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이 말씀이 요한복음에는 마지막 21장에 나오지만 공관복음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앞부분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공생에 초창기에 갈릴리 해변에서 어부로 살던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은 어부가 되게 하리라.” 다른 제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부르심에도 이미 베드로에게 주어진 제자들의 운명이 포함되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의 운명과 일체가 되겠다는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의 고난 없이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피하고 부활의 영광에만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
위의 설명은 다 아는 이야기이지요? 그렇지만 실제 삶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끼지는 않으시는지요? 흔한 말로, 고난은 ‘노’이고 영광은 ‘예스’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를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당시 교회를 대표하는 베드로에게 하신 것이기 때문에, 좀더 확대한다고 해도 예수님의 열두 제자나 당시 교회 지도자들에게 준 것이기 때문에 오늘의 일반 신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또는 이런 고난과 순교 등은 폭력적인 로마제국이 지배하던 시대에 살던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지 지금처럼 자유가 보장되고 민주화된 나라에서 사는 오늘 대한민국의 기독교인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제자로 산다는 것과 고난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실제적인 문제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고난과는 상관없이 살고 있으니까요. 기독교 신앙이 고난과 연결된다면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도 있을 겁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들에게 이 문제를 시원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만 말씀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들 안의 불성을 찾으시오. 해탈하시오.’라고 말하지 않고, 또는 똑똑하고 모범적인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에게 영적인 화두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요소가 부족합니다. 종교적 위로나 힐링이나 기복이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람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너를 부인하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를 따른다는 겁니다. 웬만한 결단이 아니면, 제 정신으로는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르라.’는 말씀의 중심을 모른 채 무조건 믿은 광신자가 되든지, 아니면 그 부르심을 하찮게 생각하는 냉소주의자가 됩니다. 둘 다 기독교 신앙의 왜곡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질문합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저 말씀을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왜 믿음이 없냐고 책임을 묻는 말씀은 아닙니다. 일부러라도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압박도 아닙니다. 삶의 내용은 각자가 다릅니다. 어느 한 방향으로만 강요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실제로 예수의 제자로 사느냐, 하는 엄중한 질문이자,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제자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운명에 온전히 집중할 겁니다. 그분의 운명이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그분에게 일어난 일이 실제로 무엇인지 더 깊이 아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첫 걸음입니다. 바쁜 일을 다 처리하고 시간이 있으면 그렇게 하실 건가요? 그러다가 우리 인생은 다 끝나고 말 겁니다. 잊지 마십시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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