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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나병환자 열 사람의 믿음 (눅 17 : 11 - 19)

2024년 11월 17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owOPRC_r9HE?si=tSf7kpLRKGx01Fgp

▣ 들어가는 말

- 지은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으로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골4:14)이며, 사도 바울의 충실한 선교의 동역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눅1:3) 라는 표현에서 그가 치밀하고 뛰어난 신학자임을 알 수 있으며 특히 소외된 자, 가난한 자, 여성, 이방인 등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이방인 의사이자 바울의 동역자로, 보편적 구원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진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역사적 사실과 신학적 의미를 신중하게 기록하여, 초대교회의 신앙을 전하고 모든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을 증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 이방인 의사 누가의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오늘의 본문을 보시면 좀 더 메시지가 선명해질 것 같습니다.

- 본문의 의도

오늘 본문이 포함된 17장을 살펴보면,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4절)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10절) 이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18절) 이는 이방인 나병 환자에게,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21절) 이는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이지요. 대상이 다르긴 하지만 모두 마음가짐, 태도에 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를 다르게 만드는 것, 우리를 구별되게 하는 것, 같은 세계를 살면서 어떤 이는 지옥과 같은 삶을, 어떤 이는 천국과 같은 삶을 살게 하는 것. 그것은 결국 태도, 마음가짐 아닐까요.

열 명의 나병 환자 이야기는 흔히 ‘감사’의 관점에서 해석해 왔습니다. 열 사람 모두 고침을 받았지만, 오직 한 사람만이 감사했고, 이 감사로 인해 구원을 얻었다는 식이지요. 그런데 감사하는 사마리아인을 향한 예수의 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를 보면, 구원의 이유는 감사가 아니라 믿음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을 해석할 때, 감사가 아니라 믿음의 관점으로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사마리아인의 믿음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본문 말씀을 그저 감사해야 한다는 식이 아닌, 믿음이 무엇인지, 그 믿음의 결과로 얻은 구원은 어떤 것인지 등을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한 마을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17:1) 누가는 의도적으로 지명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였으나,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의해 정복당한 이후 이민정책에 따라 다양한 이방인들이 유입되면서 혼혈이 생기게 되면서, 정통 유대인들에게 있어 “순수하지 않은 혼혈민족” 취급을 받았고, 종교적으로도 다른 관습을 유지하면서 유대인들과 깊은 갈등과 편견이 존재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는 예수께서 사시던 곳이고 주로 활동하던 곳이기도 했으나 갈릴리가 주요 무역로와 가까워 유대와 사마리아 보다 상당히 개방적이고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어우러져 있는 지역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전통적 유대인들은 꺼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지역으로 가신 것은 기록할 가치가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 역시 그러한 사정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고, 그러니 그런 길로 가신 것은 분명 목적과 의도가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왜 그러셨을까요. 선교가 목적이라면 사람들이 많은 곳, 번화한 길을 가는 것이 마땅할 터인데 말이지요. 그는 왜 번화가를 외면하고 인적이 드문 버려진 곳으로 행로를 잡았을까요. 아마 그곳에 누군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를 만나기를 기다리는 누군가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지요. 스스로 예수에게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그곳에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알지 못했으나, 예수는 의도적으로 그들을 찾아간 셈입니다.

- 소외된 존재

그곳에서 예수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만납니다. 그들이 이곳에 있었던 이유는 나병 환자들은 사람들과 함께 살지 못했고 성 밖으로 쫓겨나서 외진 곳에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병을 가진 자들이었기에 행여나 사람들에게 나아갈 때는 자기 입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를 외쳐서 사람들이 피하도록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사람이 살지 않는 격리된 곳에 지내야만 했던 것이지요.

따라서 이 사마리아와 갈릴리가 맞닿는 지역은 그들의 거주 지역으로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이 혐오하도록 싫어하는 곳이었기에 아무도 그리로 가려 하지 않는 곳이었고 갈릴리는 많은 여행객과 상인들이 드나드는 번잡한 곳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좋고, 구걸하며 먹고 살기에도 좋은 곳인 셈이지요. 버려진 땅에, 소외된 사람들, 버려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틸리히에게 소외란 인간이 자신과 세계로부터,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신(神)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소외는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 분리되고 단절된 상태로, 이는 인간이 경험하는 근본적인 불안과 상실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인간은 본래 신과의 일치 속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지만, 소외 상태에서는 그 근원적 관계로부터 단절되어 존재의 불안 속에 놓이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인간 실존을 “나병 환자”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 무엇으로부터 소외인가?

하나님께 버림받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열 사람의 나병 환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민족, 가족들에게서 버림받아 아무도 살지 않는 황량한 벌판과 같은 곳에서 죽음 같은 삶을 연명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원망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며… 가족들이 보고 싶어 외로움과 서러움에 몸서리치며 그렇게…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저주스러운 삶이지만 그래도 목숨을 끊어버릴 수 없어 오늘도 마을이나 길거리, 성문 어귀로 나가 구걸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갑니다. 사람들의 멸시와 아이들의 돌팔매쯤은 이력이 났습니다. 손가락 발가락이 문드러져 떨어져 나가고 온몸에 성한 곳이라고는 없습니다. 막 지옥에서 올라온 괴물과 같은 모습이다. 점점 더 흉측스럽게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더 이상의 고통이 없다. 이 삶이 곧 지옥이다. 하늘아래 이보다 더 비참한 삶이 있을까?

틸리히는 인간의 소외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자기 소외, 타자와의 소외, 존재 근원으로부터의 소외입니다. 먼저, 자기 소외는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자아와 자신의 본질 사이의 단절로, 자신의 내적 통합을 잃어버리고 참된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종종 타인의 기대와 사회적 역할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정의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참된 자기와 멀어지며 자기 소외에 빠지게 됩니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하지 못하고, 타율적 존재로 전락하게 만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둘째, 타자와의 소외. 인간은 또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소외를 경험합니다. 타자와의 소외는 인간이 타인과 진정한 연대와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고립과 단절을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사회적 역할과 구조 속에서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를 수단적인 것으로 경험하며, 진정한 만남과 상호 이해가 결여해 있습니다. 이러한 소외가 인간의 불안과 고독을 더욱 심화시키게 되지요. 마지막으로, 존재 근원으로부터의 소외입니다. 인간이 신 또는 궁극적 존재와의 관계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근원적 존재(ultimate being)와의 관계에서 단절된 상태에 놓여 있으며, 이로 인해 삶의 의미와 방향을 상실하게 됩니다. 틸리히에게 신과의 일치는 인간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제공하는 궁극적 관계인데, 이 관계가 끊어질 때 인간은 깊은 영적 공허와 불안 속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소외는 인간이 경험하는 불안의 가장 깊은 원천이자,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통해 극복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 희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렇게 버림받고 쫓겨난 자들이 하나, 둘 모여 열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가슴 저린 사연을 안고서 서로를 의지하며 그렇게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습니다.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견디고 있는 삶입니다.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 아닌가요. 실존적 불안을 껴안고 사는 삶이지요.

그래도 버릴 수 없는 것은 희망이지요. 깊은 심연의 불안을 안고 있기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희망을 찾습니다. 행여나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병이 고쳐지지나 않을까? 사랑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아내, 아이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한 번만 안아볼 수 있다면… “죄인 된 인간의 실존”입니다. 절대적 타자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신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요.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고 있지만, 모두 다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겹게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습니다. 공연히 큰소리치며 호기를 부려보기도 하고 짐짓 당당한 척해보기도 하지만 깊은 내면에는 절망과 고독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잊기 위해 돈이나 명예, 오락, 술 등에 빠져 보지만, 인간의 비참한 실존을 메울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저 잘되겠지,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행복한 날이 올 거야… 안개와 같은 헛된 망상을 붙잡고 있을 뿐이지요.

 

▣ 예수를 만나다!

- 오시는 하나님

그러한 그들에게 깊은 절망과 편견과 차별을 넘어 예수가 옵니다.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 은혜입니다. “멀리 서서” 놀라운 은혜가 우리를 향해 왔지만, 우리는 그 은혜에 합당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전적 타락, 전적 무능력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병 환자의 모습으로 타인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습니다. 그저 멀리 서서 절규할 뿐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보지 않아도 그들의 외침이 얼마나 절박했을 것인지, 얼마나 처참했을 것인지, 그 소리가 얼마나 피가 끓고 애가 타는 것이었을지 알 수 있겠지요. 그리고서 그들은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칩니다. 고쳐 달라가 아닙니다. 그저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존을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은 쉽게 구원해달라고 하거나 고쳐달라고 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습이, 처지가 얼마나 끔찍한지 잘 압니다. 그래서 차마 고쳐달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불쌍히 여겨주심을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에게 미움받고 배척을 받아왔기에, 자신마저 용서할 수 없는 추한 모습이기에 예수께서 외면하시지 않고 그저 불쌍히 여겨주시기만 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철저히 자신의 무능력, 무가치, 추함과 더러움에 대해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본성의 심연. 그 깊은 어둠을 들여다본 자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존재의 용기

그들을 보시고서 예수는 말합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불쌍히 여겨주소서” 절규에 대한 예수의 답입니다. 분명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가타부타 어떤 언급도 없이,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라 합니다. 틸리히의 표현을 빌리면 “존재의 용기”로의 초대 같습니다. 찾아온 예수를 향해 다가가는 장면은 단순한 행동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소외와 고통을 인정하고, 그 상황 속에서도 구원과 회복을 갈망하며 나아가는 용기를 보여줍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처한 무력한 상황을 직시하면서도 절망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예수께 나아가는 용기를 발휘한 것입니다. 이 용기는 그들이 그동안 두려워하고 고립되었던 상황을 넘어서,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며 다시금 의미 있는 삶을 회복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실존적 결단을 나타냅니다. 이는 틸리히가 말하는 불안에 직면하는 용기, 즉 무(無) 앞에서도 자신을 긍정하려는 존재의 용기인 것입니다.

 

▣ 나가는 말

- 인간의 일그러진 실존

나병 환자 열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인간 존재의 일그러진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과 세계와 사람과 삶과 자신에게서 소외되어 깊은 불안과 절망 속에서 사는 인간의 모습.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인 된 인간이란 의미 아닐까요. 나병 환자와 같이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것이 없는 인간 실존의 참담함. 그 무엇 하나 일그러지지 않은 것이 없는 철저히 병든 존재. 그러면서 헛된 희망과 망상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바로 저의 모습. 우리 모두의 모습을 봅니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가진 그 깊은 절망과 불안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저 감추고 살고 있을 뿐이지요.

- 하나님의 오심과 존재의 용기

그 불쌍한 영혼을 향해 주님은 오십니다. 하나님의 오심은 오로지 은혜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오시는 하나님은, 그 오심은 곧 ‘존재로의 초대’입니다. 인간을 향한 신의 오심은 단순한 우리 삶의 문제 해결이나 마음의 위로가 아닙니다. 온전함으로의 초대입니다. 존재의 용기를 갖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비참하고 추악한 존재가 아니라, 온전한 신의 형상을 가진 자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세상에, 자신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 오직 믿음이 구원하리라

모두가 각기 자기의 길로 달려간 자리에 한 사람이 남습니다. 멸시와 조롱을 받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예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자신에게 존재의 용기로 초대해준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 초대에 용기를 냄으로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존재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그 놀라운 영광, 은혜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틸리히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고 불안을 초월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예수의 치유를 통해 나병 환자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의 근거를 다시 회복하고, 그들이 잃어버렸던 사회적 소속감과 영적 안정을 되찾게 됩니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긍정하고 다시금 의미 있는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며, 그 존재를 받아들이고 불안에 맞서는 것이 궁극적인 용기입니다. 사마리아인의 감사는 그가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얻은 구원의 경험을 인정하며 표현한 것입니다. 이는 존재의 용기가 단순히 불안을 극복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께 응답하고 관계를 맺는 적극적인 실존적 결단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단순한 입술의 감사가 아니라, 그 놀라운 은혜, 삶의 의미를 깨달은 존재의 마땅한 반응은 감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감사는 바로 믿음을 가진 자의 반응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온전한 존재,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초대에 저와 여러분 모두가 진정한 용기로 응답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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